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눈이 떠지자마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히 옆을 본 순간 체스터가 있어서 초조했던 마음은 안정을 찾은 듯 심장이 정상적으로 뛰었다.
“율리아, 깼습니까? 이제는 괜찮습니까?”
“네, 괜찮아요. 지금…… 몇 시예요?”
“오후입니다. 점심은…… 여기로 가져오라 할까요?”
“네.”
그가 설렁줄을 당기자 들어온 시녀에게 점심 식사를 여기로 가지고 오라 말했다.
나는 그동안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의자에 앉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그의 몸에 내 몸을 기대었다.
혹시 무겁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체스터는 그의 무릎에 앉은 내 허리를 팔로 단단히 휘감았다.
맨살이 드러난 어깨에 그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느껴지자 몸이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체스터!”
“아…… 먼저 이렇게 사랑스럽게 굴어서 애정 표현을 해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싫은 건 아닌데, 키스는 입술에 해 줘요.”
살짝 투덜거렸을 뿐인데 그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는 게 바로 옆에서 느껴졌다.
“왜 웃어요!”
“당신이 너무…… 잡아먹고 싶게 예뻐서요.”
그의 말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지금 상태로는 절대 체스터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체스터는 갑자기 내 귓불을 입술로 앙 하고 아프지 않게 물었다.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낯설면서 간지러운 감각에 깜짝 놀라 그가 물었던 귀를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돌려 체스터를 바라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귀가 붉어서요. 지금 얼굴도 완전 새빨간 거 알아요, 율리아?”
“놀리지 마요!”
“저 좀 보면서 말해요.”
“……웃지 마요.”
“네. 안 웃겠습니다. 그러니 저 좀 봐 주세요, 율리아.”
하도 체스터가 자신을 봐 달라고 보채서 마지못해 몸을 틀어 그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역시 내 연인이지만 정말 잘생겼다.
무의식적으로 체스터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는 사이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아 있었다.
“이제는 괜찮습니까?”
“진짜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한테는 눈치 보지 말고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세요. 그리고 이미 했던 말이지만 저는 당신이 제게 의지해 주면 좋겠습니다.”
“…….”
의지해 주면 좋겠다는 그 말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체스터를 의지해도 괜찮을까? 하지만 의지했다가 그에게 버림받으면 어떡해? 버림받아도 멀쩡할 수 있을까?
여기서 우스운 건 걱정도 들었지만, 체스터가 이렇게 말을 해 줘서 기쁘다는 거였다.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여기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율리아.”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속삭이자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차마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결국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의지하겠다는 말도, 의지하지 않겠다는 말도 둘 중 무엇도 꺼내지 못했다.
“제가 말했죠. 저는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왜 저를 사랑해요?”
의지해도 정말 괜찮냐는 말이 아닌 다른 말이 툭 튀어나왔다.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수도 없이 많은 의문이 들었으니까.
왜 체스터는 원작과 다르게 나를 사랑하는 건지. 도대체 내 행동 중 무엇이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지.
한때는 내 몸을 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보더라도 내 몸이 아닌 내 마음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머릿속에서는 계속 의아함이 커져만 갔다.
고작 20살 때까지 공식적인 자리에 얼굴을 비추지 않은 채 하룻밤의 일탈로 인해 원작이 이토록 바뀌었다는 게.
그리고 내 몸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원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당신을 사랑하는 데 이유가 있을까요.”
“…….”
“그저 자각하고 나니 저는 당신을 사랑하는 중이었는걸요.”
체스터의 그 말이 진심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던 머리를 떼어 내 고개를 살짝 들었다.
체스터와 시선이 교차했다.
거짓말로 보이지 않는 진심 그리고 그와 뒤섞인 짙은 열망이 그의 눈동자에서 읽혔다.
짙은 열망?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호선이 그어지더니 그의 손이 내 뺨과 머리카락을 파고들며 조심스레 감쌌다.
“어…… 체스터?”
“당신이 너무 사랑스럽습니다.”
“……저도.”
체스터를 보면 평소보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빠르게 뛰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웃고 있다는 건 사랑이 맞겠지.
이런 감정을 사랑이라 하고, 느껴지는 감각을 설렘이라고 하는 거겠지.
막상 내가 느끼고 있는 이 달콤한 감정을 입 밖으로 솔직하게 내뱉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게 사랑스럽다고 하는 그에게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 주고 싶었다.
살짝은 쑥스러웠지만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망설임 끝에 사랑한다는 말을 토해 냈다.
“……저도 체스터를 사랑해요.”
신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얼굴이 가까워졌고 그의 숨결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이었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반사적으로 그의 몸을 밀쳐내려다가 그의 무릎에 앉은 내 몸이 넘어지려 했다.
