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그다음 날 체스터는 장례식에 오지 않았다. 물론 오빠도 함께 오지는 않았다.
어제는 황족의 자격으로 조문을 왔다면 오늘은 세실의 친구로 옆에 있어 주기 위해 왔다.
세실은 사람이 별로 없는 곳에서 주저앉은 채로 혼자 있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었을 때 혼자 있다는 게 얼마나 외롭고 슬픈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말없이 세실의 옆에 앉았다.
“…….”
오늘도 어제와 다름없이 세실의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는 대신 조용히 세실을 끌어안았다. 세실이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율리아.”
“응, 나야. 이제 좀 진정 됐어?”
“와줘서…… 고마워.”
“나는 네 친구인걸.”
“……응, 네가 옆에 있어 줘서…… 안심이 돼.”
나는 세실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소중한 엄마를 잃은 아픔을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나보다 더 세실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체스터겠지.
체스터도 세실처럼 부모님 두 분을 잃었으니까.
그렇기에 원작에서도 체스터가 여주에게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 거겠지.
어쩌면 이드리안이 남주가 된 건 부모님이 전부 살아 있었기에 받았던 사랑을 여주에게 퍼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부족한 애정을 남주와 그의 부모님이 채워 주었기에 여주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 게 아닐까.
“당연히 내가 네 옆에 있어 줘야지, 세실.”
세실의 등을 토닥였다.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아무라도 좋으니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던 사람이었으니까.
그 누구도 내 옆에 있어 주지 않았던 만큼, 이런 모습을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엄마가 죽기 전까지 아파했던 모습도 아직은 아른거렸으니까.
다친 사람을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정확히는 다친 사람을 보면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꿈의 영향이 아니라 내 과거의 영향이었다.
“율리아…….”
“네 마음이 진정되면, 네가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자. 네가 좋아하는 극장도 가고.”
“……응!”
세실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실의 옆에 있어 주는 게 좋겠지. 옆에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될 테니까.
나도 누군가 옆에 있어 주길 바랐지만…… 혼자였으니까.
물론, 모두가 나 같은 처지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세실은 옆에 사람이 있어 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누군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율리아…… 나랑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자.”
“응.”
다행이었다. 적어도 바깥 공기를 마시려고 하는 의지는 있어서.
세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걷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충격 때문인지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리는 세실을 붙잡았다.
“……괜찮아?”
“응. 괜찮아.”
“세실, 나한테는 솔직해져도 돼.”
“……슬프지만 이겨내야지.”
세실은 오히려 웃었다. 그런데 왜 그 미소가 서글프게 느껴지는 걸까.
슬픔을 이겨내는 건 좋은 마인드였다.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굳이 괜찮은 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아…… 내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은 없겠지.
사실은 나도 전혀 괜찮지 않은데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세실에게 이 말은 해주고 싶었다.
“세실, 슬프면 울어도 돼.”
누군가 내게 해주었으면 했던 말. 하지만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
“……율리아, 나는 네 앞에서만 울 수 있어.”
“…….”
“너는 유일하게 내가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밖에 있다면 울면 안 돼.”
아, 세실은 귀족이었으니까.
“너는 황녀님이니까 남들의 시선이 중요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해도 괜찮지만…… 나는 귀족이라서 굳건해야 해.”
“……세실.”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다른 계파 귀족들에게 뜯어 먹히는 거야. 지금처럼 가주 자리가 부재중일 때는.”
수없이 많은 말들이 입 안에 가득했지만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세실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데도 불구하고 절대 눈물 한 방울을 떨구지 않았으니까.
“율리아. 네가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귀족들은 깨끗하지도 않고 오히려 엉망이야.”
“……아주 모르는 건 아니야.”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원작에서 세실과 이드리안의 사랑이 빛났던 이유는 다른 계파임에도 불구하고 이룬 사랑 때문이었을까.
이드리안이 진보파의 수장이 될 후계자였다면 세실은 보수파의 일원이었다.
그렇기에 그 둘의 사랑은 어쩌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로가 더 애틋했을 수도 있었다.
“정치든 사교계든 전부 뭐가 됐든 진흙탕 싸움이야. 그리고 아버지의 조문을 온 사람들 중 우리 계파인 사람도 있지만, 중립을 지키는 이들 말고도…….”
“……세실.”
알고 있다. 귀족들 중 깨끗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그저 말을 하지 않고 경청해주는 게 옳겠지.
“우리와 상극인 계파도 있어.”
“너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서 율리아 너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가장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어.”
왜 세실이 여주인공인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남주 혹은 남조였다면 세실에게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
세실은 무척이나 견고한 사람이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그런 사람인 만큼 시선을 뗄 수 없는 주인공이니까.
“내가 네게 그런 친구가 되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야.”
“나를 진짜 친구로 여기는 사람은 너뿐일 거야, 율리아.”
“오히려 내 친구는 너 하나뿐인걸.”
내게 있어서 친구가 누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말할 수 있는 이름이 너 하나뿐이니까.
그만큼 내가 너를 신뢰하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는 너 외에는 친구가 없다는 뜻이지.
“율리아. 내가 가식 없이, 정말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나도…… 내 진심을 내비치는 사람은 너뿐이야!”
세실은 나를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율리아. 너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를 사랑해?”
“……어?”
“공작 각하는 널 무척 사랑하는 것 같아 보여서.”
