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고개만 살짝 돌리자 햇빛에 반사된 금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블레어 소공작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오랜만이네요.”
“제 제안은 유효하답니다, 황녀 전하.”
허어…… 만나자마자 내뱉는 말이 저런 말이라니.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다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익숙한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블레어 소공작님은 할 일이 없나요?”
“그래 보이시나요?”
“네. 할 일이 없으니까 한가하게 여기에 있는 거 아닌가요.”
“황녀 전하를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었습니다.”
꽤나 로맨틱한 말이었다. 제법 심장을 간지럽힐 말.
“저는 블레어 소공작님을 그다지 보고 싶지 않았는데요.”
“……제가 황녀 전하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해 죄송합니다.”
“됐어요. 소공작님을 탓할 생각은 없었어요.”
여기에 더는 오래 있고 싶지가 않았다.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또렷하게 기억하기 위해 왔지만 이런 방해꾼이 있다면 소용없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를 봤으니 이제 됐나요?”
“황녀 전하. 체스터를……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지금 소공작님은 본인의 행동이 어떻게 비칠지 알고 있나요?”
몸을 돌려 이드리안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살랑거렸다. 우수에 찬 푸른 눈동자는 가히 아련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소공작님은 친구의 약혼녀한테 수작 부리고 있는 거예요.”
“황녀 전하도…… 체스터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고 가라앉았다.
동공이 흔들리고 심장은 초조하게 쿵쿵거리며 불규칙적으로 빠르게 뜀박질을 해댔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결혼하기 전까지는 제게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소공작님.”
예전의 체스터도 그렇고 지금 남주도 그렇고 대체 왜 내게 기회를 달라고 하는 건지.
“그냥 잊으세요. 아니면 포기하세요.”
“황녀 전하께서는 체스터를 온전히 신뢰하십니까.”
“……소공작님. 저와 체스터 사이를 이간질할 생각이라면 소용없는 짓이에요.”
“정말 체스터에게 아무런 목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제 옆자리는 계속 비워두겠습니다. 황녀 전하의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 상관없으니 제게 와주세요.”
“그럴 리 없을 거예요, 소공작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어차피 더는 이곳에 머무를 생각이 없었기에 언덕 밑으로 내려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랬는데 이어지는 이드리안의 말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황녀 전하. 체스터는 사랑이라는 걸 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소공작님.”
“사랑도 받아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거. 황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
“하지만 체스터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한…….”
“소공작님. 소공작님이 어떤 말을 해도 제 말은 변치 않을 거예요.”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오늘 아침에 충동적으로 결정해 이곳에 온 건데 어떻게 이드리안이 알고 나타난 거지?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로웠다.
물론 이곳을 알고 왔다 하더라도 지금은 이른 시간이었다.
“황녀님?”
“이만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럼 둘 중 하나였다.
내 주변에 블레어 공작가의 심복이 있거나 내 기억이 왜곡되어 어렸을 때 만났던 아이가 이드리안이거나.
하지만 금발과 흑발을 착각할 리는 없잖아.
그러니 블레어 공작가의 심복이 내 주변에 있다는 소리였다.
하긴 없는 게 더 이상하겠지. 그냥 알고만 있고 놔두는 게 낫겠지.
찾아내서 쫓아내도 어떻게든 심복을 심을 테니까. 괜히 힘을 뺄 필요는 없고 딱히 내게 해를 끼칠 일은 없겠지.
황녀에게 해를 끼쳐서 득을 볼 건 없을 테니까.
“유모.”
“네. 황녀님.”
“……황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 들르자.”
“그건 안 돼요. 디저트는 하루에 1개로 제한하라는 황명이 있어서요.”
“…….”
마차에는 탔지만 갑자기 황성으로 돌아가기가 무척 싫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체스터의 얼굴을 볼 용기는 없었다.
“클로이 후작저로 갈래.”
“네.”
“유모. 혹시…… 핫초코도 안 돼?”
“……원래는 안 되는 거지만 눈 감아 드릴게요.”
“진짜?”
“네. 대신 폐하께는 비밀이랍니다.”
“고마워, 유모!”
이제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고작 핫초코 하나를 허락받았다고 해서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생각하니 착잡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핫초코 말고도 다른 디저트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무척 기뻤다.
한껏 부푼 마음을 가다듬는 동안 마차는 클로이 후작저에 도착했다.
내가 말을 하자마자 연락을 취해두었던 건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세실이 보였다.
“세실!”
“율리아. 어서 와.”
세실은 환하게 웃음을 짓고 나를 반기며 자연스럽게 저택 안 세실의 방으로 향했다.
역시 세실과 함께 있을 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지금 가주가 바뀌면서 집안이 좀 혼란스러우니까 개떼들처럼 달려드는 것을 보면 진짜 짜증 나!”
“많이 힘들었겠네.”
“그래도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께서는 같은 계파 때문인 건지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지지해주고는 있지만.”