그대로 바닥에 뒹굴 줄 알았는데 체스터의 손이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율리아…… 놀랐잖아요.”
그는 붙잡은 내 허리를 끌어당겨 도로 무릎에 안정적으로 앉혔다.
이제는 내가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게 내 허리를 휘감은 팔에 단단히 힘을 주었다.
끼익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며 방 안으로 음식과 함께 들어오는 유모와 눈이 마주쳤다.
“……유모!”
황급히 그의 무릎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여 봤지만 내 허리를 휘감은 그의 팔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줬지만 전혀 풀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바로 그의 손을 찰싹하고 몇 번 때려서야 그는 나를 놓아주었다.
그의 무릎에서 내려와 유모가 세팅하고 있는 테이블의 의자에 앉았다.
“유모. 오해야.”
“괜찮아요, 황녀님.”
“진짜 오해야!”
“제가 조금 더 늦게 왔어야 했는데 너무 일찍 왔나 봅니다. 다음부터는 좀 천천히 올게요.”
유모는 단단히 오해한 것처럼 보였다.
진짜 방금은 입술 한 번 부딪히지 않았는데!
“다 먹으면 부르세요. 본의 아니게 두 분의 시간을 방해했으니까요.”
유모는 내게 변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는 유유히 방 밖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목을 기계적으로 움직이자 바로 체스터의 얼굴이 보였다.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였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체스터의 눈매는 부드럽게 휘어졌다.
“율리아.”
“네에?”
“아까 못한 거 지금 할래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펌프질을 하는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율리아. 대답해요.”
“뭐, 뭐를요?”
“제가 키스해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는 당신의 입술에.”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임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겹쳐졌다.
벌어진 입술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오려는 살덩이에 살짝 뜨고 있던 눈을 이내 온전히 감았다.
그의 혀가 잇새 사이로 파고들어 입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는 얽힌 혀를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뜨겁게 달궈지는 착각이 들었다.
숨이 차오를 때까지 그는 내 입 안을 탐하고서야 맞물려 있던 입술을 떨어뜨렸다.
“하아…… 하, 체스터?”
내 입술과 그의 입술을 연결시키는 것처럼 투명한 은실이, 입술이 떨어지면서 길게 늘어지다 툭 끊어졌다.
체스터는 내 맞은편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으려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순수한 애정을 품고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내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이제 점심 먹어야죠.”
“…….”
물론, 먹을 거지만…… 설명하기는 애매한데 뭔가 얄미웠다.
그래도 일단 테이블에 놓인 음식부터 먹었다. 음식을 삼키면서 앞에 있는 체스터를 흘끗 바라보았다.
내가 많이 변했다는 게 느껴졌다.
그를 처음 봤을 때만 하더라도 이렇게 같은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예전과 달리 지금은 그를 봐도 벌벌 떨지 않았다.
흑막이라는 걸 알지만 체스터가 원작처럼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심증이 있기 때문인 건지.
냉혹하던 꿈속의 체스터와 눈앞에 있는 체스터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내가 생각하기 때문인 걸까.
뭐가 되었든, 나와 체스터의 관계가 아주 많이 변했다는 건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체스터.”
“네.”
원작대로면 내가 그에게 첫눈에 반해 졸졸 쫓아다니며 짝사랑의 고통을 느끼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체스터는 그런 내게 눈길을 주더라도 차가운 눈빛으로 흘려 보기만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원작과 달랐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로 발전을 했다.
나는 그에게 귀찮은 존재가 아니라 그에게 있어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달콤한 사랑을 받는 그의 연인이었다.
“으음…… 체스터, 오늘 날씨가 좋은 것 같은데…….”
“네. 날씨가 무척 좋네요.”
“다 먹으면 저랑 산책해요.”
“그러죠.”
그는 살짝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무척이나 다정한 연인의 표본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
원작의 율리아도 사실은 사소한 그의 행동과 얼굴에 의해 사랑에 빠졌던 게 아니었을까.
그랬기에 그토록 체스터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집착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가요.”
“율리아. 저랑 둘이 있을 때는 괜찮지만…… 아무리 황성이어도…… 정원으로 나가기에는 옷차림이…….”
“아! 조금만 기다려 줘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나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체스터가 나가고 유모에게 언질을 해 둔 건지 유모가 드레스와 함께 들어오며 드레스를 내게 입혀 주었다.
옷을 입고 굽이 낮은 구두를 신고 기다리고 있던 체스터에게 다가가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체스터! 이제 가요!”
“네, 율리아.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이내 그와 팔짱을 끼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어 환하게 웃었다.
“당연하죠!”
지금의 평온이 영원하길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