세실의 말에 깜짝 놀랐다. 이런 말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도 알아차릴 정도로 그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세실…… 네 눈에는 그렇게 보여?”
“응. 너는 전혀 못 느꼈어? 아니면 공작 각하가 네게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도 해주질 않은 거야?”
“……음. 내 마음을 모르겠어.”
“왜? 공작 각하 정도면 얼굴 되고, 키도 되고, 딱히 모자랄 건 없어 보이는데.”
그치. 모자란 건 하나도 없었지. 오히려 완벽하다에 가깝지.
딱히 부족한 것도 없었다. 단지 내가 불안해서 그럴 뿐이었다.
그리고 세실이 갑자기 이런 주제로 바꾼 건 더는 슬퍼하고 싶지 않아서겠지.
“……그냥 의심되잖아. 딱히 날 사랑할 만한 계기도 없었는데, 결혼하자고 한 것도 그렇고.”
“그래도 지금은 공작 각하가 널 사랑하는 건 맞지 않아? 그러면 뭐가 고민이야.”
“……응?”
“공작 각하가 널 헷갈리게 한 게 아니라면, 그냥 결혼해. 솔직히 남편감으로, 공작 각하만 한 분이 또 어디 있다고?”
“역시…… 그런가.”
“그래. 공작 각하께 딱히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성 편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바람기도 있어 보이지 않는데.”
역시 연애상담은 친구한테 해야 하는구나. 확실히 친구가 제대로 된 답을 주는 것 같았다.
세실은 내 귀에 대고 주변 이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물론, 밤일을 못하면 그건 결혼 못 할 사유가 되긴 하겠지만.”
세실의 말에 깜짝 놀라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설마 얼굴이 빨갛게 변한 건 아니겠지?
“어…… 으음…… 율리아…… 이미 거기까지 진도가 나갔다면 굳이 결혼을 고민할 필요가 있을까?”
세실의 얼굴도 새빨갛게 변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저 음흉하게 웃는 표정을 보니 말 다 했지.
그래도 세실이 슬픔을 덜어낸 것 같아서 다행이긴 했다.
“거기까지 나갔다면…… 뭐, 못하면 파혼하고, 잘하면 결혼해. 뭐가 문제야?”
“……음. 내가 문제?”
“갈 때까지 갔는데 뭐. 설마…… 못…….”
“그건 아니야!”
오히려 너무 잘해서, 곤란할 지경이지만.
“아, 세실. 이거 아빠랑 오빠는 몰라!”
“알아. 되게 보수적인 분들이잖아. 알면 네 머리카락……의 안전은 보장 못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외출 금지를 당했거나.”
“……오빠는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지. 아빠는 잘 모르겠어……. 이 결혼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거든.”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면 너는 약혼했어도 외출 금지를 당했을 거야. 아마 공작 각하를 볼 수도 없었을 거고.”
“음…… 네가 생각해도 그래?”
“워낙 과보호이시잖아.”
확실히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내게 있어서도 세실뿐이었다.
나와 세실은 서로에게 있어서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떼어 내고 싶어도 떼어 낼 수 없고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였다.
“세실. 내가 너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길까?”
“생길 거야. 율리아. 그러니까 너무 위축되어 있지 마.”
“……세실. 나 이 결혼 해도 좋을까?”
“네가 극도로 싫지 않다면, 딱히 공작 각하께 하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잖아. 제일 중요한 문제도 전혀 문제가 없으니까.”
결혼을 앞당겨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너 우리 오빠랑 결혼해도 괜찮아?”
“응. 나는 괜찮아. 아니, 오히려 좋아.”
“너…… 우리 오빠 좋아해?”
“응. 오래전부터 좋아했어.”
충격적이었다. 그럼 도대체 언제부터?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라도 이루어진다니 좋은 거지.”
“완전…… 로맨틱!”
“어…… 음…… 그런가? 사실 정략결혼도 상관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하는 정략혼이니 나는 만족스러워.”
세실과 걷고 있는 도중 우리 앞에 이드리안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황녀 전하, 그리고 클로이 후작 영애.”
“안녕하세요, 블레어 소공작.”
“안녕하세요, 블레어 소공작님.”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다. 슬쩍 세실을 봤더니, 세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황녀 전하께서 제게 시간을 아주 조금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저요?”
당연히 세실에게 볼일이 있는 줄 알고, 빠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가 지목당해서 깜짝 놀랐다.
세실을 바라보니 세실은 이미 멀어지고 있었다.
“황녀 전하의 약혼자에 대한 얘기입니다.”
“……체스터에 대해서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아실지 모르겠지만…… 체스터는 오래전에 만났던 어떤 여자애를 찾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그 여자애가 세실이라는 점까지도 알고 있었다.
다만, 체스터 본인은 그 여자애가 세실이 아니라고 단언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알아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 정도도 모르고 결혼할 수는 없잖아요.”
“그 여자애가 체스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사실도 알고 계신가요?”
그랬겠지. 원작에서도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과거이지 않은가.
현재가 중요한 거지, 과거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의 체스터는 나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
그래서 이만 할 말이 없으니 가보겠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충격적인 말이 쏟아졌다.
“황녀 전하. 체스터가 찾는 여자애는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에, 찬란한 금발을 가졌다고 했습니다.”
잠깐만…… 파란색 눈동자라고? 그러면 세실이 아닌데?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