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5화 (55/141)

#55화

분명 사랑받는 내 삶은 행복한데. 왜 잠을 잘 때는 뒤숭숭한 꿈을 꾸는 건지.

왜 자꾸만 내가 죽는 꿈을 반복해서 꾸고, 죽기 전에 체스터의 얼굴이 보이는 건지. 악몽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서웠다.

내가 대체 이런 꿈을 꾸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황녀님!”

“응? 아! 맞다, 오늘이 오빠 성혼이었지?”

“네. 주인공은 따로 있기는 하지만, 황녀님은 좀처럼 바깥에 얼굴을 드러내시지 않으니 이런 날에라도 치장을 하셔야죠.”

“풉! 그래. 유모 마음대로 해.”

약혼식 이후부터 부쩍 유모는 나를 꾸미는 걸 좋아했다.

매일 꾸미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끔가다 한 번이니 그러려니 했다. 유모는 늘 내 드레스에도 세심한 심혈을 기울였으니까.

내 눈에는 그게 그거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유모는 허락을 받자마자 준비된 욕조에 나를 담그고 씻긴 후에 머리를 말려 주며 드레스와 장신구들을 쭉 나열했다.

“황녀님, 하늘색 드레스와 레몬색 드레스 중에 어떤 게 더 마음에 드세요?”

“어……? 오늘은 하늘색으로?”

“네.”

하늘색 드레스로 갈아입혀지고 장신구들도 푸른색 계열의 보석들이 박혀 있는 목걸이와 귀걸이를 착용했다.

화장은 악몽에 시달린 탓에 희게 질린 피부와 입술에 생기만 더한 채 옅게 했다.

유모는 빗을 가지고 와 내 머리카락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늘어뜨렸지만, 오늘처럼 격식이 있는 날에는 올려 묶었다.

“황녀님, 다 끝났답니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다워요.”

유모의 말대로 눈을 떠 거울을 보자 아름다운 천사가 안에 담겨 있었다.

예쁜 얼굴은 언제 봐도 질리지 않았지만, 확실히 꾸민 얼굴을 보니 더 화사하다는 느낌이 짙었다.

눈 밑에 있었던 다크서클이 가려지니 확실히 생기가 넘쳤다.

체스터가 나를 봐도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감쪽같은 솜씨였다. 그렇게 내 얼굴에 시선을 빼앗겨 감탄하고 있었다.

“시간도 여유 있게 남았네요. 지금 출발하시면 제시간에 도착하실 거예요.”

“응.”

유모가 놓아준 구두까지 완벽하게 풀 장착을 하고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차려입은 아빠가 보였다. 오빠는 없고 아빠만 있어 의아했었지만, 오빠는 이미 도착해 있다고 했다.

“예쁘구나.”

“신부보다는 덜 예쁠 거야.”

“율리아, 세상에서 네가 제일 예쁘단다.”

“……오늘은 그래도 신부가 더 예쁘죠. 오늘의 주인공이잖아! 그리고 내가 아빠 딸이라서 제일 예뻐 보이는 거야!”

사실 객관적으로도 내가 예쁜 건 맞지만 그래도 오늘의 주인공은 세실이니까.

뭐, 세실은 소설 속 주인공이니 완벽한 주인공이지만. 그래도 내가 예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정말 엑스트라인 것조차도 아까운. 차라리 비중 있는 악역이라도 되었어야만 하는 예쁜 얼굴이었으니까.

“한 달 후에, 네 결혼식도 계획해 놓았으니 내일부터 준비해 두는 게 좋겠구나.”

“정말로? 진짜?”

“그래. 사랑스러운 딸을 시집보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하지만…… 수도에 있는 지크베르트 공작저는 황성과 가까운 편이니 자주 볼 수는 있겠지.”

“응! 자주 올게, 아빠!”

“그래. 그거면 충분하단다.”

어쩌면 오늘이 아빠의 에스코트를 받는 마지막 날이 될 수도 있었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오빠의 결혼식, 정확히는 황태자비를 공표하는 모습을 보는 거였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면 무력은 체스터 쪽이 강한 게 맞지만, 현재 정치적으로 입지는 블레어 공작가의 입김이 더 셌다.

전 보수파의 수장이었던 전대 지크베르트 공작이 갑작스럽게 죽으면서 기반이 약해졌고, 체스터가 전장으로 떠난 사이 진보파가 정치계를 거의 장악했다고 들었다.

그나마 체스터가 전쟁에서 승승장구하며 귀환하면서 입지를 늘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내가 원작을 너무 맹신했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체스터가 원작 속에서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었기에 별로 현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탓이었을까.

“…….”

아빠와 함께 가장 상석에서 오빠와 세실의 결혼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게 있어서 소중한 가족인 오빠와 나의 유일한 친구인 세실의 결혼식인데 심장이 왜 욱신거리는 걸까.

아니, 욱신거리는 게 아니라 허전해진 기분이었다.

소중한 친구를 오빠한테 빼앗겼기에 느껴지는 허전함인지, 다정한 오빠를 친구에게 빼앗겼기에 느껴지는 허전함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수군거리는 수천 개의 소음이 머리를 괴롭게 했다.

“율리아, 힘들다면 돌아가도 괜찮단다.”

“……응, 그럼 잠깐 자리 좀 비울게.”

