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그렇습니까.”
“체스터…….”
꿈을 꾼 이후로, 체스터에 대한 불신과 함께 사랑받고 싶다는 충동이 일렁였다.
하지만 이제 내가 그의 사랑을 원한다고 인정을 하자 그의 입에서 나를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줘요.”
“사랑합니다, 율리아.”
그의 사랑한다는 말이 이렇게 달콤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이제는 인정해야겠지. 내 마음을 나조차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체스터의 마음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나의 진심이었다.
“……변하지 마요.”
“네. 변치 않을 겁니다.”
“절대로 변하면 안 돼요!”
“네. 절대로 변하지 않을 테니, 너무 떨지 마세요. 불안해하지도 말고요.”
그는 나를 더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두 눈을 감은 채 그의 온기를 느끼는 중 뺨에 말캉하고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떨어졌다.
깜짝 놀라서 감고 있던 눈을 뜬 채 몸을 비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명백히 그가 한 짓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착각이 드는 거지?
“흐읍!”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그는 내 입 안으로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무리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다지만 여기는 공작저 내부이기 때문에 사용인들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체스터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손으로 그를 밀자 그는 순순히 밀려났다.
“율리아?”
“……여기는 보는 눈이 있어서 싫어요.”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죠.”
체스터는 나른하게 웃으며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내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율리아. 먼저 찾아와주셔서 기쁩니다.”
“……어제 못되게 말해서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오늘 당신이 먼저 찾아와 주신 걸로도 충분히 기쁩니다.”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파묻었다.
“제가 오지 말라고, 보고 싶지 않다고…… 절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말했지만…… 진짜 안 찾아오면 어떡해요.”
“율리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잘못했다고 하지 마요. 그 말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해줘요.”
“사랑합니다.”
귓가에 나직한 음성으로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는 나를 안심하게 만들었다.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실체가 있는 체스터는 그 꿈속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분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내 등을 토닥이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오늘 자고 갈래요.”
“네?”
“안 돼요? 원래 데리고 다니던 사람들 전부 황성으로 돌려보냈는데…… 안 된다면 돌아가야죠.”
“안 된다기보다는…….”
“자고 가도 돼요? 역시…… 안 되나요.”
그는 대답 대신 갑자기 나를 안아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체스터를 올려다보았지만 그가 나를 들어 올리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막상 다리가 공중에 떠 있자 뭔가 어색했다.
“율리아. 여기에서는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됩니다.”
“……진짜요?”
“네.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그럼 자고 갈래요.”
“네. 방은…….”
“같이 자요.”
내 말에 체스터는 아무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음…… 특별한 의미가 담긴 건 아니고,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요.”
“저는 좀 특별한 의미가 담기면 좋겠는데…… 아직도 그 제약은 유효한 거겠죠?”
“네. 유효해요. 근데 일단 내려줘요!”
“흐음…….”
그는 나를 내려주기는커녕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스터의 키가 큰 탓인지 아니면 갑작스럽게 시야가 바뀌어서 그런 건지 높다는 느낌이 들자 무서웠다.
그가 단단히 붙잡고 있으니 떨어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내 손은 본능적으로 그의 어깨 쪽 셔츠를 부여잡았다.
“체스터! 내려줘요!”
“싫어요.”
“너무 높아서 무섭단 말이에요!”
“안 떨어져요.”
“무겁잖아요!”
“하나도 안 무겁습니다. 깃털보다 가벼운 걸요.”
“남들이 보면 어떡해요!”
“보면 어떠한가요. 당신은 머지않아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텐데요.”
그는 나를 전혀 내려줄 생각이 없는지 사람이 있어도 상관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여기서 다리를 움직이면 내가 더 위험할 게 분명해서 그의 어깨를 안전대마냥 꽉 붙잡았다.
체스터는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듯 방문을 열었다.
“어…… 여기는?”
“걱정 마세요. 당신이 허락하지 않는 이상은 선을 넘지 않을 테니까요.”
그는 나를 침대에 앉혔다. 이 침대는 체스터와 처음으로 밤을 보낸 곳이었다.
내게 안심하라는 뜻으로 저렇게 말을 했지만 긴장으로 경직된 몸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저녁은 방으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네. 근데……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이 너무 예뻐서요.”
그 말과 동시에 체스터는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얼마나 더 인내해야 하는지.”
“네?”
“이렇게 사랑스러운 당신을 두고 인내해야 한다는 게 정말 힘듭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예전 같았더라면 밀어내고 거부했을 텐데, 이제는 내게 닿는 그의 모든 신체 부위에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체스터.”
다만 그뿐이었다.
“키스 이상은 안 돼요.”
“압니다. 열심히…… 참고 있습니다.”
