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체스터는 내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쓰러진 이후 사람이 많은 곳이 아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만났다.
물론 으슥한 그런 곳이 아니라, 아름답지만 사람이 없는 그런 곳. 혹은 카페.
“율리아. 당신과 하루라도 빨리 결혼하고 싶습니다.”
매일 그와 만날 때마다 그는 내게 달콤한 사랑을 속삭였지만, 마음 한 칸에는 불안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이 찝찝함. 딱히 물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본능이 불안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원작의 스토리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결정적으로 체스터가 여주에게 집착하게 된 계기는 여주 부친의 죽음에서 그는 여주에게 자신의 상황과 닮았다고 했다.
서로 같은 아픔을 겪었으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저랑 빨리 결혼하고 싶어요?”
“네. 매일 눈을 뜨면 당신이 제 옆에서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요.”
“…….”
“저 열심히 참고 있는데.”
뭐…… 뭐를 참고 있어?
그의 깜짝 발언에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체스터는 손을 뻗어 내 아랫입술을 손끝으로 건드렸다.
사람 한 명을 홀릴 것만 같은 웃음을 짓고서 나직하게 속삭였다.
“당신은 모릅니다. 제가 얼마나 열심히 참고 있는 건지. 제 욕심이 어디까지인지.”
“체스터. 우리 결혼은…… 오빠가 결혼하고 난 후에 해요.”
“…….”
당연히 괜찮다고, 기다릴 수 있다는 대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는 갑자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깊은 상념에 빠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체스터?”
“아…… 잠시 고민 좀 하느라.”
“아니, 고민을 왜 해요!”
고민할 게 뭐가 있다고! 고민을 해?
“제가 얼마나 더 참아야 될지 계산하는 중이었습니다.”
“아니! 왜 그런 걸 또 계산해요?”
“중요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이 결혼하려면…….”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 생에는 결혼을 할지부터가 의문입니다.”
“어…….”
“저는 하루라도 빠르게 당신과 결혼해서, 당신의 모든 시간을 독점하고 싶은데.”
내 아랫입술을 건드리던 그의 손이 내 목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당신은 저랑 결혼하려는 걸 미루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착각이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단지…… 오빠가 결혼을 안 했는데 제가 먼저 결혼하기도 좀 그렇잖아요.”
“그게 문제입니까?”
“네?”
“그럼 형님께서 결혼만 하시면 저와의 결혼을 앞당겨주시겠습니까?”
그는 목덜미에서 손을 떼고는 내 왼손을 조심스럽게 손에 쥐었다.
“어…… 으음, 체스터.”
“싫습니까…….”
“아니! 절대로 싫은 건 아니에요!”
“율리아. 그러면 형님께서 결혼하면 빠른 시일 내에 당신과 결혼할 수 있는 겁니까?”
“어…… 그렇죠?”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뭔가 되게 꿍꿍이가 가득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체스터.”
“네?”
“이상한 짓 하지 마세요.”
“제가 이상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요.”
“우리 오빠 건들지 마요!”
왜 대답이 없어? 진짜 너 우리 오빠 건들려고 했던 거야?
“그저 형님이 결혼을 빨리 하도록 독촉을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율리아.”
“…….”
“제가 생각보다 여린 사람이라 상처받습니다.”
거짓말. 전혀 여리게 보이지 않는데. 그리고 내 표정이 어때서!
그의 손에 잡혀 있는 내 손을 슬쩍 빼냈다. 포크를 다시 들고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입에 달콤한 맛이 퍼지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율리아, 맛있습니까?”
“……네. 맛있어요.”
체스터는 나른하게 웃었다. 그리고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나를 보니까 왠지 심장 박동이 더 빨라졌다는 착각이 일렁였다.
설마 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진 않았겠지?
“왜 그렇게 웃어요?”
“당신이 너무 예뻐서요.”
화악-
얼굴이 뜨거워졌다. 팔딱대며 날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황급히 놓여 있는 케이크를 입 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먹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달았던 케이크에서는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랑스럽고.”
“콜록콜록!”
갑작스러운 그의 발언에 먹고 있던 케이크가 목구멍에 걸렸다.
내가 컥컥대자 체스터는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아……. 진짜 수치스러웠다.
“율리아, 괜찮습니까?”
“읏…… 이제는 괜찮아요.”
괜찮긴 괜찮지만, 이제는 수치스러워서 죽고 싶었다.
이런 나와는 전혀 다르게 체스터는 웃고 있었다.
“왜 웃어요?”
“귀여워서요.”
“체스터!”
“진짜…… 잡아먹고 싶게.”
그의 눈빛에서 위험이 읽혔다. 몸이 저절로 굳었다.
“걱정 마세요. 당장은 안 잡아먹습니다.”
손으로 그의 눈을 덮었다.
“그럼 그 눈빛부터 바꾸고서 말하면 안 되겠어요?”
“율리아.”
“그런 눈빛으로 보면 전혀 못 믿겠거든요!”
근데 왜 이 남자는 눈을 가려도 잘생긴 거야? 심장 위험하게!
“저를 못 믿겠습니까?”
“물론……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약속…… 지킬 거죠?”
“네.”