“세실. 네가 어서 우리 오빠랑 결혼하면 좋겠어.”
“율리아…….”
“그러면 네 가문도 안정시킬 수 있고, 만나는 것도 쉬울 텐데.”
“그러게. 그래야 너랑 더 편하게 있을 수 있는데. 그리고 내 첫사랑도 이룰 수 있고.”
세실의 말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참고로 내가 세실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그리고 세실은 마치 강아지에게 하는 것처럼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이게 익숙했다. 나는 세실에게 어리광을 부렸고 세실은 내게 푸념을 털어놓는 게 서로에게 당연한 거였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쉽게 어리광을 부리지 못했고, 세실 역시도 쉽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없었으니까.
세실의 따스함이 마음의 안정을 찾게 했다.
“세실.”
“응?”
“나 공작님이랑 싸웠어.”
“왜?”
“악몽의 영향을 받아서 나도 모르게…… 감정 조절이 되질 않아.”
“악몽?”
“응. 그리고 요즘 이어지는 꿈을 꿔.”
세실은 내 친구니까. 털어놓아도 괜찮지 않을까.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세실에게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무슨 꿈인데?”
“순서는 엉망이지만, 내가 죽는 꿈.”
“…….”
“그리고 내 가족들이 죽는 꿈.”
“율리아.”
“그것도 지금의 약혼자한테.”
“개꿈일 거야.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마.”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서 꿈에서 느꼈던 고통을 현실에서도 똑같이 느껴.”
심장을 조이는 그 고통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던 그 통증.
몸이 얼어가는 그 감각.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바라만 봐야 했던 무력함.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살리기 위해 희생하는 모습들.
전부 하나같이 눈을 뜨고 보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리고 꿈을 꾸면 꿀수록 꿈보다는 기억에 가깝다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혹은 예지.
“무엇보다 본능적으로 이건 꿈보다는…… 뭔가 꼭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
“그렇다고 예지라고 하기엔 현실과 꿈이 많이 달라.”
꿈속에서 오빠는 결혼하지 않았고,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오히려 꿈속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정도로 체스터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개꿈이면 좋겠는데…… 너무 무서워.”
“신경 쓰지 마. 꿈은 꿈이잖아.”
“……그렇겠지?”
“당연하지.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가 너와 네 가족들을 죽일 리가 없잖아. 괜한 걱정이야.”
“응……. 그냥 개꿈이어야 할 텐데.”
“율리아. 핫초코 마실래?”
“응!”
때맞춰 하녀가 핫초코가 든 컵을 가지고 들어왔다. 하녀는 침대 옆에 있는 테이블에 핫초코와 다과를 세팅했다.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과 하나를 입에 넣고 핫초코 한 모금을 마셨다. 달콤한 맛이 입 안 가득히 퍼져나갔다.
“나 오늘 블레어 소공작을 봤어.”
“……어?”
“내가 옛날에 만났다고 했던 남자애 얘기 기억해?”
“당연하지.”
“그 애를 만났던 장소에서 블레어 소공작을 봤어. 나는 미리 그곳에 갈 생각이 아니라 오늘 아침에 충동적으로 간 건데.”
“하지만 그 애는 흑발이었다며.”
“그치? 내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지?”
“아니면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랑 좀 더 얘기를 해 봐. 솔직히 말해서 네가 말한 대로 따지자면 가장 유력한 후보잖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물어도 봤었지만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물어봤어. 근데 체스터는 옛날에 나를 본 적이 없대. 그럼 체스터가 아니라는 거잖아.”
“으음…….”
“그리고 무엇보다 내 기억이 완벽하진 않아서. 그때는 앞이 잘 안 보였거든.”
“……그 안약 때문이지?”
“그렇지 뭐. 부작용으로 환각까지 있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블레어 소공작은 아닐 거야.”
시각이 불완전한 거지 청각이 이상한 게 아니니까.
“블레어 공작 부부는 전부 살아 있으니까.”
“……그렇지.”
“처음에는 체스터가 아닐 거라고, 아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진짜 아니라니까 왜 서운하지?”
“율리아. 너는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이제는 대답을 들어야겠어, 세실.”
이런 타이밍에 물어보기에는 조금 이상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사랑이 뭐야?”
“어……?”
“너 우리 오빠 좋아한다며. 그럼 사랑이 뭔지 안다는 거잖아.”
“……으음. 그냥 보고 싶고, 없으면 생각나고 그러면 사랑이겠지?”
그럼 내가 그런 꿈을 꾸는 게 체스터를 사랑해서?
……는 아니지. 사랑해서 꾸는 꿈이라기에는 너무 살벌하니까.
“율리아. 너만 생각해.”
“……나만?”
“응, 너만. 네 마음이 어떠하든 누가 봐도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는 널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네 눈에는…… 그렇게 보여?”
체스터에 대한 이드리안과 세실의 평가는 달랐다.
과연 누구의 말이 옳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