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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38화 (38/141)

#38화

체스터는 시린 겨울, 녹지 않는 얼음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남들을 대하는 태도마저도 모두 차가운 사람.

하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거였다.

그래서 괜찮았다. 나 혼자 좋아하는 거지만 내게만 차가운 게 아니라 모두에게 차가운 사람이라 견딜 수 있었다.

내가 먼저 다가간다면 언젠가는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내 온기로 그의 냉기를 녹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체스터!”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지 않는 그를 보러 지크베르트 공작저를 찾아왔다.

그는 늘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일을 하고 있는 모습조차 섹시한 건지!

“하아…… 황녀 전하, 또 오셨습니까?”

그는 늘 내 방문을 싫어하고 귀찮아했다.

마음 같아서야 그를 황성에서 보고 싶었지만 그가 발걸음을 해 주지 않으니 내가 직접 찾아와야 했다.

나 혼자 좋아해서 이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 거니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게 당연한 거지.

“폐하께서는 황녀 전하가 이곳에 오는 걸 말리지 않습니까?”

“사랑해!”

“…….”

그의 눈이 닿는 곳은 얼어버릴 것 같았지만, 그래도 끄떡하지 않았다.

나는 그를 사랑했으니까. 다시 본 순간 나는 체스터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체스터, 나한테 장가와.”

“저는 결혼 생각 따위 없습니다, 황녀 전하.”

“왜? 싫어?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이렇게 구애하는데도?”

“…….”

그는 내가 질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았다면 체스터의 저런 얼굴을 보고 도망쳤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체스터가 처음부터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황녀의 부군은 싫은 거야? 나보다 제국에서 높은 신분의 여자는 없는데?”

“하아……. 제가 몇 번은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황녀 전하, 저는 결혼할 생각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랑 결혼해!”

체스터는 원래 다정하고 여린 사람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으니까.

그는 처음부터 이렇게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러니 내가 이렇게 다가가면 언젠가 체스터도 내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이렇게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을 내치지는 않겠지.

그래도 체스터는 내게만 차가운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차가운 사람이니까. 안심할 수 있었다.

모두에게 다정한 사람보다는 모두에게 차가운 사람이 더 좋으니까. 적어도 불안함을 느끼진 않을 테니까.

내게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게 아니니까.

“하……. 황녀 전하.”

“율리아라고 불러도 된다고 했잖아! 이거 되게 특권인데….”

“……황녀 전하.”

“황족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데, 특별히 내가 너는 허락해줄게!”

어차피 너는 내 부군이 될 테니까. 내가 원하기만 하면 네 의지와 상관없이 너는 나랑 결혼할 수밖에 없는데.

하지만 나는 너랑 연애결혼 하고 싶으니까.

네가 억지로 하는 결혼이 아니라, 정말 좋아서 하는 결혼이 되길 바라니까.

내가 주는 사랑만큼, 체스터에게 사랑을 받고 싶었다.

모두에게는 냉랭한 눈빛이지만, 나를 향할 때만큼은 온기가 느껴지는 그런 눈동자를 보고 싶었으니까.

“나랑 결혼이 싫으면 연애부터 하자. 나는 결혼까지 기다려줄 수 있어!”

“황녀 전하께서 아무리 이렇게 구셔도 소용없습니다.”

“왜? 너 약혼녀도 없잖아.”

“…….”

체스터는 내 발언이 기가 차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보통은 저런 눈빛으로 노려보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겠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나는 체스터를 사랑했으니까. 체스터도 그걸 알고 있었다.

“황녀 전하, 결혼 상대가 없는 게 아닙니다. 결혼을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치만…… 체스터는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유일한…….”

체스터의 눈빛을 보니 이 이상은 말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더 말을 하면 체스터의 상처를 건드는 걸 수도 있으니까.

나는 체스터를 사랑하는 만큼 체스터한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체스터…… 내가 네 가족이 되어줄게.”

“필요 없습니다.”

“…화났어?”

“그만 돌아가 주세요, 황녀 전하.”

“내일 또 올게!”

“…….”

내게만 냉담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괜찮아.

체스터는 내 방문을 반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출입을 막거나, 핑계를 대서 내 방문을 막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직은 괜찮았다.

내가 체스터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내가 체스터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었다.

“……먼저 데리러 온다고 한 건 너였는데. 기다려 달라고 해서, 기다렸는데.”

너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그래도 내가 너를 기억하니까. 더 많이 표현하면 너도 기억이 떠오르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체스터와 클로이 후작 영애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기 전만 해도.

심장이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다.