그의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흠흠…… 더 늦어지기 전에 이만 집에 갈게요.”
“헤어지기 싫습니다.”
“하지만…….”
“어서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매일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남자가 진짜!
그렇게 말하면서 이런 멜로 눈빛에 상냥하게 웃고 있으면 어떻게 심장이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진짜 없던 마음도 생기게 하는 얼굴이었다.
이러니 소설 속 율리아도 이 얼굴에 껌뻑 죽었던 거겠지.
아니, 잠시만…… 애초에 얼굴만 보고 첫눈에 반한 게 맞나?
* * *
체스터와의 데이트 이후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급작스럽게 오빠의 결혼 상대가 정해졌다.
뭔가 쎄한 느낌이 들지만 결혼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서 한걸음에 오빠의 집무실로 향했다.
“오빠!”
“율리아?”
“오빠, 결혼한다면서! 누구랑 결혼해?”
“아…… 그게 벌써 네 귀에도 들어갔니?”
“뭐야! 나한테는 숨기려고 했어?”
“아니, 네가 알게 됐을 정도면…… 전부 다 안다는 소리니까.”
내…… 내가 그렇게 둔하고 눈치 없는 사람이었나?
“그래서 오빠랑 결혼할 사람이 누군데!”
“네 친구.”
“내 친구?”
“응.”
내 친구는 세실 한 명뿐인데.
“세실 클로이?”
“응.”
“뭐? 진짜?”
“음…… 율리아,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왜? 왜 내 친구랑 결혼하는데?”
이유가 궁금했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야?”
“그런 이유가 크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는 블레어 공작 가문에 약하니까.”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남주의 집안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아직은 더 강했다.
그렇기에 블레어 가문과 다른 계파인 가문의 영애와 결혼해 견제를 통해 균형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오빠 또래의 공녀가 없지만, 황태자비의 자리라면 최소 후작가 영애 이상은 되어야 하니 그 조건에 맞는 영애는 아마 세실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여주라는 중요한 역할인 만큼 사교계의 중심과 다름없었으니까.
“……난 좋아!”
당황하긴 했지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정말 세실이 오빠와 결혼한다면?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의 엔딩은 완전히 뒤바뀌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렇다면 나와 오빠의 결말도 변하는 건가?
나도, 오빠도 그리고 아빠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엔딩이 되는 거야?
“뭐……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만.”
“근데 진짜 세실이랑 결혼해?”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
“아냐! 나는 오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래. 아쉽네, 네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면 안 했을 텐데.”
“치…… 내가 하지 말라고 해서 진짜 안 할 거야?”
물론 소설 속에서도 오빠는 정말 결혼하지 않았지만.
“응. 네가 하지 말라면 안 해, 율리아.”
어쩌면 소설에서는 율리아가 오빠한테 결혼을 하지 말라고 떼를 썼던 걸까.
하지만 정말 오빠와 세실이 결혼한다면 오빠는 나와 함께 죽는 엑스트라가 아닌, 남주가 되는 건가?
또다시 그 꿈에서 나왔던 장면이 재생됐다. 그와 동시에 머리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윽!”
“율리아?”
마치 기억이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에 적히지 않은 여주가 아닌 엑스트라인 율리아의 경험.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내게 이런 기억들을 보여 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게 그런 끔찍한 일들을 알려주는 이유가 뭔지.
내가 겪을 미래라고 암시하는 걸까. 아니면 그런 미래를 겪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을 쳐보라는 걸까.
“율리아! 괜찮은 거야? 황궁의! 황궁의!”
“아니야……. 나 괜찮으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머니도 늘 괜찮다고 했는데……!”
오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 오빠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도 내 앞에서 엄마에 대한 말을 꺼내는 걸 불편해하는 모습.
이제 나는 벗어났는데. 그 과거를 떨쳐냈는데, 오빠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빠는 나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율리아.”
“오빠. 나 숨 막혀!”
“아……. 미안.”
“괜찮아. 그러니까 괜히 오버 하지 마.”
오빠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정말 나보다 몸집도 크고 나이도 먹었으면서 이럴 때는 아이가 따로 없었다.
마치 엄마가 죽고 난 이후의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모습.
“오빠. 나는 아프지 않아. 아주 건강하다고.”
“응…….”
“나는 절대로 쉽게 죽지 않아.”
“응, 율리아. 너만큼은 절대로…… 떠나면 안 돼.”
“알아. 나는 아빠도, 오빠도 떠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오빠도, 아빠도 나를 떠나면 안 돼.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꿈처럼 나를 위해 희생하지 않길 원해. 모두가 살아서 행복하길 원하는데.
꿈 내용을 무시하기에는 너무 진짜 같아서.
“그러니 율리아, 아프면 꼭 말해야 해.”
“응. 알겠어.”
“아프지 마…….”
제발. 우리의 결말이 내가 기억하는 그 책의 내용과는 달라지면 좋겠어.
내 소중한 가족들이 죽지 않고, 나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어.
내가 원하는 건 내 소중한 가족들의 안녕인데. 이게 욕심이야? 이 정도는 크게 바라는 것도 아니잖아.
그저 죽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우리가 살아 있는 게 죄라면…… 나는 기꺼이 죄를 저지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