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체스터와 다정한 연인처럼 팔짱을 끼고 내가 주로 산책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결국 정착한 곳은 온실이었다.
여기에서 디저트를 먹을 생각이었다. 물론 체스터는 단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내가 단 걸 좋아했으니 변하는 건 없었다.
오늘의 후식은 딸기 파르페였다. 이유는 그냥 내가 먹고 싶어서.
온실에 있는 티테이블에 앉아 있자 금방 딸기 파르페를 내왔다.
딸기 파르페를 거의 다 먹어갈 때였다. 체스터가 눈에 들어온 건.
“어…… 으음, 체스터.”
“단 걸 무척 좋아하는군요. 다 먹을 때까지 제게 눈길 한 번 주시지 않을 정도로.”
“……화났어요?”
“제가 이 정도로 화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아뇨!”
체스터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더니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딸기 파르페를 내 앞에 놓아주었다.
그의 저의를 알아차리지 못해 눈만 깜빡이며 그에게 설명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차피 저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진짜 제가 먹어도 괜찮아요?”
“네. 저는 단 건, 안 먹습니다.”
살짝 머뭇거리긴 했지만, 굳이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냉큼 딸기 파르페를 한 입 먹었다.
그래도 체스터의 눈치를 안 보기는 어려웠다.
먹으면서도 힐끗힐끗 대며 그의 눈을 유심히 살폈다. 혹시라도 시선이 마주칠 때면 화들짝 놀라 피하는 건 온전히 내 몫이었다.
“으음…… 체스터, 딸기 먹을래요?”
체스터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포크로 딸기를 푹 찍어서 그의 입 앞에까지 팔을 뻗어 딸기를 내밀었다.
“먹을래요?”
“흐응…….”
“안 먹어요?”
체스터는 내가 포크를 쥔 손을 부드럽게 말아 쥐더니 딸기를 내 입 속에 쏙 넣었다.
그냥 나보고 먹으라는 뜻인가.
“준다니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네?”
잠시 그가 무슨 뜻으로 저리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이내 그의 행동으로 무엇을 의미했던 건지 깨달았다.
체스터는 내가 다가오더니 그대로 입술을 겹쳐 왔다.
내 입 안에 남아 있는 딸기가 목적이 아니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정말 체스터도 이럴 때 보면 귀여웠다. 그래서 조금 장난을 치고 싶었다.
입 안에 있던 딸기를 혀로 밀어 맞닿은 그의 입 안에 쏙 넣어주고 머리를 뒤로 내빼어 입술을 떨어뜨렸다.
“딸기 맛있죠?”
“흐음…….”
역시 체스터의 목적은 내 입술이었는지 다소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왠지 사랑스럽게 느껴져 얼굴에 웃음이 사르르 번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율리아.”
“그럼 어떻게 해야 알 것 같아요?”
“좀 더 먹어 보면 알 것 같습니다.”
체스터는 피식 웃더니 내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고는 다시 입술을 포개었다.
그의 혀는 잇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아까보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정말 그의 혀는 내 치열 하나하나를 훑으며 마치 입 안을 맛보는 것처럼 움직였다. 더운 숨결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는 입천장을 혀로 쓸고는 만족했다는 듯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맛있네요. 제가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는 딸기였습니다, 율리아.”
체스터는 도로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웠지만 그 눈빛이 싫지는 않았다.
앞에 놓인 파르페를 마저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입 안에서 달콤함이 퍼지며 감돌았다.
활짝 웃으며 앉아 있는 체스터의 손을 꼭 잡고 온실 밖으로 나갔다.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나란히 걷는 것도 좋았으니까.
체스터와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걷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쳤다.
“율리아.”
“…….”
오빠였다. 나도 모르게 체스터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아직은 오빠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물론 내 마음이 갈무리되긴 했지만 아직은 오빠랑 아빠를 보기가 두려웠다.
내가 내뱉은 말의 무게가 어떤지 나는 알고 있으니까.
“율리아. 잠시 얘기할 수 있을까.”
“……오빠랑은 할 얘기 없어.”
“시간을…… 조금이라도 내어 줄 수 있을까.”
아직 오빠와 대화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회피하기만 할 거야? 결국 내가 찾아가거나 오빠가 나를 찾아오거나 둘 중 하나였잖아.
그리고 내가 찾아가기 전에 오빠가 나를 찾아왔는데 왜 피하려고 하는 거야.
“체스터. 잠시만 기다려 줄 수 있어요?”
