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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32화 (32/141)

#32화

황성으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약혼식을 준비했다.

지극히 평범한…… 거는 아니었지만, 규모가 대규모라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굳이 특별한 걸 뽑자면 약혼 상대 정도?

내 약혼자가 모든 귀족가에서 사위로 삼고 싶어 안달인 그 유명한 지크베르트 공작이니까.

이제 일등 신랑감으로 남은 건 블레어 소공작이려나.

약혼이라는 게 거창할 필요는 없지만, 상대가 상대고 내 지위가 지위인 만큼 보여 주기 식으로 대규모로 한다는 걸 알았다.

무엇보다도 황태자인 오빠가 아직 황태자비를 맞이하지 않았다는 것도 작용을 했다.

하지만 규모가 예상보다 더 커진 이유는 내가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기에 아빠의 걱정에서 비롯되었단 것을 알았다.

“아빠.”

“우리 딸이…… 크흡, 벌써…….”

“누가 보면 결혼하는 줄 알겠어요. 그냥 약혼식이잖아요.”

“우리 딸이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이 아빠랑 같이 살 거라고 했던 적이…….”

그렇게 말을 하면 딱히 할 말이 없긴 했다.

아빠는 딸의 결혼식을 보는 사람처럼 슬퍼 보였지만, 오빠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오빠. 내가 먼저 약혼해서 별로야?”

“아니.”

“그럼 왜 그런 표정 짓고 있어? 부러우면 오빠나 빨리 결혼해!”

결혼할 때 됐잖아. 계속 황태자비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러다가 동생이 먼저 결혼하게 생겼는데!

“율리아. 네가 결혼 전에 파혼을 원한다면 언제든 파혼할 수 있게 도와줄게.”

“……말이라도 고마워.”

의외의 말에 놀랐다. 하지만 왠지 오빠의 모습이 그 꿈속에서 보았던 오빠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꿈속의 오빠도 나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으니까.

“만약 네가 결혼하고 난 후에 이혼을 바란다면 말해. 내가 최선을 다해 너를 그곳에서 빼내 줄 테니까.”

“에이, 아직 결혼도 안 했잖아. 그런 걱정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오빠가 도와줘야 해?”

“그래. 당연하지.”

겨우 약혼식을 하는 건데. 아빠도, 오빠도 내가 무슨 영영 황성을 떠나서 지낼 사람처럼 대했다.

고작 약혼식만으로도 이런 반응을 보이는데, 정말 결혼할 때는 얼마나 더한 반응을 보일지 무서웠다.

내가 결혼할 때면 아빠는 펑펑 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결혼할 때가 심히 걱정이 됐다.

“……지금이 좋아.”

모두에게 사랑받는 기분이 드는 지금이 좋았다.

그 애정의 방향이 어떠하든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방향으로든 나를 사랑하는 게 중요한 거지.

아빠의 죄책감이 나를 향한 사랑이라면 존재해야 하고,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나를 향하는 오빠의 애정 조건이라면 필요했다.

다만 체스터는 정말 아무런 조건도, 다른 감정도 없이 오로지 나라는 사람을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바라보는 게 진실일까.

엄마가 떠난 이후로, 조건 없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오빠. 조금 늦게 말하는 것 같지만, 나…… 결혼을 전제로 하는 연애해.”

오빠는 내 말을 듣고는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 뭐라고?”

“나,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연애한다고.”

“……연애해서 좋아?”

“솔직히 말하면…… 좋아. 일단 잘생기긴 잘생겼고, 생각보다 잘해줘서.”

“네가 좋으면 됐지. 그래도 파혼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알겠어, 오빠. 그럴 일은 없는 게 좋겠지만.”

오빠는 왠지 파혼을 원하는 것 같지만. 내 착각이겠지?

옆에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율리아, 곧 식이 시작되겠구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그래. 그래도 이 아빠는 네가 원한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줄 거란다.”

“아빠. 그럼 일단 눈물부터 닦고 그렇게 말하면 안 돼요?”

“아…… 미안하구나. 주책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러는구나…….”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평온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나는 이 평온을 지키고 싶었다. 악몽 속의 비극적인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빠는 그만 울어요. 그리고 이제 가요! 하나뿐인 황녀의 약혼식이잖아요. 아무리 주인공이라지만 너무 늦으면 안 되죠.”

“그래야지.”

아빠와 오빠의 팔을 한쪽씩 붙잡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이제는 본식이 있으니까. 나를 기다리고 있을 체스터를 볼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어떤 옷을 입고 있을지, 아주 많이 궁금했다.

본식이 시작하기 전 가족들과 헤어졌다. 하지만 본식의 입구에 도착하자 체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스터!”

