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으윽!”
머리가 지끈대고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하면서 그때의 간절했던 그 감정과 내가 내뱉은 말이 되새겨졌다.
* * *
“오빠…… 오빠는 나 도와줄 수 있잖아…….”
파들거리는 팔로 오빠의 바짓단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힘겹게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게 돌아온 건 동정과 연민 그리고 그것들과 뒤섞인 깊은 증오의 눈빛이었다.
차라리 오빠가 나를 연민과 동정의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내 손을 잡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오빠는 끝이 보이지 않는 증오로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서늘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도와……달라고 해서 미안해…….”
간신히 쥐어 짜낸 용기는 무참히 짓밟혔다.
내게 있어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를 증오하고 있었다.
오빠의 바짓단을 잡고 있던 손에서는 힘이 빠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오빠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어요.”
전생의 가족들이 너무나도 그리운 순간이었다. 전생은 정말 행복과 넘치는 사랑만이 가득했다.
이미 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에 이런 차가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도 없어……. 혼자는 싫은데…….”
정말 내 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고통이었다.
그나마 나를 살게 해주는 유일한 사람은 유모였다. 이런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유일하게 나를 걱정해주는 존재.
하지만 유모는 그게 한계였다. 지금 내가 처한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랬기에 황태자인 오빠에게 살려달라고 외쳤던 거였다.
이대로는 너무나도 위태로운 내가 버티지 못해 죽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으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외쳤던 살려달라는 간절한 애원은 차게 외면당했다.
“나…… 어떻게 해야 해……?”
이제는 내게 희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연 내가 여기서 더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 * *
“허억, 헉……!”
이제야 제대로 숨이 쉬어졌다. 엉망이었던 호흡은 다행히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두 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통제력을 잃고 새어 나오며 바닥에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니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황녀님!”
“……유모.”
“바닥은 더러우니 어서 일어나세요.”
유모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주었다.
그런 유모의 품에 안겼다. 사람의 온기를 느끼고 싶어서. 내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서.
유모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나…… 나 아빠한테 너무 못된 말을 내뱉었어.”
“괜찮아요, 황녀님. 전부 괜찮아요.”
유모는 괜찮다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황녀님.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응…….”
“일단 진정하세요. 이제는 이렇게 떨지 않아도 되잖아요.”
유모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겉에 입고 있는 더러워진 드레스를 벗었다.
슈미즈만을 입고 방 안에 놓인 의자에 앉자 유모는 내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잠깐 기다렸을까. 유모는 담요와 함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컵과 다과를 가지고 들어왔다.
내가 앉은 의자 앞에 놓인 탁자에 그것들을 내려놓고 담요를 내 어깨에 둘러주었다.
“……황녀님. 원하신다면 지크베르트 공작저로 갈 준비를 해두겠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유모가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이런 모습을 체스터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체스터한테는…… 이런 모습 보여주고 싶지 않아.”
“네. 황녀님 옆에는 제가 있으니까…… 맘껏 우셔도 된답니다.”
내 주변에서는 유모만이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역사서에 절대로 기록되지 않을 극소수만이 아는 황성의 수치와도 같은 추악한 진실.
몸은 경련을 일으켰다. 나는 분명 가만히 있으려고 하는데 내 두 손은 덜덜 떨고 있었다.
애처롭게 떠는 내 손을 유모는 꽉 잡아주었다.
“괜찮아요. 그때 지냈던 궁은 이제 폐쇄됐잖아요.”
“응…….”
“떠올리지 마세요. 괜히 떠올리면 힘들잖아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 궁을 하사받으면서 그때 썼던 궁은 버렸잖아요. 그러니 그때를그때 일은 잊으세요.”
“…….”
“이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는 황녀님을 무척 사랑하잖아요. 그때는 다들 충격을 받아서…….”
“유모.”
“네. 황녀님.”
“나도 알아. 나 때문이라는 거. 아빠랑 오빠가 그렇게 행동했던 게 다 나 때문이잖아!”
“황녀님!”
유모는 나를 있는 힘껏 꽉 껴안아 주었다. 예나 지금이나 유모의 품은 여전히 따뜻했다.
“그건 황녀님 잘못이 아니에요. 늘 말했지만 황녀님은 아무 잘못 없어요.”
“……나 때문은 맞잖아. 내가 없었으면 엄마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았잖아.”
“황녀님. 약을…… 지어오라 이를까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냥 약을 먹는 게 싫었다.
꼭 후유증에 시달리던 때로 돌아가는 것만 같아서.
“그럼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를 부를까요?”
“부르지 마!”
나를 사랑해주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남자한테 이런 약하디약한 모습을 내비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내가 나를 통제할 수 없을 때 체스터를 볼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이성의 통제력이 먹히지 않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체스터에게 못된 말을 내뱉는다면 더는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
“절대로…… 부르면 안 돼.”
