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금발에 파란색 눈동자라면 누군지 쉬이 짐작이 가질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드리안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 수도 있고, 아니라면 체스터가 이드리안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걸 수도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체스터가 착각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소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이기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블레어 소공작께서 착각한 게 아닌가요?”
“황녀 전하.”
“네?”
“착각이라 치부하고 싶지만…… 체스터는 과거 귀족 출신의 금발의 여자를 광적으로 집착하며 찾았습니다.”
“…….”
“그랬던 친우가…… 갑자기 눈동자도, 머리카락 색도 전부 다른…… 황녀 전하께 집착하고 있습니다.”
“……왜 제게 이런 걸 알려 주나요.”
남주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옅은 웃음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전에 제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생겼다고 했었죠.”
“……네.”
“황녀 전하. 저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기회조차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는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도, 행동도 그 무엇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제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은 황녀 전하이십니다.”
“……저를요?”
만약 예전에 남주에게서 저런 말을 들었다면 기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 와서? 오히려 찜찜했다.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한 남주의 고백을 듣는 것에, 설렘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물론 남주는 미남이었고, 실제로도 무척 다정한 사람이지만 저 고백이 설레지 않았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이미 체스터과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체스터는 아니라고 하지만 황성을 몰래 나왔을 때 만났던 그 애를 내 무의식이 체스터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혹은 남주인 그가 여주가 아닌 내게 고백을 해서 당황한 걸까.
“블레어 소공작…… 저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상대가 있는 몸이라…….”
“황녀 전하께서 제 마음을 받아달라고 한 말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면요?”
“그저 제 마음을 알아주시면 좋겠어서…… 그런 겁니다.”
여주의 부친의 죽음은 원작이 바뀌지 않았다는 걸 상기시켜줬다면, 남주의 고백은 원작이 바뀌었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남주의 감정이 원작과 다르다는 건 가장 큰 틀이 바뀐 것과 다름없으니까.
남주와 여주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원작의 결말인데, 남주의 마음이 여주가 아닌 이를 향한다는 것은 명백한 원작 파괴였다.
그리고 애초에 여주의 첫사랑이 남주가 아니라 엑스트라인 우리 오빠였다면?
거기에다가 원작대로 오빠가 죽지 않고 앞으로도 살아 숨 쉬고 있다면?
“제가 황녀 전하의 옆에 서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
“제가 황녀 전하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이라도 알아주면 좋겠다는 제 욕심입니다.”
하…… 진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남주인 이드리안의 고백을 들었을 때 당황스러움 다음으로 든 생각은 우습게도, 체스터의 말들은 진심이었구나, 라는 거였다.
“……블레어 소공작.”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황녀 전하.”
“제가 그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요?”
“언제든 마음이 변한다면, 저를 찾아주세요.”
마음이 변한다고? 나는 체스터를 사랑한 적 없는데.
아니, 나는 체스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갑자기 의문이 들었다.
체스터는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는데, 나는? 내게 있어서 체스터는 어떤 존재인 거지?
“……블레어 소공작, 지금까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해줄게요.”
“…….”
“접어요.”
“……정말 매정하십니다.”
“저는 체스터와 결혼을 약속한 사이이기 이전에, 체스터와 연인이에요.”
체스터의 모든 행동은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남주의 고백으로 원작이 부서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정말이지 노심초사했다. 혹시라도 체스터의 모든 행동과 말들이 전부 연기일까 무서웠었다.
하지만 이제는 믿을 수 있었다. 이미 원작은 틀어졌으니까.
“블레어 소공작은 분명히 좋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황녀 전하께서는 웃는 얼굴이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체스터와 하는 말이 비슷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로 내 손을 가져가더니, 내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확실히 남주는 남주라는 게 느껴졌다. 얼굴 하나만큼은 찬란하게 빛나는 천사를 떠올리게 만들었으니까.
체스터는 흑막이라 그런지 고혹적인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만큼 남주의 얼굴이 온기가 느껴지는 잘생긴 얼굴이라는 의미였다.
그건 그거였고, 이건 이거였다. 그의 손에 붙들린 내 손을 빼냈다.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다음 만남을 기약해도 되겠습니까?”
“다음은 저와 체스터의 결혼식에서 보면 좋을 것 같네요.”
내가 할 일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여자를 찾는 거였다.
그리고 체스터의 애정을 의심과 불안 없이 받아들이는 게 내가 할 일이었다.
* * *
그가 만나자고 했던, 인적이 거의 없는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체스터!”
거리가 꽤 있었지만, 멀리에서도 체스터는 본인의 존재감을 내뿜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큰 키에,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과 핏빛 눈동자와 조화를 이루는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
원작 설정에 의하면, 세계관 속 최고 미남은 흑막이었으니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흑막이 끝까지 살아야만 했던 이유는 얼굴이었으니까.
