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오빠는 내가 나서지 못하게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오빠는 가만히 있던 체스터한테 헛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공을 율리아의 연인으로 인정했을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라는 거 명심…….”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전에는 오빠도 내가 좋다면 된다고…… 읍읍!”
오빠의 말에 반박하려고 했지만 오빠의 손이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말할 기회를 잃었다.
입을 틀어막은 오빠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는 좀 가만히 있어!”
“읍읍!”
체스터에게 손짓으로 대충 눈치를 줬다. 어서 돌아가라고.
근데 생각보다 체스터는 눈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오빠의 어그로를 끌 때 어서 도망쳐야지 왜 멀뚱히 나를 보고만 있는 거야!
“황태자 전하께서 무엇을 걱정하셨는지 압니다.”
“하? 공이 내가 무슨 걱정을 했었는지 안다고?”
아니…… 오빠! 그거 아니야. 진정해. 체스터는 건드는 거 아니야.
한낱 엑스트라가 흑막한테 대드는 거 아니야.
물론 아직은 체스터가 오빠를 죽이지 않았지만 원작에서는 체스터가 오빠를 죽였다고!
“아직 결혼하기 전인데…… 제가 황태자 전하의 유일한 여동생인 황녀 전하를 외박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걸 알면서! 귀하디귀한 내 동생을 외박시켜?”
오빠를 살리고 싶은 마음에 필사적으로 오빠의 허리를 꽉 붙잡고 끌고 가려고 했다.
순간 체스터의 얼굴을 봤는데 그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것과 주먹을 쥐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는 걸 원치 않게 포착했다.
지금 체스터가 우리 오빠를 거슬려 하는 게 분명했다.
오빠! 제발 명을 재촉하지 마!
“체스터, 우리 오빠는 제가 데려갈 테니까 돌아가요.”
“율리아! 말리지 마! 따져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진짜 잠만 자고 왔어.”
“야! 그 말을 나보고 지금 믿으라는 거야? 오빠가 늘 말했잖아. 남자는 다 늑대야! 늑대!”
다행히 오빠가 체스터를 안 봐서 다행이었다.
체스터는 저질렀던 업보들을 떠올렸는지 오빠가 한 말에 찔렸는지 순간적으로 흠칫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으니까.
사실 내 외박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첫 번째 외박은 그의 침실에서 벌어졌던 첫날밤, 정확히 따지자면 이번이 두 번째 외박이었다.
하지만 오빠랑 아빠는 내 외박 사실을 전혀 몰랐으니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침묵해줘야겠지.
무엇보다 체스터의 업보들은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아주 잘 인지하고 있겠지.
아니, 근데 내가 돌아가라고 했는데 왜 한 걸음도 움직이질 않지? 내 말은 말 같지도 않다는 건가.
“오빠. 추해. 들어가자.”
“아니, 율리아!”
“아무 일도 없었다니까.”
“……율리아, 아무 일도 없었다 해도 그건 또 그거대로 문제야.”
그러면 어쩌라는 거지. 떨떠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 예의상 왜냐는 말은 물어봤다.
“왜?”
“으음…… 그게 남자가 하반신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되거든.”
오빠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조금 망설이다가 한순간에 체스터를 고자로 만들어 버렸다.
어차피 말할 생각이었으면 망설이지 말던가!
하지만 오빠가 그런 말을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체스터의 하반신에 문제가 없다는 건 그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아무리 지크베르트 공이어도 황실의 유일한 황녀인 율리아를 결혼 전에 외박시키다니. 교양 없는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나?”
“오빠!”
“우리 율리아가 평생을 얼마나 귀하디귀하게 자랐…….”
“하! 오빠. 내가 평생을…… 귀하디귀하게 자랐다고? 그만해.”
오빠를 말리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헛소리를 내뱉는 것도. 물론 오빠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말리는 게 낫겠지.
체스터의 등을 떠밀어서 그를 마차에 타게 했다.
“율리아?”
“돌아가요. 괜히 바쁜 사람을 붙잡아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바쁘지는 않습니다.”
“조만간 데이트해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체스터는 아쉽다는 듯한 눈빛으로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체스터는 얼굴이 예술작품이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마차 문을 쾅 닫았다. 진짜 그의 얼굴은 시선을 빼앗고 사람을 홀렸다.
바로 등을 돌려 오빠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더는 오빠가 체스터한테 횡포를 부리는 걸 참아줄 생각이 없으니까.
“율리아!”
“나도 이제 성인인데 외박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
“그리고 내가 어디서 외박하는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장소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약혼자랑 있었는데.”
“……율리아.”
“그게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일이야?”
불어오는 바람에 드레스와 함께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오빠도 그랬잖아. 내가 좋으면 됐다고!”
“그래……. 네가 좋다는 걸 말릴 수는 없지. 그래도!”
“…….”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그나마…… 약혼 관계에 있던 남자니까 여기서 그친 거야.”
역시 절대로 첫 번째 외박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되겠다.
