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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50화 (50/141)

#50화

체스터는 이내 물이 들어 있는 컵을 내게 쥐여 주었다.

이미 입 안에 들어간 약을 뱉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물을 삼키며 약을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그는 내가 약을 삼킨 것을 확인하고는 내가 들고 있던 컵을 가져갔다.

“……체스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체스터는 내게 가까이 왔다.

“더 가까이 와요.”

체스터는 더 가까이 오라는 말에 순순히 따랐다. 정말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율리아?”

“실망……했어요?”

“그래 보이십니까.”

마음이 변하면 순순히 파혼해주겠다고 한 말이 후회되었다.

이렇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았으니 있던 정이 뚝 떨어졌겠지. 아니, 애정은 남아 있더라도 결혼은 꺼리겠지.

저절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체스터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내 허리에 팔을 휘감아 마주 안아주더니, 내 등을 아주 조심스럽게 토닥여주었다.

“오히려…… 당신이 제게 의지해주면 좋겠습니다.”

그는 불안정한 나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든, 어떻게 행동하든, 무슨 말을 해도 저는 실망하지 않을 겁니다.”

“진짜?”

“네. 저는 당신의 모든 것을 사랑하니까요.”

사랑이라는 달콤한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체스터의 그 속삭임은 무척이나 달았다. 그가 한 말에 녹아들고 싶었다.

“저랑…… 파혼 안 해요?”

“제가 왜 당신과 파혼을 합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제 마음이 변할 리는 없을 거라고.”

“……체스터. 진짜 괜찮아요?”

“안 괜찮을 게 있습니까.”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율리아. 제가 닿는 건 괜찮습니까?”

“네?”

“저번에 하녀들을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오늘 일과 관련이 있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내 몸이 체스터와 닿아 있는 데다 내가 지금 떨고 있다는 것을 그도 인지했으니 숨길 수는 없겠지.

“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아요.”

“괜찮습니다. 말하기 힘들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율리아.”

체스터는 가볍게 나를 들어 안더니 침대에 똑바로 눕혀주었다. 그리고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친히 덮어주는 친절을 보였다.

그대로 나가려는 그를 다급히 붙잡았다.

“그냥 가려고요?”

“네. 이제…… 가야죠. 당신이…… 제가 여기에 있는 걸 불편해하는…….”

“안 불편해요!”

그가 불편하다기보다는 이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면 정이 떨어질까 불안해서 그랬을 뿐이었다.

나를 사랑한다는 체스터가 내 이런 모습을 보고 싫다는 말이 나올까 무서워서 오지 말라 했던 거였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런 나를 보고도 상관없이 사랑한다고 했다.

“옆에 있어 줘요.”

“…….”

“아…… 체스터는 바쁜 사람인데…… 제가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았네요. 돌아가도…… 돼요.”

그의 옷소매를 붙잡은 손에서 힘을 풀어 그를 놓아주었다.

“율리아.”

“…….”

“제가 여기에 있기를 원하십니까.”

“체스터는 바쁘잖아요.”

“대답해 주세요. 제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까.”

그러길 원했다. 체스터가 옆에 있어 주길 원했다.

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바쁜 체스터를 잡아둘 수는 없잖아. 아침부터 서류를 들여다보던 사람인데 어떻게 붙잡을 수 있겠어.

그렇다고 돌아가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체스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율리아.”

그런데 왜 갑자기 내 위로 그림자가 지는 거지?

분명 체스터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데 왜 내 눈앞에 그의 손이 보이는 걸까.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 눈을 보고 얘기해요.”

“…….”

“피하지 마요.”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마주했다.

콩닥거리며 뛰는 심장이 아까처럼 통제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불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렘이라는 이름의 떨림이었다.

“율리아. 이제 말해봐요. 제게 가지 말고 당신의 옆에 있어 달라고.”

“……그렇게 말해도 돼요?”

“네. 당신이 원한다면 하루 종일 당신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습니다. 저는 그거면 충분합니다.”

“…….”

“말해요. 당신이 말만 하면 됩니다. 제게 오늘 당신의 옆에 있어 달라고.”

“……옆에.”

입술이 달싹이기만 하고 원하는 말은 쉬이 터져 나오질 않았다.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고 그대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는 쉽게 내게 끌려와 주었다.

“옆에…… 있어 줘요, 체스터.”

“네. 옆에 있겠습니다.”

“혼자 두지 마요. 옆에 있어 줘야 해요!”

“네. 당신이 싫다 해도 옆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체스터의 목을 꽉 끌어안고 있던 손이 그에 의해 풀어졌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더니 내 옆에 앉았다.

“쉬어요. 약에 수면제 성분이 섞여 있다고 했으니 졸릴 거예요.”

“옆에 있어 준다면서요.”

“네. 당신이 자고 일어나도 저는 떠나지 않고 이 자리에, 당신의 옆에 있을 겁니다.”