내 취향의 얼굴은 우리 오빠였지만, 체스터의 얼굴은 모두의 취향을 무시하는 그런 완벽한 얼굴이었다.
“율리아. 그렇게 뛰면 넘어집니다.”
체스터의 품에 달려가 안겼다. 느껴지는 이 따스한 온기가 좋았다.
내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저 말들이 진심이라는 걸 아니까, 심장이 간질거렸다.
“율리아.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왜 말 안 했어요?”
“네?”
“체스터가 찾는 사람이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요.”
“……누가 알려준 겁니까.”
“블레어 소공작이요.”
“그렇군요. 저 외에 남자한테는 관심을 주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율리아.”
내 허리를 안은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체스터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게 맞다면, 이건 질투의 일종인 걸까. 그러면 좋겠다.
질투가 맞다면 체스터는 나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으니까.
“제 관심이 다른 남자한테 향하는 게 싫어요?”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이 제가 아닌 다른 이를 향하는 것조차 싫습니다. 그게 사람이든 동물이든, 남자든 여자든.”
“……체스터도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여자를 찾고 있잖아요.”
“아뇨.”
체스터는 가볍게 내 허리를 잡아 안아 올렸다.
땅에 닿아 있던 발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슨 사람의 힘이 이렇게 센 건지.
“체스터?”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둘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정말요?”
“네. 당연하죠, 율리아. 혹시……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보니까 체스터가 잘생겼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향한 애정에 대한 진심이라는 점이 심장을 간지럽혔다.
“체스터. 저를 정말 사랑해요?”
“네. 당신을 무척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게 내뱉는 사랑한다는 그 말이 왠지 모르게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율리아?”
“……그냥 이러고 싶었어요. 괜한 의미 부여하지는 마요.”
체스터는 나른하게 웃었다. 아주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왜 발이 땅에 닿았는데 이렇게나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건지.
체스터가 나를 해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도, 이 불안감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체스터?”
“율리아가 먼저 시작한 겁니다.”
그의 한쪽 손은 내 허리를 옭아맸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아주 단단하게 붙잡아서 그의 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게 했다.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음험하기 짝이 없는 열망이 녹아든 눈동자에 나를 담고 있었다.
마치 한 마리의 늑대 같다는 느낌이 물씬 들었다.
“네? 뭐를…….”
……하려고?
할 말은 그의 입술에 의해 가로막혔다. 숨이 막혀 호흡하는 게 불가능했다.
어지럽혀지는 곳은 입 안이었는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그는 조금의 숨결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입 안의 숨을 빨아들였다.
손은 파들거리며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는 벌어진 입술 안으로 타액을 밀어 넣었다. 불규칙하게 터져 나오는 숨결을 그는 모조리 삼켜댔다.
짙은 욕망. 그의 손이 허리 부근을 어루만졌다.
머릿속에서는 이 이상은 위험하다고 적색 경고등이 울리고 있는데, 본능은 그를 더 원하고 있었다.
“하아…….”
이윽고 그가 먼저 입술을 떨어뜨려서야 신선한 공기가 폐로 들어옴과 동시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숨 쉬어요, 율리아.”
체스터 혼자만 멀쩡했다. 나는 이렇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과 갈증을 느끼는 눈동자는 섬뜩했다.
아직도 한참은 부족하다는 눈빛이었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힘들어하면 어떻게 해요.”
“……네?”
“한 번으로 끝내기엔 아쉽잖아요.”
아니. 전혀 안 아쉬운데?
정말 결혼 전까지 키스로 제약을 걸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또다시 들었다.
“전혀 안 아쉬운데요…….”
“제가 아쉽습니다, 율리아.”
그는 능글맞게 웃었다. 정말 혼자만 여유로운 웃음을 짓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나 혼자만 힘들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결혼…….”
말이 채 전부 이어지기도 전에, 입술이 포개졌다. 이번에도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갈망이 느껴졌다.
마치 갈증을 해소하는 사람처럼, 집요하게 입 안 구석구석을 헤집어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머릿속이 까맣게 물들어지는 것 같았다.
“하…… 읍!”
잠시 숨을 돌릴 틈을 주고서는, 또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집요했다.
머릿속이 온통 체스터로 가득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혼미했다.
그는 키스만으로도 이렇게 정신을 쏙 빼놓았다.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게 머릿속을 온통 그로 가득히 채웠다.
또다시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시원한 바깥 공기를 목구멍으로 들이마셨다. 달뜬 숨을 힘겹게 내쉬었다.
“흐으…… 하…….”
“율리아. 힘들어요?”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 같았지만,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했다.
절대로 체스터가 키스를 잘해서 넘어가 주는 게 아니었다.
몇 번의 심호흡 끝에 규칙적으로 돌아온 호흡으로 말했다.
“체스터…….”
“율리아. 눈 감아요.”
이 자식이 진짜!
하지만 눈은 감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꽉 부여잡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