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정신이 들었지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깜깜한 밤이었다.
“으윽……!”
누군가 내 심장을 손으로 세게 움켜쥔 것만 같이 왼쪽 가슴 부근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온몸에서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몸을 바르작대며 고통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허우적거렸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누군가 내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감각 이후에 찾아온 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더 큰 아픔이었다.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온몸이 얼어가는 감각이었다.
저절로 오들오들 대며 떨리는 몸에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괜찮아질까 싶어 이불을 뒤집어썼다.
하지만 조금도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두운 밤이라 시녀들은 전부 잠에 들었을 테니 설렁줄을 잡아당겨야 사람을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설렁줄을 당길 힘조차 나질 않았다.
그저 헉헉대며 숨을 간신히 몰아쉬는 것밖에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하아, 하…….”
푸드덕거리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옅게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정신까지 장악한 끔찍한 통증에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과연 꿈은 꿈이 맞을까?
한낱 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도 생생했다.
마치 직접 겪어본 것처럼. 정말 내가 경험했던 일처럼.
율리아의 일생을 온전히 본 건 아니었지만, 그 끝은 다 봤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분명히 죽은 게 맞지만, 죽으면 그 이후의 삶이 없는 게 분명하지만.
무언가 끊어진 기분이었다. 죽은 이후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는데 조금의 단서가 될 만한 게 머릿속에 존재하질 않았다.
“하윽……!”
아직도 몸이 욱신거리며 아우성을 쳤지만 침대에서 내려왔다.
푸드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창가 쪽으로 휘청거리는 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창문 밖에는 전에 한 번 봤던 체스터의 전서구가 있었다. 다급히 창문을 열고 새를 안으로 들였다.
“언제 온 거니?”
일단 새의 발목에 묶여 있는 쪽지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다.
{율리아. 당신이 단 음식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알지만 제게 있어서는 당신의 건강이 최우선입니다. 처음 쓰러진 것도 아니라 더 걱정됩니다. 아프지 마세요.}
천천히 쪽지를 읽어 내리는데 밑에 있는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꿈과 정말 대조되는 쪽지의 내용에 무언가 허탈했다.
현실의 체스터는 이렇게 나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리고 꿈은 그저 꿈에 불과한데.
대체 내가 꾸는 이 꿈들은 내게 무엇을 알려주고 싶어 하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 같아서는 꿈의 내용을 잊어버리고 싶었는데 그게 쉽게 되질 않았다.
“……체스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원인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식은땀이 흐름과 동시에 머리에서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새를 다시 돌려 보내줘야 하는데 시야가 자꾸 흐릿해졌다. 간신히 서 있던 몸은 휘청거리며 무너졌다.
풀썩-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며 바닥으로 몸이 고꾸라졌다. 침대에 가서 누울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대로 눈이 감겼다.
* * *
창문이 열리면서 새까만 인영이 방 안으로 넘어오자 쓰러진 율리아의 옆에서 푸드덕거리던 새는 날갯짓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차가운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율리아에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밤하늘과 어울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눈동자. 밤에 율리아의 방에 찾아온 손님은 체스터였다.
그는 끼고 있던 검은 장갑을 벗고는 바닥에 쓰러져서 식은땀에 젖어 있는 율리아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들었다.
“이런 찬 바닥에 누워 있으면 감기 걸립니다.”
누가 업어 가도 모르게 누군가의 말이 들릴 리가 없는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율리아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악몽이라도 꾸는 사람처럼 괴로워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체스터는 그런 율리아를 침대에 조심스레 눕히고는 이불을 그녀의 목 아래까지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어떤 감정을 품은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잠든 율리아를 빤히 응시했다.
“또…… 이렇게 쓰러지기나 하고. 걱정하게 만드는데 걱정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식은땀에 젖은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그녀가 깰까 싶어서 그러는 건지 그의 손길은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율리아, 어서 당신이 제 손에 들어오면 좋겠습니다.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체스터는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으나 깨우려는 의도는 아닌 듯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눈빛은 순수한 애정이라기보다는 소유욕과 광기에 가까웠다.
“평생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보면서 더럽고 추악한 게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도록.”
짙은 열망이 담긴 눈빛과는 다르게 그의 손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앞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드러난 율리아의 이마에 아주 살짝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열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당신의 눈에는 오로지 저만이 담기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저밖에 모르길 바랍니다.”
