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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46화 (46/141)

#46화

다행히 그 문이 열리기 전에 침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아까 들었던 체스터의 그 서늘하기 짝이 없던 목소리는 애써 누르고 있던 악몽을 되살려냈다.

그렇게나 차가운 목소리로 내게 독설을 내뱉던 그의 모습이 환영처럼 눈에 보여서.

사실 그게 체스터의 진짜 모습이고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게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자상하게 대해주는 거라면?

결혼하고 난 후에 악몽 속의 체스터처럼 굴면 어떡하지?

“율리아.”

하지만 방문을 사이에 두고 들었던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게 내 이름을 속삭이는 그의 음성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온기가 뚝뚝 묻어나는 애정 어린 목소리에 살벌하기 짝이 없던 그 목소리는 녹아내렸다.

그래. 어차피 내 연인인데 나한테만 다정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들한테도 다정한 것보다는 이게 낫지.

차라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겠지.

“저녁이에요?”

“네.”

그와 함께 들어온 하녀들이 옆에 놓여 있던 테이블에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하녀들은 세팅을 끝내자 일사불란하게 전부 방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나와 체스터 단둘만이 남았다.

이제 밥을 먹어야 하니 침대에 흐물흐물하게 늘어진 내 몸을 일으켰다.

체스터가 빼주는 의자에 앉아 포크와 나이프를 손에 쥐고 놓인 음식을 써는 도중이었다.

썰고 있던 음식의 접시를 체스터가 가져갔다.

“……체스터?”

그리고는 음식을 그가 직접 썰기 시작했다.

“미리 썰어서 가져왔어야 했는데……. 전부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어…… 죄송할 필요는 없는데.”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제 탓입니다.”

이런 거 가지고 미안해할 필요는 없는데.

지금의 그는 정말 다정하고 상냥한 연인 그 자체였다. 악몽 속의 체스터처럼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시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니까.

안심해도 될 텐데. 왜 나는 안심하질 못하는 걸까.

“체스터.”

“네.”

“그냥…… 불러보고 싶었어요.”

그는 피식하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한 입에 먹기 좋게 잘린 음식을 내 앞에 다시 놓아주었다.

체스터가 직접 썰어준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쏙 넣었다.

“율리아. 다 먹으면 아이스크림을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진짜요?”

“네. 더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줘요. 그럼 다음에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 아버님 몰래 먹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깜짝 놀랐다. 어제 단호하게 했던 안 된다는 말과 지금 하는 말이 달라서.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음식을 다 먹으면 디저트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체스터.”

디저트를 원 없이 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고 무척이나 충동적인 말이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사랑해요.”

“…….”

그는 갑작스런 내 말에 놀란 표정을 짓고는 마치 온몸이 굳어 버린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체스터의 행동이 의아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음식을 입에 쏙 넣었다.

“율리아.”

“네?”

“아까 했던 말 다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말이요?”

사실 그가 어떤 말을 다시 해달라는 건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은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아니었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전혀 모르겠는데…….”

“사랑한다는 말. 다시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어…… 음…….”

“다시 듣고 싶습니다, 율리아.”

치…… 치사해! 그런 얼굴로 그런 표정을 짓고 그렇게 말을 하면 외면할 수도 거절할 수도 없잖아!

놓인 음식만을 입 안에 넣고 오물오물거리며 삼켰다.

다시 그 말을 하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으니까.

사실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은 그 순간부터 내 마음을 깨달았다.

내가 그의 애정을 바란다는 건 나 역시도 그를 좋아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저 내 마음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건 당장의 내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핑계일 뿐이었다.

“사…….”

“…….”

“사랑해요.”

막상 내뱉자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얼굴에 모든 열이 쏠리는 것처럼 뜨거웠다.

고작 네 글자인데. 사랑이란 단어가 들어가자 입 밖으로 뱉어내는데 생각보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시선을 다시 체스터에게 두는 순간 모든 신경을 그에게 빼앗겼다.

체스터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누가 보아도 기뻐하고 있다는 게 선명한 표정은 지금 처음 봤으니까.

“율리아.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상관없으니 말해요.”

“……허니 브레드도 먹고 싶어요.”

“네. 이제 가져다줄게요. 아이스크림도 같이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내게 미소를 지어주며 방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 방 안에는 나 혼자였다.

마저 접시에 있는 고기를 먹어 치웠다. 그리고 얌전히 아이스크림과 허니 브레드를 기다렸다.

