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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3화 (53/141)

#53화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입술을 포개고는 바로 떼어 내지 않았다.

그의 말캉한 혀가 입술에 닿는 순간 떼어 내려 했지만, 그의 손이 목덜미를 꽉 잡아 머리를 단단히 고정하는 바람에 피할 수도 없었다.

살포시 눈을 감고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 틈으로 말캉한 살덩이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잇새로 훅 들어오는 체스터의 숨결은 무척 뜨거운 동시에 사탕처럼 달았다.

밀려 들어온 살덩이는 능숙하게 입 안을 훑고 뻣뻣하게 굳어 있는 내 혀를 부드럽게 옭아매더니 타액을 밀어 넣었다.

몸이 휘청이자 체스터는 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아 좀 더 입 안 깊은 곳까지 탐했다.

뒤엉킨 혀가 풀어지더니 시원한 공기가 들어오면서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하…… 체스터.”

내 이마 위로 그의 이마가 맞닿았다.

“율리아, 저는 당신에 대해 궁금한 게 많습니다.”

“제가 궁금해요?”

“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

“당신이 왜 이렇게 아파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무엇이 당신을 괴롭게 했던 건지…… 제게 알려 줄 수 있나요?”

아주 가까이 있는 체스터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빛에서는 나를 향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고민됐다. 과연 그날의 진실을 알게 되어도 체스터가 나를 향해 애정보다 동정이나 연민의 감정이 더 커질까 봐.

나는 그의 사랑을 바라는 건데. 그의 슬픔이 될까 봐 진실을 알려 주기가 망설여졌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저 당신이 알려 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아주. 아주 조금만 알려 줄게요.”

그날의 일을 전부 말하기엔 내 정신이 버티지 못할 테니까. 아주 조금은 체스터도 알 권리가 있으니까.

“절대로…… 나 동정하거나 연민하면 안 돼요.”

“네. 동정도 연민도 하지 않고 사랑만 하겠습니다, 율리아.”

“따라와요.”

체스터의 손을 꼭 붙잡고 익숙했지만, 이제는 낯설게 느껴지는 곳으로 움직였다.

십 년이 넘도록 근처도 가지 않았던 곳. 지금은 폐허나 다름없게 되었을 나의 끔찍한 유년 시절이 담긴 궁이었다.

더는 사용되지 않아 폐쇄되고 차마 불태우지 못한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될 이번 대 황실의 수치스런 역사가 담긴 장소였다.

“율리아? 여기는…….”

“제가 어렸을 때 살았던 궁이에요. 지금 지내고 있는 곳에 비한다면……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죠.”

“그것보다는.”

“저는 처음부터 사랑받는 황녀가 아니었어요, 체스터.”

주변을 둘러보니 정원조차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실내로 들어간다 해도 상태는 외부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혼자였다면 절대로 오지 않았을 장소였지만 체스터와 함께 왔기에 적어도 숨은 쉴 수 있었다.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탁한 공기가 느껴졌다. 전혀 그럴 리 없는데 과거의 기억이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오히려…… 모두의 원망의 대상이었죠. 한때는 저도 제가 미웠어요. 태어난 게 죄라고 생각했거든요.”

“율리아.”

“저는 엄마와의 추억이 많지 않아요. 오히려 유모가 더 엄마 같은 존재예요.”

“…….”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저는 엄마의 대체품으로 살아왔어요.”

유모는 내게 있어서 정말 엄마와 마찬가지인 사람이었지만, 유모가 내게 품은 감정은 모성애라기보다는 연민과 동정에서 비롯된 안타까움이었다.

엄마를 일찍 잃고 엄마와 똑 닮은 얼굴을 가졌기에 죽은 엄마의 대체품이 되었다.

어리고 아무런 힘이 없는 약한 아이는 막강한 권력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었으나 원망이 아닌 따뜻한 애정에 흔들렸다.

“딱 한 번 반항했어요. 그때 이후로 이 궁은 폐쇄되고 저는 새로운 궁을 하사받았어요.”

“…….”

“그리고 지금 지내는 궁이 그때 하사받았던…….”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체스터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을 뿐인데 왠지 슬픔이 끌어 올라왔다.

체스터의 품이 무척이나 따뜻해서 마음이 안정을 찾아갔다.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내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율리아, 더는 말하지 마세요. 그리고 떠올리지도 말고요.”

“……체스터.”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마치 그에게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체스터 특유의 다정한 목소리가 심란하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두 눈을 감고 그의 따뜻함을 몸으로 만끽했다.

그는 손으로 내 등을 토닥였다.

“저는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습니다.”

“……파혼 안 해요?”

“제가 왜 파혼합니까.”

“고작 이런 사소한 일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던 제게 실망하지 않았어요?”

“당신한테는 사소한 일이 아니잖아요.”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안락함에 취하고 싶었다.