칠흑처럼 까만 머리카락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한쪽만 넘겼고, 그의 핏빛 눈동자에는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입술에는 부드러운 호선이 그어져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늘 어두운 옷을 주로 입었지만, 오늘만큼은 복장에 흰색이 많이 섞여 있었다.

그런 그의 품에 뛰어가 안기고 싶었지만 식이 시작도 하기 전에 옷이 엉망이 되는 걸 원치 않아,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율리아.”

내가 가까이 다가오자 체스터는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를 보며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 위에 살포시 내 손을 얹었다.

“아마 밖에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네. 당신이 걱정됩니다. 또다시 쓰러질까 봐, 두렵습니다.”

꿈속의 그와는 전혀 달라. 이렇게나 상냥하고 무엇보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인데 원작처럼 나와 내 가족들을 죽일 리가 없잖아.

체스터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의 행동은 경건하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겉으로는 금욕적으로 생겼으면서 그의 속내는 얼마나 금욕적이지 못한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약혼식이 끝나면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율리아가 제 것이라는 걸 알겠죠.”

“좋아요?”

“네, 무척 기쁩니다. 당신이 제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게 된다는 것이.”

지금은 늑대라는 느낌보다는 커다란 개 같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율리아. 만약 사람이 많아서 힘들다면…… 제게 기대도 좋아요.”

“걱정은 고맙지만 전과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러니 이제 가요.”

내 말에 체스터는 피식 웃더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환한 빛과 함께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머리가 아프다거나 몸이 굳지는 않았다.

* * *

약혼식이 끝난 후 오빠의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누워 탁자에 놓인 청포도를 우물우물 먹었다.

오빠는 옆 소파에 앉아서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뭐, 대충 기사의 내용은 알고 있었다.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과 율리아 베아트리스 황녀의 약혼식이 있었다는 내용이 실려 있겠지.

꽤나 자극적인 요소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려 성년이 될 때까지 공식 석상에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황녀와, 어릴 적부터 전장에 뛰어들어 승리를 거머쥔 전쟁 영웅으로 불리는 지크베르트 공작의 약혼.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한 내용이었다. 제국민들이 열광하는 이유를 이해했다.

“가관이네.”

오빠는 신문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나는 이해하는데, 오빠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내 약혼이 마음에 차지 않는 거거나.

“오빠는 내 약혼이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좋다면…… 아니, 내가 애초에 네게 간섭할 권한은 없지만…….”

“전쟁 영웅과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최고의 그림이잖아?”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뭐가?”

“지크베르트 공작. 아니, 사실 네가 누구랑 약혼했든 마음에 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포도알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상큼하고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가득 퍼지자 기분이 좋았다.

오빠가 저러는 이유를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내가 늘 결혼하지 않고, 아빠랑 오빠랑 함께 살겠다고 노래를 불렀으니까.

아마도 그 말을 지키지 못했으니 배신감을 느끼는 거겠지.

“오빠도 이제 결혼 해야지. 제국의 황태자가 결혼 적령기도 지났는데, 황태자비도 없다는 게 말이 돼?”

“……율리아.”

“내가 말했잖아. 나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연애한다고.”

“……네가 믿을 사람은 나와 아버지뿐이야. 너를 절대적으로 믿고, 신뢰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오빠, 진정 좀 해.”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빠는 나를 걱정할 게 아니라, 오빠부터 걱정해야지. 우리 황실의 대를 오빠한테서 끊을 거야?”

“……율리아.”

“만약 내가 결혼을 안 한다고 했다면, 우리 황가의 대는?”

“…….”

“이제 오빠도 결혼 해야지.”

“율리아. 너는 내가 결혼 하면 좋겠니?”

“해야지. 오빠는…… 제국의 황태자잖아.”

그리고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물론! 약혼은 내가 먼저 하긴 했지만…… 결혼은 그래도 오빠가 먼저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네가 그렇게 독촉한다면…… 해야지.”

시간을 확인했다. 곧 나갈 준비를 해야 했다.

“오빠. 나 이제 지크베르트 공작 만나러 가야 해.”

“……율리아, 너는 자그마치 20년을 함께한 이 오빠보다 지크베르트 공작이 좋니?”

윽! 저렇게 말을 하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네가 기다리는 그 사람이 나타나도, 지크베르트 공작과 결혼을 강행할 거니?”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잖아. 그리고 지크베르트 공작이 나한테 사랑한다고 했어.”

“믿지 마. 남자는 다 늑대야.”

오빠의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어 몸이 흠칫했다.

역시 절대로 내가 체스터와 몸부터 섞은 사이라는 사실을 들키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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