“흐음……. 다 먹었는데.”

왜 체스터는 오지 않는 거지? 아이스크림이랑 허니 브레드 가져다준다면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체스터가 아이스크림과 허니 브레드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 그의 뒤에 하녀 한 명이 따라 들어왔다.

“율리아. 갑자기 일이 생겨서…… 함께 있어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예고도 없이 찾아온 거니까요.”

“필요한 게 있으면 이 하녀한테 말하면 됩니다.”

하녀는 내게 인사를 하고는 테이블에 세팅 되어진 접시들을 전부 치우기 시작했다.

“……네.”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드는 순간 입술에 말캉한 게 닿았다가 떨어지면서 쪽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멀어지는 체스터를 내 손이 멋대로 움직여서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율리아?”

“……한 번 더 해줘요.”

그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는 몸을 내 쪽으로 돌리더니 이번에도 아까와 마찬가지로 짧게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그래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보내줘야겠지.

일이 생겼다고 했으니까.

“체스터.”

“네?”

“일 다 끝나면 와야 해요.”

“알겠습니다, 율리아. 최대한 빨리 오겠습니다.”

그때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녀는 가지고 들어온 향초를 스탠드가 놓인 탁자에 올려두고 불을 붙였다.

체스터는 내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다정한 웃음을 짓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가 바쁜 건 당연한 거니까. 공작가의 주인인데 오히려 매일같이 나를 찾아왔던 게 이상할 정도니까.

꿈속에서도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늘 집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으니까.

“……소설책 좀 가져다줄래?”

“네.”

하녀는 생각보다 빠르게 책 한 권을 가지고 왔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방에 누군가 있다는 느낌에 책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나가 줄래? 혼자 있는 게 편해서.”

“네.”

하녀는 딱히 무슨 말 없이 바로 긍정의 대답과 동시에 방 밖으로 나갔다.

가져다준 책의 내용은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었다. 내가 꿈꿔왔던 그런 지극히 평범한 연애.

지금은 괜찮았다. 하지만 처음에는 정말 당황했고 무서웠다.

평범함을 원했는데 전혀 평범하지 않게 만났고, 남주도 아닌 흑막이었고, 거기에다 나와 내 가족을 죽일 사람이었으니까.

“……왜 이렇게 졸리지.”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원래는 이보다 더 늦은 시간에 잠에 들었다.

정말이지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이 쏟아졌다.

잠들기 전에 체스터 얼굴은 보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기에는 지금 내 몸이 깨어 있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눈이 깜빡깜빡거리며 감겼다.

읽고 있던 책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 * *

어둡고 축축한 방 안, 그리고 차가운 돌바닥에는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인지도 여자인지도 알아보기가 어려운 상태였고 바닥은 붉은 핏물이 흥건했다.

검붉은 피를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날카로운 칼을 쥐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붉은 눈동자는 어둠에서도 맹수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체스터였다.

“본보기가 되었겠지.”

감정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피가 떨어지는 칼을 툭툭 털더니 이내 칼집에 집어넣고는 피바다가 되어 있는 방 안을 두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욕실이 아닌 집무실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피로 엉켜 있는 상태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상태를 개의치 않는 듯 집무실로 들어가 서류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율리아에게 붙여둔 하녀가 들어왔다.

“그녀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해라.”

체스터가 지칭하는 ‘그녀’란 단 한 명이었다.

“마님께서는 현재 잠드셨습니다. 주인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이후에는 책 한 권을 가져다 달라 하여 소설책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한 행동은 하시지 않고 책을 읽다가 잠드셨습니다.”

“저녁을 먹기 전에는 어떠했지?”

“목욕 시중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손이 닿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반응을 보이셨습니다.”

하녀는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체스터의 표정은 의미심장했다. 마치 어떤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그는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편지가 몇 개 있었다.

고민을 하는 듯 보였지만 이내 서랍 문을 닫고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율리아가 있는 침실로 향했지만 자신의 꼴이 그다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욕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체스터는 피범벅이 된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와 검은 바지와 셔츠만을 입은 채 율리아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한 일은 율리아의 옆에 놓인 향초에 붙은 불을 꺼뜨리는 행동이었다.

“율리아.”

체스터는 새근거리며 잠든 그녀의 옆에 앉아서는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천천히 고개를 숙여 색색 대는 숨소리를 내뱉는 율리아의 입술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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