아직 체스터에게 전부 말해 주지는 못했다. 이 이상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는 건 내게 무리였으니까.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낙원과 지옥이 공존했던 그 날의 기억이 괴로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데 있어 당신의 과거가 제 감정을 바꾸지는 않습니다, 율리아.”

“…….”

“왜 당신이 제 진심을 불신했는지 알았습니다. 당신이 당신에 대해 제게 알려 준 만큼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뭐를 노력해요?”

“당신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제 진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겠습니다.”

왜 체스터의 저 말에서 불안함이 느껴지는 걸까?

다행히도 내 걱정과는 다르게 체스터는 사탕처럼 달콤한 말을 나직한 음성으로 내게 속삭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사랑한다는 말을 수백 번이고 수천 번이고 수도 없이 당신의 귓가에 속삭일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 사랑한다고 해 줘요.”

“사랑합니다, 율리아.”

“……저도요.”

체스터는 나의 안정제였고, 동시에 나의 웃음이 되어 주었다.

* * *

씻고 가벼운 슈미즈를 입은 채, 발코니로 나갔다. 차가운 밤바람이 살갗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감각이 나쁘지 않았다.

멍하니 달을 바라보았다. 순간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에 담요를 덮어 줌과 동시에 나를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이런 행동을 할 사람은 단 한 명이었기에 단단한 품에 몸을 편히 기대었다.

“하아…… 율리아,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면 어쩌시려고 이럽니까.”

“체스터만 저한테 이렇게 행동할걸요?”

“저여도 위험합니다.”

“왜 위험해요?”

“아직은 참아야 할 때니 전혀 위험하지는 않을 겁니다.”

체스터가 나를 뒤에서 안고 있는 이 자세가 무척 로맨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를 독차지하는 것 같아서.

“율리아, 추우니 얇게 입지 마세요.”

“왜요?”

“감기 걸립니다.”

“제가 얇게 입고 있으면 체스터가 따뜻하게 해 주면 되잖아요.”

체스터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네요.”

“체스터.”

“네.”

“저는 바라는 게 단 하나뿐이에요. 당신이 저를 사랑한다는 게 진실이라는 거 하나만 원해요.”

“더 요구해도 됩니다, 율리아.”

이어지는 체스터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제 내게 있어서 체스터가 원작 속 흑막이든 흑막이 아니든 더는 상관없었다. 체스터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변함없이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까.

단지 원작처럼 내 가족들을 죽이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나를 향한 그의 감정이 진심이라면 무엇이든 감당할 수 있으니까.

그가 원작보다 더 잔인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지금 느끼는 심장을 간지럽히는 이 감정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니까.

원작의 율리아도 이런 몽실몽실한 감정 때문에 그렇게 집착했던 걸까. 궁금했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난 후에 드는 건 원작대로 흘러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었다. 원작 속에서 체스터를 사랑한 율리아의 결말은 비극이었으니까.

“당신은 많은 걸 욕심내도 됩니다. 당신이 바라는 건 무엇이든 기꺼이 내어 드릴 테니까요.”

“정말요? 하지만 제가 바라는 건 체스터뿐이에요.”

“저는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율리아.”

체스터의 다정함이, 그가 주는 달콤하고 따뜻한 애정이 나의 안정과 행복이 되어 주었다.

아빠와 오빠와 있었던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니까. 더는 그들이 나로 인해 죄책감이라는 족쇄에 발이 묶여 있지 않길 바라니까.

나는 두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로 했으니까.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동시에 내게 소중한 가족들이 더는 나로 인해 고통받지 않길 바라고 행복하길 원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원하는 건 나의…… 행복이니까.

“체스터.”

“네?”

“같이 자요. 어차피 자고 갈 거면 제 옆에서 자요.”

“율리아…….”

“어…… 음, 혹시 싫어요?”

“싫을 리가 있겠습니까.”

체스터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애정 표현이 좋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간지러웠다.

“체스터, 달이 예쁘지 않아요?”

“글쎄요. 전혀 모르겠습니다. 제 눈에는 당신이 가장 예뻐서요.”

그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 해가 아닌 달이 떠 있어서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이 체스터에게 드러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말 체스터는 어쩜 이렇게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걸까. 이러니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들어가요.”

들어가자는 말에 체스터는 냉큼 발코니 문을 열어 주었다.

실내로 들어와 어깨에 걸쳐진 담요를 걷어내자마자 체스터가 그걸 가져가더니 알아서 정리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슈미즈 차림이었기에 침대에 먼저 가서 이불 속을 파고들며 누웠다.

“체스터, 빨리 와요!”

“네. 알겠습니다.”

체스터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침대로 다가와 바로 내 옆에 누웠다.

몸을 데굴데굴 굴려 그의 옆에 찰싹 붙었다. 그대로 체스터를 꽉 끌어안고 그의 온기를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푹신한 베개에 머리가 닿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졸음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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