체스터는 내 목덜미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내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애정이 뚝뚝 묻어남과 동시에 짙은 열망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니 결혼하고 난 후에는 기대하세요, 율리아.”
“으음…….”
“그때는 당신의 말을 절대로 안 들어줄 거니까.”
“역시…… 결혼은 최대한 늦추는 게 좋겠어요.”
“……율리아. 저를…… 말려 죽이실 셈입니까?”
“그래도 키스까지는 허락해 줬잖아요.”
“부족합니다.”
그는 내 뺨을 쓰다듬던 손을 움직여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꾹 짓눌렀다.
“1초라도 당신과 오래 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결혼…… 빨리하고 싶어요?”
“네. 어서 빨리 당신과 한 침대에서 생활하고 싶습니다, 율리아.”
“그럼 오늘 같이 자요.”
그는 멍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가 왜 그런 눈을 하고 있는지 몰랐지만 이내 방금 한 말이 떠올랐다.
내가 뱉은 말이 되게 이중적인 의미를 가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순수하게 잠만 같이 자자고요.”
“아…….”
“저녁 먹기 전에 씻을래요.”
“……네. 바로 씻을 수 있도록 준비해 놓겠습니다.”
그는 이내 애정이 뚝뚝 묻어나는 눈빛을 띄우고는 커다란 강아지처럼 내 품을 파고들었다.
나보다 덩치도 더 크면서.
“율리아, 사랑해요. 조금만 기다려요. 준비되는 대로 하녀가 올 겁니다.”
“네.”
“편히 쉬어요.”
그는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방 밖으로 나갔다.
체스터가 없는 지금 두 팔과 다리를 쭉 뻗고 침대에 편히 몸을 뉘고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그가 매일 잠드는 곳이라서 그런지 침대에는 그의 체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체스터.”
과연 내 마음은 어떤 걸까.
그저 나는 그의 애정만을 바라는 건지. 아니면 나도 그와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가 내 마음을 잘 모른다니. 참 우스웠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황급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상과 다르지 않게 하녀가 목욕 준비가 끝났다며 나를 그곳으로 안내했다.
그런데 그들의 손이 내 몸에 닿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르며 그들의 손을 쳐냈다.
“건드리지 마!”
아마도 그들은 내가 목욕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그런 모양이었지만 그날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아 저편에 버려두었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녀들의 놀란 표정을 보고서야 그 끔찍한 기억이 되살아나기 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도움은 필요 없어. 옷도 충분히 혼자 입을 수 있으니, 옷만 두고 전부 나가.”
“네.”
모두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드레스를 벗고 욕조 안에 몸을 담갔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몸을 녹였다.
트라우마로 인해 시중을 받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이 생겼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지만 오로지 그 어린 남자애에 대한 기억 때문에 온전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날 이후로는 목욕 시중을 받더라도 유모 외의 사람에겐 받지 못하게 됐다.
그래도 한 명이면 괜찮지만 두 명 이상인 경우에는 발작이 일어나듯 이성을 잃고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옛날보다는 나아진 편이었지만 오늘로 완전히 나은 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이제 벗어날 때도 됐잖아.”
일단 욕조에서 일어났다. 옆에 정갈하게 개어진 수건으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털었다.
그리고는 몸의 물기를 닦고 난 후 수건을 몸에 둘둘 말았다.
문을 살짝 열자 앞에 잠옷이 놓여 있었다.
체스터가 평범한 약혼자였다면 이런 잠옷 차림은 곤란했겠지만 어차피 그와는 끝까지 갔으니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는 내 맨살을 몇 번이고 봤던 사람이니까.
앞에 놓인 숄까지 두르고 복도로 나왔다.
“…….”
복도는 조용했다. 하지만 미약하게나마 한 방향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씻었으니 다음은 저녁을 먹을 예정이라 바로 침실로 가는 게 당연하지만 그냥 호기심이 들었다.
소리가 나는 방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이내 방문에 무언가가 부딪힌 듯 방문이 흔들렸다.
방문을 열려던 손이 저절로 멈칫했다.
“그딴 말을 한 번만 더 지껄이면 숨만 쉬게 해주지.”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지만 꿈속에서 들었던 체스터의 목소리처럼 서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그런 그를 기억하는 듯 몸은 흠칫하며 떨렸다.
심장이 마구 쿵쿵거리며 통제력을 잃고 초조하게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숨을 참고 방문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그따위 생각을 한 버러지들한테 똑똑히 전해. 그딴 발언을 한 번만 더 하면 전부 죽여 버리겠다고.”
“하지만 각하!”
“네 놈의 혀를 뽑아버리기 전에 그 입 닥치는 게 좋을 거다.”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문이 열리기 전에 내가 이 복도에 있는 사실조차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다행히 경직되었던 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움직일 수 있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침실로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