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푹 잤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몸이 개운했다. 기지개를 펴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깼습니까?”
체스터의 목소리였다. 바로 옆에서 들려올 줄 알았는데 그는 침대가 아닌 소파에 있었다.
분명 어제, 같이 침대에서 잤는데 왜 그는 소파에 있는 건지 의아했다.
“체스터? 왜 거기에 있어요?”
“자제력을 유지하느라 그랬습니다.”
“요즘 잠 못 자요?”
그가 불면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했다.
“……네. 특히 어제는 유독 더 잠이 안 오더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체스터는 내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웃음을 지으며 물이 담긴 컵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목이 말랐기에 물을 몇 모금 삼키자 건조했던 입 안이 수분으로 가득해졌다.
체스터는 자연스럽게 내 손에 들린 컵을 가져갔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문득 이런 행동들이 마치 부부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체스터.”
“네?”
“가까이 와요.”
체스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지만 순순히 내 근처로 다가왔다. 그대로 두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붙잡아 가까이 잡아당겼다.
가까이서 보니 체스터의 눈 밑이 정말 잠을 못 잔 사람처럼 거뭇거뭇했다. 약간 퀭한 느낌도 났고.
“이제 돌아가야 하죠?”
“……아쉽지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잠 제대로 자야 해요!”
“흐응…… 율리아, 제가 누구 때문에 잠을 못 잔 건지 알면 그런 말이 안 나올 겁니다.”
나는 걱정해 주고 있는 건데 체스터는 악동처럼 눈웃음을 짓고 짓궂게 그의 뺨을 붙잡고 있었던 내 손을 잡아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 모습이 너무 야릇하게 느껴져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체스터는 요물이었다! 지금 방 안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점을 이용해서 아주 제대로 요망하게 행동했다.
“장난치지 마요!”
“결혼하면 돌아갈 필요가 없는데, 어서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
“어서 결혼해야 당신을 독점할 수 있을 텐데.”
뭔가 주변의 공기가 후끈하게 달아오른 것만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체스터의 눈빛에서는 위험함이 느껴졌다. 마치 그의 눈동자만으로 잡아먹힐 것 같다는 느낌이 생생했다.
내 손바닥에 닿아 있던 입술이 어느 순간 내 입술 위로 포개져 있었다. 정말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로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래야 이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체스터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순간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내 앞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김과 동시에 이마 위에 입을 맞췄다.
“저는 당신을 슬프게 하거나 아프게 하지 않을 겁니다.”
“……체스터.”
“사랑합니다, 율리아.”
사랑한다는 그 말에 심장이 팔딱팔딱거리며 통제를 잃고 날뛰었다.
체스터는 나를 끌어안으며 품에 가두었다. 그는 내 귓가에 입술을 대고는 나직하게 아쉬움을 토로했다.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당신과 함께 있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 아쉽습니다.”
“배웅해 줄게요!”
“사양하겠습니다.”
“……싫어요?”
“그것보다는 아침이라 날이 쌀쌀합니다. 안에 있으세요, 감기에 걸릴까 걱정됩니다.”
나를 걱정하는 체스터의 말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정말 사랑받는 느낌이 다분해서.
“겨울도 아닌걸요. 체스터는 매일 데려다줬는데…… 저는 체스터한테 폐만 끼치는 것 같고…….”
“전혀 폐가 되지 않습니다, 율리아. 저를 위한다면 안에서 창문으로 배웅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정말 그걸로 괜찮아요?”
“네. 그거면 됩니다. 그리고 감기 조심하세요.”
체스터는 걱정이 너무 많았다. 그게 싫은 건 아니었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진짜 배웅 안 해 줘도 돼요?”
“네. 몸조심하세요.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오히려 배웅해 주면 제가 못 떠날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래도 창문은 열 거예요.”
체스터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주며 마지막으로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고작 어제 하루 같이 있었을 뿐인데 헤어지는 게 아쉬웠다. 원하면 언제든 그를 만나러 갈 수도 있는데.
하지만 오늘은 그를 따라갈 수는 없었다. 어제 체스터의 시간을 내가 전부 빼앗았으니 아마 그는 돌아가자마자 해야 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게 미안해서라도 붙잡지도 따라갈 수도 없었다.
“율리아, 제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 방문해 주세요. 지크베르트 공작저의 문은 당신에게는 늘 열려 있을 테니까요.”
“네.”
“사랑합니다. 제 생각만 해 주세요, 율리아.”
“알겠어요.”
체스터는 정말 바쁜지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자 체스터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내게 웃어 주었다.