아빠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아마 아빠는 내가 이렇게 사람 많은 곳을 불편해한다고 생각하기에 나온 배려겠지.

깨질 것 같은 머리와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뺨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에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녀 전하.”

고개를 돌리자 이드리안이 있었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편했다.

“……무슨 일로 온 건가요? 제가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다음에 볼 때는 저와 체스터의 결혼식에서 보자고.”

“조심하세요.”

“뭐를요?”

“체스터도 결코 순수한 마음은 아닐 겁니다. 오늘은…… 단지 황녀 전하를 뵙고 싶어서 왔을 뿐입니다.”

“…….”

“괜히 황녀 전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네요. 다음에는 정말 황녀 전하의 결혼식에서 뵙겠습니다.”

이드리안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미련이 뚝뚝 묻어난 발걸음으로 내게서 멀어졌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여주는 엑스트라인 내 오빠와 결혼하고, 흑막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나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남주는 여주에게 사랑 고백을 하는 게 아니라 애꿎은 내게 사랑을 전했다.

“…….”

이제 안심해도 될까. 가족들도, 나도 죽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도 괜찮을까.

내가 기억하는 소설의 내용과 달라졌다. 그러니 나도, 내 가족들도 죽지 않을 게 분명한데 왜 이드리안이 남기고 간 그 말이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왜 나는 아직도 체스터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거지?

누가 봐도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게 분명한데, 이간질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나는 불안감을 느끼는 건지.

혹시 꿈 때문일까.

“율리아.”

뒤에서 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부르는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했다.

꿈에서 들었던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가 아니라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였다.

“체스터, 우리는 한 달 후에 결혼해요.”

“그렇습니까.”

“괜찮아요?”

“네. 안 괜찮을 게 있겠습니까. 한 달만 더 기다리면 당신을 가질 수 있다는 건데.”

체스터는 입고 있던 겉옷을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그리 추운 날은 아니었지만 옷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가 좋아 거절하지 않았다.

그의 옷을 좀 더 끌어당겨 옷에 남아 있는 그의 체온을 붙잡았다.

“감기 걸리지 말라고 했는데 이리 얇게 입으면 어찌합니까.”

“안 추웠는데.”

“걱정되게. 아프지 마세요, 율리아. 당신은 아프거나 다치면 안 돼요.”

“아직 추운 날도 아닌데, 너무 과한 걱정이에요.”

“전보다 살이 빠져 있던데 잘 좀 먹어요.”

“저 살 빠졌어요?”

“얼굴이 반쪽입니다.”

체스터의 관심과 걱정을 내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요즘 뒤숭숭한 꿈을 꿔서 그런가 봐요.”

“무슨 꿈을 꾸십니까.”

말해도 될까. 당신이 나를 죽이는 꿈이라고.

한참을 망설였지만 결국 그냥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옅은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냥 악몽이죠. 제대로 기억이 안 나요.”

“그렇습니까.”

“요즘 바빠요?”

“안 바쁩니다.”

“거짓말.”

“전혀 바쁘지 않습니다.”

체스터의 눈은 제대로 잠을 못 잔 사람처럼 퀭한데 바쁘지 않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까.

“안 바쁘다니 다행이네요. 한 달 후에 우리 결혼할 거니까 준비해야 할 게 많을 거거든요!”

“흐음…… 율리아, 신혼여행은 어디가 좋겠습니까?”

“어……? 으음, 바다? 바다가 보고 싶어요!”

체스터의 질문에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지만, 내 마음에는 의심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신혼여행은 섬이 좋을 것 같군요.”

분명 목소리도, 말투도 다정한데 왜 나는 불안함을 느끼는 건지. 그리고 왜 의심 어린 의문이 머릿속을 지배하는지.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을까?

분명 나는 널 사랑한다고 생각하는데 왜 내 마음의 한편에서는 미약한 불안감과 함께 불신이 크기를 부풀리고 있는 걸까.

내 마음의 문제일까? 아니면 내 믿음의 문제일까?

아직도 나는 체스터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할뿐더러, 의심의 끈을 온전히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 건지. 내 마음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가문 소유의 섬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거기로 가요.”

“네. 당신이 좋아하면 좋겠습니다.”

“한 일주일은 있으면 좋겠어요.”

“네. 가 보고 원하신다면 한 달이 넘도록 있어도 됩니다.”

체스터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부부 침실은 이미 만들어 두었습니다.”

“벌써요?”

“네. 많이 만들어 두었습니다. 나중에 직접 보고 마음에 드는 곳으로 결정해 주세요, 율리아.”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이게 행복이라는 걸까. 이게 행복이라면 영원히 이 달콤하고 간지러운 감각에 취해 있고 싶었다.

“아, 옷은…….”

“걸치고 있으세요. 다음에 돌려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냥 이대로 조금만 더 있어요.”

나를 안고 있던 체스터의 손 하나가 내 두 눈을 덮었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몸이 저절로 흠칫하며 반응하면서 눈을 가린 그의 손을 떼어 내려고 했지만, 뒤에 들려온 말에 손을 거두었다.

그래. 조금만 이러고 있지 뭐.

* * *

“사랑합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율리아의 귓가에 대고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차게 가라앉은 핏빛 눈동자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피우고 있는 율리아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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