“……황녀님.”
“혼자…… 혼자 있고 싶어. 그냥 혼자 있으면 괜찮아질 테니까…….”
“……네, 황녀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꼭 부르세요.”
유모가 나가고 방 안에는 이제 나 혼자였다.
소파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로 향했다. 베개를 꽉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파묻었다.
방 안이 고요하기에 초조하게 팔딱대며 날뛰는 심장 박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빠…… 아빠가…… 그런 황명을 내렸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죠? 제발 아니라고 해주면 안 돼요?’
환청이 들렸다. 귀를 틀어막아도 내가 외쳤던 말들이 쏟아졌다.
이건 바깥에서 들리는 환청이 아닌 머릿속에서 맴도는 소리였다.
요즘 들어서 왜 이러는 건지. 내가 원작대로 행동하지 않아서 이런 식으로 나를 압박하기라도 하는 거야?
어서 나보고 원작대로 행동하라는 의미야?
“하…… 하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미친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와 정신까지 잡아먹었다.
심장에서 욱신거리며 통증이 일렁였다.
아직도 떨림이 멈추지 않은 손으로 심장 부근을 꽉 쥐었다. 이렇게 쥐어도 심장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 잡지 않으면 너무 아파서 버틸 수가 없었다.
어디서 비롯된 아픔일까. 원작의 율리아도 지금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을까.
아니면 원작의 율리아가 아니라서, 혹은 원작을 다 알면서도 원작의 흐름을 바꾸었기에 내려진 형벌인 걸까.
심장에서 느껴지던 고통은 폐로 전이 되어 숨통을 조이는 착각이 들었다.
“으으…… 아프기 싫어…….”
통증에 의해 몸이 무너지며 침대에 널브러져 바르작거렸다.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들어오라는 말도, 들어오지 말라는 말도, 무슨 일이냐는 말조차 내뱉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근데 왜 문이 열리는 거지? 여기에서는 황제나 황태자가 아닌 이상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문을 열지 못하는데.
“율리아!”
……체스터? 왜 그가 보이는 거지?
내가 지금 정신이 불안정해서 환영까지 보이는 걸까.
눈도 깜빡거리며 그의 존재가 환영인지 실체인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그는 사라지지 않았다.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는 눈으로 그를 보려고 노력했다.
점점 더 그가 가까워지는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율리아……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당신이…… 지금 무척 아파하고 있다고.”
“누가…… 누가 체스터를 불렀어요?”
손을 뻗어 그를 건드리자 환영이 아닌 실체라는 게 실감 났다.
가까이에서 보이는 체스터의 표정은 처음 봤다.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이었다.
당황, 자책, 슬픔, 동정, 애정.
이 외에도 좀 더 복잡한 감정들이 섞여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 쉽게 읽히는 감정은 이 정도였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든 감정은 반가움이 아닌 꺼림칙함이었다.
분명 나는 체스터를 부르지 말라고 말했는데 왜 그가 여기에 있는 건지.
“율리아.”
“가까이…… 가까이 오지 마요.”
이렇게 불안정한 모습을 체스터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 이제는 괜찮다고 자만했던 걸까. 아니면 오랫동안 문제가 없었기에 안심해서 그런 걸까.
십 년간 괜찮았기에 나는 내가 괜찮은 줄 알았다.
그저 과거라고 치부하고, 그 과거를 나만 잊고, 언급하지 않으면 사랑받는 황녀로 살아갈 수 있었기에 괜찮은 척을 했던 걸까.
아니면 내가 가출했을 때 만났던 그 애의 존재가 내게 삶의 이유가 되어주었기에 버텼던 걸까.
다시 그때의 기억이 덮치니 그 악몽과 비슷하게 나를 뒤흔들었다.
“약…… 먹어요.”
약이라는 단어에 몸이 흠칫 떨렸다.
그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유모는 체스터에게 어디까지 알려준 거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게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체스터…… 나한테 오지 마요…….”
오지 말라는 내 말을 그는 무시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는 게 들렸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런 상태로 그의 눈을 마주칠 자신이 없었다.
“율리아. 언제부터…… 이랬던 겁니까.”
“…….”
“당신이 아파하는 원인이…… 혹시 저와 관련이 있습니까?”
“체스터랑은 전혀!”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질렀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언성이 높아지지 않도록 평정심을 되찾고 잔잔하게 말을 내뱉었다.
“체스터랑은 전혀 관련이 없어요.”
“네. 저와 관련 없다면 약을 먹어요. 당신의 유모가 그러더군요. 당신이 아프지 않으려면 약을 먹어야 한다고.”
그는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내 손을 낚아채 갔다.
순간 체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무척이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율리아, 저는…… 당신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한 손으로 내 턱을 아프지 않게 붙잡고는 알약 하나를 내 입에 쏙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