심장을 간지럽히는 이 달콤한 감정이 무척 설레고 따뜻했다.
나도 이제는 평범하게 사랑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사랑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 * *
잠옷에서 실내용 드레스로 갈아입고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오빠와는 말을 했지만, 아빠한테는 사과하지 못했으니까.
이제 나는 아빠가 나로 인해 죄책감을 갖지 않기를 바라니까.
황제가 거주하는 중앙으로 가자 아빠는 집무실에 없었던 건지 시종장의 안내를 받아 현재 아빠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익숙한 장소와 함께 벤치에 앉은 아빠의 뒷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
아빠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움의 눈동자로 누구를 보고 있는지 아니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 버린 나와 오빠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 더는 곁에 없는 소중한 가족.
엄마를 보고 있었다. 엄마의 묘비에는 꽃 한 송이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아빠가 가져다 놓은 것이 분명했다.
“오빠랑은 얘기했어.”
더는 외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내용이 언급될 수도 있었고, 이 일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는 것도 염려되었기에 주변을 물렸다.
그리고 아빠의 옆에 앉았다.
“나. 이제 아빠 용서해.”
“……평생 용서해 주지 않아도 된단다.”
“이제 용서해 줄게. 그리고 언젠가는 용서할 생각이었어.”
단지 오랜 시간 동안을 잊고 지냈던 것뿐.
결코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에 모든 흔적들을 태우고 지웠을 뿐이었다. 그렇게 잊었던 과거의 기억을 이제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을 뿐이었다.
영원히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고 살 수 있었으나 결국 다시 한번 떠올렸다.
아빠와 오빠를 이해했으니까. 나보다 엄마를 더 사랑한 두 사람이었고, 나와 함께했던 시간보다 엄마와 함께했던 시간이 더 길었으니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도, 오빠도 나 미워했던 거 알아.”
“…….”
“이해해. 많은 시간을 함께해 온 엄마를 병들게 한 원인을 어떻게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어.”
“미안하구나…….”
“됐어. 이제는 미안하다는 말은 지겨우니까.”
이제 더는 그 누구도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으니까. 그걸로 충분하니까.
“이제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났어.”
“지크베르트 공작을 말하는 거구나.”
“맞아, 이제는 그 사람이랑 함께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어.”
“그래. 지크베르트 공작이라면 널 충분히 사랑해 주겠지. 이 아비보다 더 너를 챙겨 줄 사람이라는 것도 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내게 보여 준 행동을 보면 정말 나를 사랑해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어제…… 지크베르트 공작이 왔다 들었단다.”
“맞아. 그리고 결혼 앞당기려고.”
“……그래.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원하는 대로 하렴.”
“이제는 아빠도, 오빠도 행복해지면 좋겠어.”
“네가 행복해지는 게 내가 행복해지는 길이란다, 율리아.”
체스터의 말대로 날은 쌀쌀했지만 바람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살포시 두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다.
“행복할 거야. 그는 날 무척 사랑해 주거든.”
“다행이구나. 지크베르트 공작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결혼을 앞당기고 싶다는 거겠지.”
“함께 있고 싶어서. 그 사람이랑 더 오래, 더 많이 함께 있고 싶어.”
“그래.”
“오빠 결혼 앞당기라는 소리인데.”
“……그래. 네가 그리 말한다면 앞당기는 게 맞겠지.”
“오빠보다 빨리 결혼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오빠부터 빨리 장가보내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으니까.
“율리아. 미안했고…… 미안하다.”
“용서한다니까. 그리고…… 결혼하면 체스터도 그날의 진실을 알 자격이 있어.”
“그래.”
“내가 직접 말할 용기는 없으니까…… 아빠가 대신 말해 줘.”
“그러마. 율리아, 행복해지렴. 지금 이 아비가 네게 속죄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뿐이겠구나.”
“아빠도 행복해지면 좋겠어. 이제 더는 죄책감 갖지 말고.”
고개를 돌리자 아빠의 슬퍼 보이는 눈동자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아빠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 * *
짧은 은빛 머리카락이 불어오는 바람에 따라 살랑이며 흔들렸다.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에는 짙은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쿨럭쿨럭!”
이내 황제의 입에서는 메마른 기침이 터져 나왔다. 아직은 피가 손바닥에 묻어나지 않았으나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겉으로는 황족의 축복으로 본래의 나이보다 젊어 보였으나 황제는 스스로의 몸 상태를 알고 있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고,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침묵하고 있었다.
“레아.”
죽은 황후의 이름이었다. 황제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앞으로 살아 있을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