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34화 (34/141)

#34화

이미 황태자비는 세실로 내정이 됐고,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나의 하나뿐인 친구, 세실의 부친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내게 닿았다.

친구의 부친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동시에 원작이 다시 들이닥쳤다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내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친구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세실 아버지의 장례가 이뤄지는 곳으로 오빠와 향했다.

오빠는 새하얀 꽃 한 송이를 영정 앞에 놓았다. 헌화가 끝난 후 오빠는 클로이 소후작에게, 나는 세실에게 향했다.

“세실…… 나 왔어.”

오빠와 결혼하기 전, 그것도 원작대로 여주의 부친이 죽었다.

사유는 듣지 못했지만 원작대로라면 세실의 부친은 살해당했다. 하지만 누구에게 살해당했는지는 몰랐다.

여주의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은 소설이 완결될 때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흐윽, 끅…… 율리아.”

그러나 결국 스토리는 차질 없이 원작대로 흘러갔다.

겨우 여주와 오빠가 결혼한다고 해서, 체스터가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인 걸로 바보같이 원작이 틀어졌다고 생각했던 거야?

어리석구나, 나도.

원작에서 벗어나려고 다짐한 게 무색해질 뿐이었다. 오히려 정해진 운명은 변치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주었다.

죽을 운명은 변치 않는다는 걸.

“괜찮아……. 세실. 소리 내어 울어도 돼.”

“흑……. 율리아…….”

“응, 많이 슬프지?”

조문을 왔지만 차마 내가 가진 신분 때문에 오래 있어 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나 말고도 많은 조문객들이 몰려들었고, 오빠도 함께 왔으니까.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체스터도 있었다. 아마 같은 계파의 수장이니까 안 올 리가 없지.

결정적으로 흑막이 여주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

여주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장례식에 찾아와 여주를 만나고 그 아픔을 자신도 겪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이후부터 여주에게 광적으로 집착하는 증세를 보인다.

정확히는 오랫동안 찾은 그 사람이 원작 속 여주인 세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계기였으니까.

어쩌면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체스터는 원작대로 흘러가는 지금도 과연 날 원할까?

아니면 나는 이야기 속에서 퇴장해 주어야 될까?

“크흡…… 끅, 율리아.”

“세실…….”

세실의 우는 모습을 직접 보니, 그 슬픔이 내게 전염되었다.

나조차도 울고 싶어질 정도로 세실은 무척이나 슬프게 울고 있었다.

세실은 목 놓아 울고 난 후, 차츰 진정을 되찾아갔다.

그래. 차라리 내게 안겨 우는 게 마음이 편안해지겠지. 나도 소중한 누군가를 잃은 아픔을 알고 있으니까.

누군가의 품에 안겨서 엉엉 울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큽, 율리아. 오늘은 이만 돌아가야겠다. 내가 네 드레스를…….”

“괜찮아, 우리는 친구잖아. 내 드레스 정도는 네게 내어줄 수 있는걸.”

“율리아……!”

여주는 여주라는 게 이렇게 느껴졌다.

우는 모습이 이렇게 안아주고 싶다는 충동을 거세게 일으켰으니까. 보는 사람을 속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세실…….”

“그래도…… 아직은 오빠가 있으니까…….”

“……응.”

그래. 아직 세실에게도 가족이 한 명 남아 있으니까.

비중이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세실에게는 오빠가 한 명 있었다.

내가 아무리 위로해 주더라도 한계가 명확하기에, 가족이 있다면 남은 건 가족이 채워줘야 했다.

“……율리아, 와줘서 고마워……. 정말로.”

“내일…… 또 올게.”

세실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불어오며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강 정리하고 고개를 돌리자 체스터가 보였다.

그를 보자 숨이 턱 막혔다. 묻고 싶은 말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그를 피했다.

어차피 먼저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인사치레가 끝나는 대로 오빠도 올 테니까.

“율리아.”

“……왜요.”

그냥 지나쳐가려고 했는데 체스터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할 말 없으면 비켜요.”

“제게 화나신 게 있으십니까.”

“……없어요.”

“율리아, 그럼 대체 왜…… 당신이 저를 피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까요.”

“피한 게……!”

맞지. 맞아, 사실은 네가 여주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어.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이 여주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어.

“율리아…… 제가 잘못한 게 있습니까?”

