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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44화 (44/141)

#44화

“네 눈에는 체스터가 날 사랑하는 게 진심으로 보여?”

“응.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대단한 연기력이겠지? 그리고 진심이 아니라면 그런 눈빛인 것도 이상하고.”

“……그렇겠지?”

확실히 달콤한 음식이 배 속으로 들어가자 심신이 안정되어 갔다.

“그냥 네 마음만 정하면 돼.”

“…….”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를 좋아해?”

“모르겠어.”

“그럼 싫어해?”

“아니! 싫어하는 건 절대 아니야!”

“그럼 됐네. 싫어하지 않으면 된 거 아니야? 어차피 결혼까지…… 진행할 생각이잖아.”

세실의 말이 맞았다. 내 마음이 어떠하든 결혼을 파투낼 생각은 없으니까.

“싫지 않으면 된 거지.”

“그렇겠지? 그럼…… 오늘 내가 먼저 찾아가는 게 맞겠지?”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

“……가봐야겠어.”

“응. 잘 생각했어, 율리아.”

핫초코를 전부 입 안에 털어 마셨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은 후에 방 문고리를 잡았다.

“세실…… 고마워.”

“뭘.”

“그럼 갈게! 어서…… 네가 황가의 일원이 되면 좋겠어.”

“후기도 꼭 알려주고!”

“응!”

세실을 뒤로하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황성으로 갈까요?”

“아니, 지크베르트 공작저로. 언질하지 말고 그냥 가.”

“네.”

클로이 후작저와 지크베르트 공작저는 그리 멀지 않았기에 금방 도착했다.

“유모. 돌아가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먼저 돌아가.”

“황녀님, 하지만…….”

“약혼자의 집인데 별일이 있겠어. 그리고 돌아갈 때는 지크베르트 공작가 마차를 타고 귀환할 테니까 걱정 말고 돌아가.”

“황녀님.”

“유모. 돌아가. 그리고 아빠한테 전해줘. 너무 늦게 돌아오지 않으면 여기서 자고 가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혈기왕성할 나이시긴 하죠.”

“그런 거 아니야!”

“알죠. 그럼 돌아가도록 하죠.”

알아서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몸을 돌렸다. 마침 대문이 열리면서 집사장이 나와 있었다.

“언질을 미리 받지 못해서…….”

“괜찮아요. 체스터는 어디에 있나요?”

“연무장에 계십니다. 응접실에 계시면 제가…….”

“아니요.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안내해줘요.”

“네. 마님.”

아직은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내 마음 때문인지 그리 거슬리게 들리는 호칭은 아니었다.

예전이라면 진절머리를 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집사장을 따라가자 자연스럽게 시선은 정원으로 쏠렸다.

그때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리시안셔스로 정원이 가득 차 있을 거라 했던 체스터는 그 말을 지켰다.

정말 사방이 리시안셔스로 가득했으니까.

“허허…… 늙은이의 주책으로 들리겠지만, 주인님께서는 마님을 무척 사랑하고 계십니다.”

세실도, 집사장도 전부 체스터가 나를 사랑하는 게 분명하다고 말하니 확신해도 되겠지.

하지만 미약한 의심이 틈을 비집고 파고든 건 이드리안의 발언이었다.

세 명 중 두 명이 같은 주장을 펼친다면 다수의 뜻을 믿는 게 옳은 선택이지 않을까.

“마님께서는…… 주인님을 선대 주인님과 마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웃게 만든 분이십니다.”

“…….”

“주인님께는 마님이 꼭 필요하십니다.”

“제가…… 필요하다고요?”

“허허, 이 늙은이가 너무 말이 많았지요? 이제 도착했습니다.”

집사장의 도착했다는 말에 정신을 차리자 눈앞에 체스터가 보였다.

그의 머리카락은 평소 만났을 때와는 현저히 달랐다. 보통은 한쪽을 까고 있는데 지금은 전혀 세팅이 안 된 상태였다.

마치 그와의 기억나지 않는 원나잇을 한 다음 날 아침의 모습. 딱 그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의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섹시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분명 체스터는 위아래를 다 갖춰 입고 있는데 땀에 젖어서 그런 건지 되게 야해 보였다.

어떻게 사람이 미치도록 섹시하게 잘생길 수가 있는 거지.

그의 얼굴과 몸에 감탄을 하고 있던 찰나 그의 주변에 쓰러져 있는 기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모르지만 주인님께서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지셨는지 기사들과 대련이라는 명목하에 일방적인 화풀이를 하셨습니다.”

“아…….”

“물론 그로도 모자랐는지 나무도 박살을 내셨지만요.”

그제야 옆에 동강이 나 있는 나무도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서 드는 의문. 내가 과연 이런 괴물 같은 체스터를 감당할 수 있을까.

“주인님!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아니, 집사장! 갑자기 그렇게 내 존재를 알리면 어떡해!

그 순간 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율리아?”

“네.”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씻고…… 옷을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네.”

“안에서 편하게 기다리고 있어요, 율리아.”