그는 이마에 닿아 있는 손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손등으로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율리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은 천천히 그녀의 뺨에서 목으로 내려오더니 맥박 위에 손등을 얹었다.
손등에서부터 고스란히 전해지는 미세하지만 규칙적으로 팔딱이는 맥박을 확인한 후에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벗어둔 검은 장갑을 다시 끼고 떨어진 쪽지를 주웠다.
방 안에 있던 전서구로 쓰던 새에게 신호를 주자 팔 위로 날아온 새를 데리고는 들어온 창문으로 향했다.
이 방을 나가기 직전 체스터는 발걸음을 멈춰서고는 잠들어 있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카락은 커튼과 함께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달빛 아래에 있는 그의 그런 모습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는 고혹적인 악마와 다름없었다.
“율리아. 그래도 오늘은 당신을 봤으니까 이만 만족하고 돌아가겠습니다.”
마치 순수한 영혼을 탐내는 악마처럼 체스터의 눈빛은 탐욕으로 물들어 있었다.
* * *
“황녀님, 일어나세요.”
나를 깨우는 유모의 목소리에 차츰 정신이 들었다.
푹신한 느낌과 온몸을 감싸는 부드러운 감촉에 뭔가 의아했다.
“유……모?”
“식사는 방으로 가져다드릴게요.”
왜 내가 침대에 누워 있는 거지?
분명 어젯밤에 체스터의 새가 내 방으로 들어왔고, 쪽지를 읽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는데.
일단 누워 있는 몸을 일으켰다.
“유모가 옮겨줬어?”
“네?”
“……아니야. 아무것도.”
그럼 내가 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나도 모르게 침대로 기어들어 온 건가.
유모는 시녀가 가지고 온 아침 식사들을 테이블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근데…… 유모, 혹시 새 못 봤어?”
“새요?”
유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럼 새는 돌아간 걸까.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 곳곳을 돌아다녔지만 분명 내가 읽었던 종이의 흔적은 조금도 볼 수가 없었다.
“그럼 혹시 종이는 못 봤어?”
“종이요? 어떤 종이를 말하시는 건가요?”
“……그냥 내가 꿈이라도 꿨나 봐.”
정말 꿈이었던 걸까.
세팅이 되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의자에 앉아 포크를 쥐고 음식을 하나하나 입에 넣었다.
“황녀님. 식사 후에 산책이라도 하실래요?”
“귀찮아.”
“그럼 외출이라도 할까요?”
“……어디로?”
“폐하께서 황녀님이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된다고 하셨어요.”
“외출하게 준비해 줘.”
“네. 잘 생각하셨어요.”
포크를 내려놓았다. 애초에 그리 입맛이 돌았던 것도 아니었으니 차라리 외출이라도 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안에서만 지내왔더니 바깥으로 나가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마치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해서. 원작처럼 죽지 않았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줘서.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갈래.”
“네.”
“그러니 그냥 가벼운 옷으로 준비해 줘.”
“마차는 황가 문양이 없는 걸로 준비하라 말해 두겠습니다.”
“응.”
유모는 방 밖으로 나갔다.
어젯밤 새가 들어왔던 창문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창가에는 깃털이 떨어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깃털을 주웠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본 순간 확신에 찼다. 틀림없이 체스터의 전서구의 깃털이 맞았다.
어제 새가 다리에 쪽지를 묶고 왔던 건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는 증거였다.
“……꿈이 아니야.”
근데 보고 싶다며. 나 사랑한다며. 왜 오늘은 찾아오지 않은 거야.
내가 어제 절대로 오지 말라고 했다고 정말 오지 않은 거야?
“황녀님. 레몬색인 활동성이 좋은 드레스를 가지고 왔는데 괜찮으신가요?”
“응. 괜찮아.”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장신구 없이 그저 풀어 내린 채 굽이 낮은 레몬색 구두로 갈아 신고 밖으로 나갔다.
마차를 타고 황성과 가까운 곳에 있는 언덕 아래에 와서 내렸다.
천천히 언덕 위로 올라갔다. 여기는 어렸을 때 황성에서 나와 그 남자애를 만났던 장소였다.
유모가 보면 기겁할 행동이었지만 나무에 걸터앉았다.
“오랜만이네.”
눈을 감고 몸에서 힘을 뺐다. 나른함에 물들어가는 몸에 왠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며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혔다.
‘어른이 되면 널 데리러 갈게.’
흐릿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그때 뒤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황녀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