“없어요. 오빠랑 같이 와서 이만 갈게요.”

그를 피해서 지나가려는데 그는 다시 몸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오늘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었던 건가요? 말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고칠 행동 없어요. 그러니 비켜요.”

“율리아.”

“그냥…… 돌아가고 싶어서 그래요. 그러니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저 네가 여주에게 관심이 생긴다 하더라도 내게는 간섭할 권한은 없는데.

네가 여주에게 집착한다면 그게 곧 운명이고, 원작의 스토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불과할 뿐인데.

왜 심장이 아프지? 왜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지는 걸까.

아…… 원작대로 흘러가면 나와 내 가족들이 죽기 때문에 심장이 아릿한 걸 거야.

“율리아. 제가 당신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까.”

“아뇨.”

“제가 당신을 불안하게 했군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애초에 당신을 불안하게 하면 안 됐는데.”

체스터는 내 뺨에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 밑을 천천히 쓸었다.

“……뭐 하는 거예요?”

“눈가가 붉어서요. 당신이 어떠한 이유로든 울지 않길 원합니다.”

“그냥…… 친구가 우는 모습이 저랑 비슷해서요.”

엄마의 장례식에서 홀로 남겨진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차마 아빠와 오빠에게 누가 될까 봐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잘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혼자 울었던 모습과 비슷해서.

목 놓아 울지 못하던 모습이 꼭 외로워 보였다.

나도 외로웠으니까. 누군가 안아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옆에 누군가 있어 주기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족을 잃는다는 건 반복되더라도 적응할 수 없는 슬픔이니까.

“무엇보다…… 우는 모습이 외로워 보여서요.”

“율리아, 저는 당신을 외롭게 두지 않을 겁니다.”

그는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 쏙 안기자 그의 따뜻한 체온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당신이 슬퍼할 일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체스터.”

“당신은 웃는 모습이 가장 잘 어울리니까요. 늘 당신은 웃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안에 불안하던 무언가가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걸까.

무의식적으로 그 꿈에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저 꿈은 꿈일 뿐인데, 꿈을 꿈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렇게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는데.

무엇보다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처음으로 다시 확신하게 해준 사람인데.

원작대로 흘렀다면 체스터는 지금 나를 껴안고 있는 게 아니라 여주인 세실의 옆에 있어야겠지.

슬픔에 젖은 세실을 위로하고, 자신도 그 아픔을 이해한다는 말을 했겠지.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원작과는 달랐다.

원작대로 세실의 부친은 세상을 떠났지만 원작과는 다르게 체스터는 내 옆에 있었다.

“……체스터, 당신은 제가 웃으면 좋겠어요?”

“네. 슬퍼하는 모습을, 지금처럼 눈가가 붉은 모습을 하게 되는 일은 겪지 않기를 바라니까요.”

나를 끌어안고 있던 체스터를 마주 안았다. 그는 딱히 당황하지 않은 채로, 나를 마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여주는 그의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저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아요.”

“네.”

“체스터…… 저는 사랑 받고 싶어요.”

“당신의 가족들도, 그리고 저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절대 배신하면 안 돼요. 저를 사랑한다고 하는 그 말이…… 거짓말이면 안 돼요.”

원작의 흐름은 이제 벗어났다고 치부해도 될까.

아주 사소해도 괜찮았다. 그저 체스터가 여주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행동만으로 황족의 엔딩은 변했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이번 생에는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수만 있다면 나 하나 정도는 희생되어도…….

“이런 말이 거짓말일 리가 없잖아요, 율리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다정했다.

이 온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나 따뜻한 그인데, 왜 꿈속의 그가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는 건지.

그 꿈이 나를 계속 괴롭혔다.

나를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드는 꿈과 원작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해 벌어지는 현재 상황들.

“체스터, 배신…… 하지 마요.”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귀를 그의 심장이 있는 부분에 가져다 대었다.

체스터의 심장 소리를 들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의 심장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쿵쿵거리는 조금은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

나를 향한 떨림에서 시작된 건지. 아니면 초조함에서 비롯된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이 빠른 심장 박동 소리를 나를 향한 마음이라고 믿고 싶어, 체스터.

“저를…… 떠나지 마요.”

“그러겠습니다. 당신이 떠나라 해도, 당신의 곁에 있겠습니다.”

내 마음은 대체 어떤 걸까. 나도 나를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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