체스터는 나를 보며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내게 웃어주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잘생긴 얼굴로 웃음을 지어 그런 건지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응접실로…… 아니, 내 침실로 안내해.”

“네. 주인님.”

아니, 왜 침실이야!

뭐라고 반박하기도 전에 그는 들어갔다. 침실이든 어디든 가는 것보다는 사실 아까 지나왔던 정원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침실 말고…… 정원을 구경하고 싶은데 될까요?”

“그럼요. 마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시면 됩니다.”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정말 다음에 오면 정원을 리시안셔스만으로 전부 채워주겠다던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원래 있던 커다란 나무들만을 제외하면 그때 꽃이 한가득 있던 곳은 전부 리시안셔스로 가득했으니까.

“……정말로 리시안셔스만으로 채웠네요.”

“예. 마님을 향한 주인님의 마음이 반영된 것이지요.”

“…….”

그래. 이 정도로 말을 할 정도라면 체스터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게 맞겠지.

근데 왜 믿기로 했고, 모두가 증언을 해주는데 무엇인가 되게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걸까.

아니면 악몽이 영향이 미치는 건지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불안했다.

아까의 표정만 보아도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는데.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마음도, 내 눈도 신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원래 주인님께서는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으시겠다고 했습니다.”

“……정말요?”

나한테는 그렇게 결혼에 대해 집착했던 남자인데?

“네. 마님을 만난 이후부터는 변하셨습니다.”

“의외네요.”

가만 생각해 보면 원작 속 체스터는 여주에게 결혼하자고 집착한 적은 없었다.

그저 말 그대로 집착만 했을 뿐.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처럼 굴었다.

그는 여주에게 결혼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체스터는 내게 결혼에 대해 집착했다. 도대체 왜?

원작 속 그의 모습과 지금의 그의 모습은 상당히 대조되었다.

고작 나와 잤다는 사실 하나가 그렇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하기에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았다.

무엇이 진실이지? 결혼에 집착했던 체스터가 진짜인지, 아니면 그저 여주에게 집착했던 원작 속 체스터가 진짜 본성인지.

헷갈렸다. 원작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현재를 믿어야 할지.

“체스터는 결혼할 생각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십니다. 오로지 마님을 만난 이후부터, 마님과의 결혼을 원하셨습니다.”

“…….”

“그리고 주인님이 그렇게 웃는 모습도, 어렸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은, 흑막의 부모님이 전부 살아 있었던 때를 말하는 거겠지.

만약, 흑막의 부모님이 살아 있었더라면 체스터는 흑막이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제가 전부 알려드리지는 못하지만…… 주인님께서도 그리 좋은 어린 시절을 보내진 못했습니다.”

“…….”

“제대로 된 애정도 받지 못했고, 받기도 전에 두 분이 빠르게 떠나셨습니다. 그렇기에 많이 서툴 수 있습니다.”

짐승처럼 구는 남자가 서툴다고?

“감정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많이 서투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마님을 향한 감정은 진심입니다.”

“…….”

“그저 이 늙은이는 마님께서 꼭 주인님의 옆에 있어 주시는 것 말고는 바라는 게 없습니다!”

“……이미 약혼한 사이고,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멀어지고 싶어도 멀어질 수는 없겠죠.”

이제 돌이킬 수도 없는걸. 후회하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렸으니까.

정원을 좀 더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그만큼 정원을 정성스럽고 예쁘게 꾸며놓아서.

오직 리시안셔스만을 사용했지만 질리지 않도록 잘 꾸며놓았다.

“율리아,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뇨. 정원이 예뻐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체스터가 나타나자 집사장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마음에 듭니까?”

“네. 마음에 들어요.”

그는 내 등 뒤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체스터는 나를 껴안아 품에 가두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몸이 점점 더 밀착되었다.

이런 남자가 서툴다고? 아주 선수가 따로 없는데?

닿아 있는 그의 몸에서는 시원한 비누 향이 났다. 그 냄새가 좋았다.

그는 시원하게 드러난 내 목덜미에 입술을 문댔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라기는 했지만 싫은 건 아니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허리를 붙잡은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바로 귀 옆에서 체스터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이 리시안셔스로 가득히 채워달라고 해서, 그리 가꾸었습니다.”

“체스터.”

“네.”

“리시안셔스의 꽃말을 알아요?”

내가 체스터를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이건 확실히 할 수 있었다.

나는 체스터에게 사랑받길 원했다.

본능은 내게 악마처럼 속삭였다. 원작 속의 율리아처럼, 체스터의 모든 것이 나를 향해주길 바랐다.

“무엇인가요.”

꿈의 영향인 건지. 적어도 꿈속의 율리아처럼 현실에서도 아파했던 그 날을 기점으로 원작 속 율리아에게 동화되어 갔다.

그게 꿈이 아니라 기억처럼 느껴진 이후부터 꿈속의 율리아의 감정과 겹쳐졌다.

그의 품에 몸을 기대며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 소리에 집중하고 싶어서.

“변치 않는 사랑이래요.”

그러니까.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그 말이 변치 않으면 좋겠어요, 체스터.

무엇보다도 나는 원작의 율리아처럼 체스터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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