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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39화 (39/141)

#39화

소유욕……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자 지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심장이 쩌릿하고 먹먹함으로 물들어가고 있으며,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두통이 일렁였다.

숨을 쉬는 게 어려웠다.

“으윽……!”

“율리아?”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의식은 점점 더 흐려졌다.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체스터가 다급하게 황궁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게 필요한 건 황궁의가 아니었다.

“체스터……. 옆에 있어 줘요.”

그의 옷을 꾹 잡은 채로 그에게 내 몸을 맡겼다.

체스터가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흐릿했던 시야가 암전됐다.

* * *

체스터와 클로이 후작 영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정확히는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차갑지 않았기 때문에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를 향하길 바랐던 그의 눈빛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향하고 있었다.

까득-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나만을 향해야 하는데 딴 여자에게 고정되어 있으니 초조했다.

내가 먼저 체스터를 좋아했는데.

내가 행해왔던 모든 노력들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당장이라도 저 둘을 훼방 놓을까 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등을 돌려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1초라도 더 눈에 담으면 내가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체스터!”

그다음 날 그를 찾아왔다.

이미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전부터 그래왔듯 오늘도 체스터에게 어김없이 찾아왔다.

집무실의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는 없었다.

공작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지만 체스터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매일같이 일이 바쁘다며 내게 시선 한 번을 주지 않은 채, 서류만 들여다보며 집무실에서 나가지도 않았던 사람이 없어졌다.

그래서 공작저의 집사장에게 찾아갔다.

“집사! 체스터는 어디 갔어?”

“주인님께서는 약속이 있으셔서 외출하셨습니다.”

“어디로 갔어?”

공작저에 매일같이 방문했더니 저절로 익숙해진 집사는 내게 체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집사가 말해준 곳으로 다급히 향했다. 황녀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으니까.

여기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체스터를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보이지만 체스터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정말 멀리서 봤다. 체스터 혼자 있는 게 아닌 그의 옆에 어떤 금발의 여자가 있는 게.

그리고 그 여자는 아마도 어제 보았던 클로이 후작 영애겠지.

천천히 그의 눈동자가 보일 거리로 움직였다. 그가 나를 본다고 해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체스터…….”

모든 게 무너져 내렸다.

체스터가 저렇게 온기가 실린 애틋한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부정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게는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았던 웃음을 저 여자한테는 지어주었으니까.

내가 먼저 체스터를 좋아했고, 먼저 구애했고, 먼저 체스터를 만났었고,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는데. 어째서?

왜 그의 시선 끝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건지.

“…….”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차마 더는 저 둘을 눈에 담을 수가 없었다. 저런 눈빛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어떻게 황성으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까 두 눈에서는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야! 내가 잘못 본 거야…….”

내일 다시 지크베르트 공작저에 찾아가야지. 체스터의 얼굴을 직접 보고 확인해야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힘겹게 잠에 들고 일어나자마자 씻고 단장을 했다.

어제 울어서 그런지 붉어져 있는 눈가를 화장으로 가렸다.

그리고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지크베르트 공작저로 향했다. 혹시라도 조금이라도 늦게 가면 그가 없을까 봐.

황녀의 체통이고 뭐고 전부 내다 던졌다.

급한 발걸음으로 체스터의 집무실 문을 활짝 열었다. 다행히 오늘은 체스터가 있었다.

“하아……. 황녀 전하.”

오늘도 어김없이 내게는 귀찮다는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클로이 후작 영애에게는 그렇게나 잘 웃어줬으면서 왜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내게는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니까 그를 향한 내 심장이 또 반응했다.

결국 나는 네 앞에서는 더욱 약해지나 봐.

“이만 돌아가 주시면 좋겠습니다.”

“체스터…….”

“배웅해드릴 테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너한테 약한 사람인데 너는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내가 많은 걸 바랐어? 나를 사랑해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나를 밀어내지 말라는 건데.

내가 노력할 테니까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여 줄 때까지 표현할 생각이었는데, 너는 다른 여자한테 눈을 돌리고 말았지.

나는 어떻게 해야 될까. 눈이 핑 돌았다.