“네.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제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네.”
체스터를 먼저 올려 보내고 오빠와 둘이 마주했다. 오빠를 보는 게 껄끄럽게 느껴지는 건 그때 이후 처음이었다.
“약 먹었어. 지금은 괜찮아.”
“……율리아, 미안해.”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래도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오빠.”
“내가…… 전부 잘못했어, 율리아. 평생을…… 네게 속죄하며 살게…….”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과 힘겹게 이어지는 듯한 말이 심장에 아릿한 통증을 만들었다.
“됐어. 지금까지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굴었지? 아빠한테도 전해 줘.”
두 팔을 뻗어 나보다 훌쩍 큰 오빠를 안정시키기 위해 끌어안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제 죄책감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율리아, 너는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아니야, 정말 괜찮아. 그리고 감정이 격해져서 미안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오빠가 오빠의 삶을 살면 좋겠어.”
“…….”
“내가 오빠랑 아빠를 너무 붙잡았던 것 같아. 이제 더는 그때의 일로 괴로워하지 않아도 돼.”
오빠는 나를 마주 안아 주었다. 하지만 이내 몸으로 전해지는 깊은 떨림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사람처럼 무척이나 불안정하게 느껴져서. 마치 흐느끼고 있는 사람처럼.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네게 잘해 주라는 말이었는데, 하나뿐인 동생인 너를 사랑해 주라고 했는데…….”
“…….”
“네가 가장 필요할 때 널 외면했던 것도…… 널 미워했던 것도…… 전부 미안하고, 그러니 남은 시간은 너를 위하는 게 맞아.”
왜 우리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잊을 만하면 과거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오빠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직도 과거에 붙잡혀 있는 탓이겠지. 그리고 그렇게 만든 원인은 나였다.
이 모든 게 전부 내 업보였다.
“오빠.”
떨고 있는 오빠를 놓고, 오빠의 양 뺨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아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이제 나는 그때의 어린아이가 아니야.”
“율리아.”
“이제는 오빠한테 도움을 바라는 힘없고 외로운 동생은 없어.”
나와 똑같은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나는 이제 나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났고, 아빠와 오빠가 내게 저지른 과거를 용서할 거야.”
“율리아…….”
“나는 아빠랑 오빠를 이해하니까. 그러니 오빠도 나한테, 그리고 엄마의 그늘에 얽매이지 마.”
“…….”
“이제 나는 행복을 찾았거든. 그러니 아빠도, 오빠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됐다.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내뱉었다.
더는 아빠의 죄책감이, 오빠의 후회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아빠한테는 사랑스러운 딸이, 오빠에게는 귀여운 여동생으로 남고 싶었다. 그들의 아픔이 아니라 소중한 가족으로.
“율리아. 나는…… 어머니께서 남긴 부탁 중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어.”
“괜찮아. 엄마는 내 행복을 바랐잖아. 그러니 오빠도 내 행복을 바라 주기만 하면 돼.”
“하지만……!”
“응? 나는 그거면 돼. 나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행복하길 바라거든.”
오빠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오빠의 뺨을 붙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오빠를 지나쳤다. 오빠는 몸을 돌리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조만간 아빠도 보러 갈 거야. 그렇게 나를 위하고 싶다면…… 엄마 때문에 나를 사랑해 주는 게 아니라, 가족이니까 사랑해 줘.”
“……율리아.”
“나 이만 가 볼게. 나는 그냥 아빠랑 오빠가 나를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해 주면 좋겠어.”
“……그래.”
대답을 들었으니 됐다. 온전히 오빠를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체스터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 빨리 가야지. 그는 내 존재 자체를 사랑해 주는 거니까. 정확히는 나를 연인으로 사랑하는 거니까.
당연히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체스터는 계단에 앉아 있었다.
“얘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네. 잘 끝났는데…… 왜 여기에 있어요?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니까.”
“아직 산책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착각한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꼭 키스하기 직전처럼.
“체스터?”
“눈 감아요.”
그는 나직하게 속삭이며 옅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맞췄다.
평소처럼 혀를 밀어 넣는 게 아닌 잠시 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체스터를 보는 순간 다정한 연인은 온데간데없고 장난기가 가득한 연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 나쁜!”
“평소처럼 해 주길 바라십니까?”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평소처럼은…… 둘만 있을 때는 괜찮…….”
“지금 여기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체스터는 악동 같은 표정을 짓더니 내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