* * *

언제 잠에 들었던 건지. 또 이상함 꿈을 꾸었다.

누군가 죽는 끔찍한 꿈이 아닌, 마치 과거의 기억을 회상시켜주는 그런 알 수 없는 기이한 꿈.

체스터가 나를 사랑하지 않고, 나 혼자 그를 짝사랑하는 꿈이었다.

그를 보며 뛰었던 그 심장에서 느껴진 애틋함과 답답함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체스터……?”

심장을 진정시킨 후에 감고 있었던 눈을 뜨니 달리는 마차 안이었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율리아, 깼습니까?”

바로 옆에서 그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꿈에서 들었던 냉기가 서린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기가 느껴지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도로 눈을 감았다.

“제가…… 언제 잠들었어요?”

“아까 밖에서 잠들었는데, 아쉽더라도 저녁이 되기 전에는 당신을 집에 보내줘야 하니까요.”

“아…… 그렇죠.”

“괜히 집에 보내지 않았다가 당신과의 결혼에 마찰이 생기면 안 되니까요.”

피식-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서렸다. 체스터의 말이 너무 귀여워서.

“왜요? 제가 늦게 들어가면 왜 마찰이 생기는데요?”

“생각보다 아버님과 형님이 엄해서요.”

“아…… 아빠랑 오빠가 좀 저에 대해서만 엄하긴 하죠.”

“결혼하면 하루 종일 함께 있을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마차가 멈췄다. 그가 먼저 내리더니 내게 손을 내밀고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에스코트해 드리겠습니다.”

“체스터, 방까지 에스코트 해줘요.”

“기꺼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고 마차에서 내렸다.

“시간이 있다면……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요.”

“당신을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이 단 1초라도 늘어나는 거라면 마다할 이유가 제게는 없죠, 율리아.”

그는 잡고 있던 손을 입술 쪽으로 가져다 대더니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그 이상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금 황성이다 보니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의식해서 그런 건지.

“어서 가요. 저를 조금이라도 독점하고 싶다면서요.”

뭐가 되었든 이제는 상관없었다. 체스터는 나를 웃게 만들었으니까.

멍하니 서 있는 그의 손을 잡아 이끌자 그의 몸도 함께 따라왔다.

주변을 전부 물리고 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발이 방 안에 닿기가 무섭게 체스터는 바로 방문을 닫았다.

체스터의 손이 내 허리에 닿았고, 나는 두 팔을 그의 목에 휘감았다.

여기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다가온다면 숨결이 맞물릴 거리였다. 그러나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입술을 겹쳤다.

새어 나가는 달뜬 숨은 그가 모조리 삼켰다.

조금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명한 애정과 집착 어린 열망, 그의 목구멍을 건조하게 태우는 짙은 갈증.

그는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혀로 입 안을 헤집으면서도 이내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다뤘다.

소중하지만 약한 물건을 다루는 듯 그는 짐짓 조심스러웠다.

숨이 부족해진 탓에 그의 목을 휘감은 팔을 내려 손으로 그의 자켓을 꽉 붙잡자 입술이 떨어졌다.

“흐으, 하……. 체스터.”

떨어진 입술에서는 헐떡이는 숨이 터져 나왔다.

그의 입술은 내 입술에서 내 목 부근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대며 여린 살을 빨아들였다.

낯익은 감각에 옅은 신음 소리가 터져 나오며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흐읏……!”

“율리아. 당신한테 달콤한 향이 나는 거 압니까?”

내가 아는 원작은 변했고, 그 꿈은 개꿈에 불과해.

현실의 체스터는 이렇게나 나를 갈구하고 있는걸. 우리의 엔딩을 이번만큼은 비극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할게.

이번에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당신은 늘 제 인내심을 시험합니다.”

“체스터…….”

“덕분에 제 인내심의 한계가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의 손이 드레스 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맨다리의 살갗에 그의 손이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싶은 제 추잡한 욕망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약속했잖아요.”

“네. 그래서 참아내고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삼키고 싶게 만드는 달콤한 향을 풍기는 당신을 보면서도요.”

그의 엄지손가락이 부르튼 내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입술이 쓰라렸다.

시선을 올리자 그의 시선과 얽혀 들어갔다.

그가 내게 향하는 눈빛은 그가 말한 대로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랑이라기에는 무언가 달랐다.

확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의심은 확신이 되어 갔다.

지금 그의 눈동자에서 읽히는 감정은 사랑이라기보다는…….

“당신과 약속했기에 인내하고 있으니…… 입술까지만 건들고 있지 않습니까.”

“…….”

“어서 당신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습니다, 율리아.”

……광적인 소유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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