“내가…… 내가 먼저 널 좋아했잖아!”

그래, 황녀의 체면 따위가 뭐가 중요해.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는데.

그런데 왜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처럼 가슴이 먹먹한 건지. 왜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질 않는지.

“내가…… 내가 그 여자보다 부족한 게 대체 뭐야?”

“황녀 전하.”

“그래. 나는 제국의 유일한 황녀야! 내가 가지지 못하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근데 왜 너는…….”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의 다리를 붙잡고 황녀답지 않게 애원했다.

아주 처절하게 그에게 매달렸다.

이런 진심 어린 애원과는 다르게 나를 보는 체스터의 시선은 서늘하기만 할 뿐이었다.

조금의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정하고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조용히 응시할 뿐이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구는 내가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여기서 시간 낭비 하시지 마시고, 귀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를 쫓아다녔던 경험에 의하면 지금 그의 태도는 저게 황녀를 대하는 최소한의 예우였다.

그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차마 나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이유.

나는 황녀라는 신분의 방패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이걸 원한 게 아니었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먼저 사랑한다 말했고, 내가 먼저 그의 애정을 갈구했는데.

체스터가 그 여자를 보기 전부터 내가 체스터를 좋아했는데!

“체스터……!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내가 먼저였는데.

왜 나를 보는 눈빛은 귀찮고, 상대하기 싫다는 눈이야? 내가 그 정도로 싫은 거야?

그러면 내가 그 여자처럼 행동하고, 그 여자처럼 외모를 바꾸면 나를 바라봐줄 거야?

“체스터, 그럼 내가 클로이 후작 영애 같은 금발로 염색하고, 눈동자 색도 약을 써서 녹색으로 바꿀게! 그러면……!”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한 번이라도 봐줄 수 있어?

그렇다면 기꺼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로 돌아갈게.

네가 금발을 좋아하는 거라면 기꺼이 내가 극도로 싫어했던 그 머리카락 색으로 물들일게.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황녀 전하께서 어떠한 모습을 하든, 황녀 전하께 관심이 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체스터는 매정했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내가 먼저 고백했고, 내가 먼저 다가갔었는데. 왜 나를 받아주지 않는 거야.

서러웠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기다렸는데.

왜 체스터의 시선에는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있는 걸까.

“황녀 전하께서 아무리 말해도, 변하는 건 없습니다.”

“…….”

“그 은빛 머리카락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해도, 보라색 눈동자를 녹색으로 바꾼다 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하고 주저앉았다.

두 눈에서 나오는 한껏 참아왔던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체스터……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

“내가 바꿀게! 내가 나를 바꿀게. 내가 그 여자처럼 행동할 테니까!”

“아뇨, 황녀 전하께서는 클로이 후작 영애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내가 다 버릴게. 응? 내가 너한테 다 맞춰줄 테니까…….”

나를 봐주면 안 되는 거야?

그동안 내가 널 얼마나 사랑했었는데, 그 애정에 대한 대가가 이거야? 정말로?

“아니잖아……. 내가 너 많이 좋아하는 거 알고 있는데, 정말로 이러는 건 아니잖아…….”

“황녀 전하. 자꾸 이렇게 구시면 곤란합니다.”

체스터의 눈빛은 시리다 못해 너무나도 싸늘했다. 떨리는 손으로 붙잡고 있었던 그의 발목을 놓았다.

“어떻게…… 체스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굴어……? 너를 위해서 내가 나를 포기해주겠다고 했잖아…….”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체스터가 마음을 열 거라 생각해 공을 들였던 시간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진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황녀 전하.”

그가 무릎 한쪽을 굽히고,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혹시나 하는 희망이 있었다.

체스터의 손이 내 턱을 붙잡았다. 그의 핏빛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황녀 전하께서는 저를 사랑하시니,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게…….”

너를 사랑한다고 한 번만 차갑지 않게 봐달라고 애원하는 사람한테 할 말이야?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네가 다른 사람한테 시선을 돌리는 걸 이해하라고?

네가…… 네가 어떻게 감히 나한테 그렇게 말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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