“가족이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알았어, 오빠. 이해해 줄게.”
“그리고 결혼도 안 한 동생이 외박한다고 하는데 신경을 안 쓸 리가 없는 게 당연하잖아!”
“어, 알겠어. 그러니 체스터 괴롭히지 마.”
괜히 오빠가 체스터를 잘못 건드려서 죽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떠올리기 싫은 그 악몽 속에 처참하게 죽어 있던 오빠의 시신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착각이 들었으니까.
“아빠는?”
“집무실에 계시지. 아버지도 나오려던 거 내가 말렸어.”
“……그건 잘했네.”
“뭐, 아버지가 지크베르트 공을 좋게 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네가 외박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발걸음은 아빠가 지내는 본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율리아.”
“왜.”
“황성 밖은 위험해. 늘 말하지만 너를 가장 안전하게 보호해 줄 수 있는 곳은 황성이야.”
“알고 있어.”
“그래. 잊지 말고 명심해. 네가 유일하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는 곳은 황성이라는 것을.”
원작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지 않았지만, 원작 속 율리아도 이런 말을 들었겠지.
하지만 황성은 생각보다 안전하지 않았다.
과정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체스터가 쿠데타를 일으켜 황성을 장악할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체스터가 쿠데타를 일으킬 마음이 없다면 안심해도 되긴 하겠지.
“오빠.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응. 그럼 됐어.”
나는 지금의 평온을 지키고 싶었다.
원하던 체스터의 사랑과 소중한 가족들의 안녕. 그것만으로 나는 행복하니까 이제는 편히 웃을 수 있었다.
“…….”
걷다 보니 어느 순간 아빠의 집무실 문 앞이었다. 오빠는 손수 방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아빠가 일하고 있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늘 앉는 소파에 편히 앉았다가 슬쩍 허리를 틀어 아빠가 있는 곳을 향했다.
“아빠.”
“그래. 율리아.”
“오빠 언제 결혼시킬 거예요?”
“…….”
“그래야 저도 결혼하잖아요.”
아빠는 내 말이 마음에 안 드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율리아. 혹시 파혼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편히 말해도 된단다.”
“전혀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결혼하고 싶은 걸요.”
“이 아빠는…… 지크베르트 공작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구나.”
뭐야. 왜 갑자기 평가가 또 바뀐 거야?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안 되지! 어디서 밑장빼기를!
“아빠는 원래 체스터를 마음에 들어 했잖아요!”
“우리 딸을 외박하게 만드는 걸 보면 이 아빠의 입장에서 보기엔 그다지 좋은 남자가…….”
“아빠. 나 체스터랑 결혼할 거야.”
“율리아.”
“내가 한다면 해! 아빠랑 오빠랑 반대한다 해도 나는 체스터랑 결혼할 거야! 그리고 아빠는…….”
여기서 더 말을 내뱉으면 그 말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심장과 아빠의 심장을 후빌 테니까.
그러니 멈춰야 했다. 제멋대로 상처가 될 말들을 내뱉으려는 입을 통제해야만 했다.
“……아빠가 아무리 황제라 해도 내 행동을 통제할 자격이 없다는 거 알잖아.”
아빠의 얼굴은 비수가 되는 말에 의해 죄책감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이번 대 황실의 과거를…… 아니, 우리 가족의 과거를 말하는 거였으니까.
잊었다고 했던 건 나였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무력했던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애정을 갈구했지만 외면당하고, 도와달라고 손을 뻗었지만 모두에게 내쳐지던.
사랑받는 게 무엇인지 알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하는 길이 얼마나 잔혹한지.
그때는 흑막에 의해 죽을 두려움보다 살아 있음이 괴로웠다.
오히려 흑막이든 다른 이든 좋으니 나를 죽여주길 바랐던 다시는 회상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과거.
“미안하다……. 미안하다, 율리아…….”
율리아로 살아간다고 생각했을 때, 율리아로 살지 못했던 순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아빠였으니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고, 실제로도 기억의 저편에 묻어두었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이미 터져 나온 말들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그때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그때의 기억과 함께 감정을 상기시켰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리는 아빠를 뒤로하고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오빠 역시도 나를 붙잡지도, 나를 따라오지도 않았다.
“이제는…… 이제는 괜찮은데.”
황녀의 체통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서 날아간 지 오래였다.
미친 듯이 달렸다. 호흡이 가파르고 숨이 턱 막히고 폐가 찢길 듯 괴로워도 멈추지 않았다.
차라리 육체적인 고통에 그 괴로운 과거를 지워낼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파할 수 있었다.
달리고 또 달리다가 결국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차가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말로 괜찮은데…… 내게 남은 가족은 이제 아빠랑 오빠뿐인데…… 꼭 지켜 내야만 하는 소중한 가족인데…….”
왜 그때만 생각하면 이토록 고통스러운 걸까.
그때의 기억만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우리 가족은 평온할 수 있는데. 왜 그 기억이 머릿속에서 엉망으로 떠오르는 거야!
왜! 대체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