“……가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게 있어 우선순위는 당신이니까요, 율리아.”

그는 한 손으로 내 눈을 덮었다. 피부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스한 체온이 내가 살아 있음을 인지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받는 게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며 안심하게 만들었다.

조건이 없고 아무런 이유도 없는 체스터가 주는 사랑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고 싶지 않은 온몸이 녹아버릴 정도로 달달했다. 이 달콤함이 영원하길 바랐다.

“좋은 꿈 꿔요, 율리아.”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는 감촉을 마지막으로 서서히 정신이 잠식되어갔다.

* * *

율리아에게서 안정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체스터는 이불을 다시 덮어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서는 율리아의 유모를 찾아갔다. 유모는 체스터를 보자 인사를 하려 했다.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

“인사는 됐습니다.”

“네.”

“이제 설명해주시죠. 왜 황녀 전하께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지.”

“……죄송하지만 그걸 발설할 수 있는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그럼!”

체스터는 화를 내려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럼…… 황제 폐하와 관련 있는 일입니까.”

“네. 황녀님께서 직접 말하거나, 폐하께 직접 듣는 것 외에는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황녀 전하께서는 자주 저럽니까?”

“아니요. 거의 몇 년 만입니다. 몇 년 동안 괜찮으셔서 안심해서…… 약도 급히 제조한 겁니다.”

체스터는 화가 치솟는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황녀 전하께서 제게 옆에 있어 달라 하더군요.”

“네……. 황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셨다면 오늘 지낼 방을 준비해두겠습니다.”

“근데 왜 저를 부른 겁니까. 황녀 전하의 절친인 클로이 후작 영애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 상태의 황녀님께는…… 우정이 아니라 애정이 필요하다 판단되어 공작 각하를 불렀습니다.”

“애정이라면 황태자 전하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보니 아주 아끼던 모습이던데. 친해 보이고.”

“지금 같은 상태에서는…… 오히려 독입니다. 공작 각하를 만난 이후에 황녀님께서는 편히 웃으셨답니다.”

그 말에 놀란 듯 체스터의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황후 폐하가 돌아가신 이후로 마음 편히 지내시는 걸 본 적이 없지요. 황녀님께서 진심으로 편히 그리고 무척 환하게 웃는 모습은 오래간만이었습니다.”

“…….”

“지금 황녀님께는 공작 각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오늘 급히 부른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황녀 전하의 과거를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겁니까.”

“……네. 죄송합니다. 황녀님 외에는 그때의 일을 발설하는 건 황명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더는 들을 말이 없는 것처럼 체스터는 율리아의 유모에게서 등을 돌리고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율리아가 잠들어 있던 그 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의자 하나를 끌어 침대 옆에 두고 그곳에 앉아 고른 숨소리를 내뱉는 율리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율리아. 분명 당신에 대한 보고서에는 금지옥엽으로 자란 귀하디귀하게 사랑받았던 하나뿐인 황녀님으로 기록되었는데.”

체스터는 팔을 뻗어 잡티 하나 없이 맑고 투명한 율리아의 뺨에 조심스레 자신의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율리아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혼잣말을 속삭였다.

“이제 보니…… 황성이라는 커다란 새장 속에 당신의 가족들이 당신을 가둬둔 거군요.”

그는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율리아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거두고는 자신의 입가에 가져갔다. 마치 자신의 입을 가리는 듯 보였다.

안쓰러운 눈빛을 띠고 있던 그의 눈매는 이내 곱게 휘어졌다.

손으로 가려진 그의 입술은 짙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어차피 새장 속에서 자라왔으니, 이제 그 새장을 옮길 차례가 되었네요. 다행입니다.”

눈을 감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토해내며 체스터는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다시 뜬 눈에서는 아까의 안쓰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광기로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만이 남아 있었다.

다정함도, 상냥함도 존재하지 않는 선명한 광기 어린 눈빛.

“당신을 제가 만들어 놓은 아늑한 새장 속에 가두고 싶습니다. 당신의 자유로움도…… 제 통제 아래에 만끽하면 좋을 텐데.”

체스터는 침대에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한 줌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손에 쥐고 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도, 조만간 제가 당신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을 테니…… 기쁘고 안심됩니다.”

머리카락에 입술이 닿았지만 율리아의 체향을 만끽하려는 듯 코를 머리카락에 파묻고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광기는 억눌러진 상태였다. 그리고는 쥐고 있던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놓아주었다.

광기 대신 그는 짙은 소유욕이 들끓는 눈빛으로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율리아를 빤히 응시하며 혀로 마른 아랫입술을 핥았다.

“제가 만든 안전하고 아름다운 새장 속에서 깨끗한 것들만 보고 살아줘요, 율리아.”

욕망에 젖은 핏빛 눈동자에는 세상모르게 깊이 잠든 사랑스러운 연인이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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