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그를 맞닥뜨린 순간 온몸이 굳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그의 얼굴에는 검붉은 핏물들이 진득하게 묻어나 있었다.
섬뜩함에 몸이 두려움으로 물들며 떨렸다.
아마도 저 피는 다쳐서 생긴 상처가 아니라, 그가 죽인 누군가의 피가 튀겨 묻은 걸 테니까.
“율리아!”
상념에 잠긴 내 정신과 굳어버린 몸을 깨운 건 오빠의 외침이었다.
오빠는 후드를 벗어 던졌다. 황족의 상징인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빼냈다.
하지만 오빠가 모습을 드러내고 칼을 빼 들었다는 건, 죽음을 각오하겠다는 뜻이었다.
“오빠!”
“어서 가!”
오빠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았다. 손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사라졌다.
“하지만……!”
“길을 터줄 테니까. 그대로 달려.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뛰어.”
오빠가 쥐고 있는 검에서 빛이 일렁였다. 그대로 휘두르자 동시에 검기가 터져 나왔다.
검기의 흔적이 남은 길로 몸을 틀었다.
“율리아. 반드시 살아남아. 미안해……. 이게 아버지와 내가 너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뒤에서 들리는 오빠의 목소리. 하지만 살아남으라는 오빠의 말이 떠올라서 달렸다.
등 뒤에서는 철과 철의 마찰음이 들렸다. 그리고 무언가가 잘려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차마 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앞만을 보고 달렸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다리가 휘청거리고 몸이 비틀거려도, 몸이 부서질 듯 아파도, 폐가 찢어질 듯 고통스러워도 달렸다.
울면 안 되는데, 두 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와 뺨을 적셨다.
하필 오늘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고 있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온도에 뺨을 적시는 눈물도 서서히 얼어갔다.
황성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개구멍. 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 오빠…… 미안해.”
내게 살아남으라고 했던 그 말. 나 지키지 못할 것 같아.
황성을 빠져나오자 이미 이조차도 예상을 했다는 듯 눈앞에 황실 소속의 제복이 아닌 낯선 제복을 입고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검조차 쓰지 못하는 이 나약한 몸으로 어떻게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오빠, 아빠, 정말 미안해. 나 하나라도 살길 원했을 텐데, 그 소원을 이루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당연하게도 기사들에 의해 양팔이 붙잡힌 채로 어디론가 질질 끌려갔다.
사람을 대하는 손길이 아니었다. 죄인을 데려가는 것도 아닌,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기분이었다.
딱히 뭐라 소리칠 힘도 남지 않았다. 그저 그들이 나를 끌고 가는 곳으로 힘없이 끌려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도망쳐 나온 황성으로 적의 손에 붙잡힌 채 도로 끌려갔다.
당연히 대전으로 끌려갈 줄 알았는데, 계단을 올라갔다. 가장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기사들은 본인의 할 일들이 끝났다는 듯 내 팔을 놓았다. 그러자 힘이 없는 몸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대리석에는 굳은 피들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이곳이 학살의 현장이었다.
“황녀 전하.”
오늘 아침까지만 하더라도 매일 듣길 원했던 목소리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들어도 질리지 않을 거라고 찬양했던.
하지만 지금은 가장 스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열린 창문으로 바깥을 바라보던 그는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짙게 밴 피 냄새가 후각을 괴롭혔다.
대각선의 방향에는 나와 같은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이 검붉은 피와 뒤엉켜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차마 제대로 확인할 용기가 없었다.
“왜…… 대체 왜?”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평범했잖아.
두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나왔다. 실내였기에 얼어붙지 않고 뺨을 타고 흘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였기에 흐릿했지만 하나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체스터!”
새까만 머리카락은 굳은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하얀 피부는 검붉은 피가 튀겨 있었다.
그의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까.
유모는 무사할까? 제발 유모만이라도 무사하길 원했다.
그 순간 내가 끌려 들어온 문에서 익숙한 누군가가 기사들의 손에 잡힌 채로 끌려 들어왔다.
“각하.”
기사들에게 잡혀 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유모였다. 심지어 피투성이였고, 눈도 제대로 뜨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유모!”
왜 도망치지 못한 거야? 유모는 도망치면 살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잡혀 온 거야?
그는 검을 뽑고서 천천히 움직였다. 나도 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칼날에 목이 베여 죽는 걸까.
공포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내 옆을 지나쳤다.
“아…… 안 돼!”
저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예상이 됐다. 그래서 다급하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움직였다.
그대로 손을 뻗어 그의 망토를 붙잡았다.
하지만 조금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는 무감정한 눈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망토를 붙잡은 내 손을 쳐냈다.
몸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검은 단칼에 유모의 목을 베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가만히 앉아 나는 그저 두 눈에 새겨 넣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리고 덜덜 떨며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우욱……!”
구역질이 났다.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나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없는 무력하고 허울뿐인 황녀였지만, 반드시 죽어야 하는 존재였다.
그의 칼에 흐르는 시뻘건 피가 차가운 대리석 위로 떨어졌다.
이제 내가 죽어야 한다면.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죽기 전에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왜 내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들이 전부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는지.
“왜…… 왜 반역을 일으킨 거야!”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의해.
* * *
“허억……!”
번쩍하고 눈이 떠졌다. 쿵쿵거리며 두려움에 질려 있는 심장 소리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비정상적으로 팔딱대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장 부근을 부여잡은 채, 심호흡을 했다.
“하아……. 하…….”
대체 왜 나는 이런 꿈을 꾸는 거지?
소설의 내용을 꿈으로 꾸는 거라기에는 소설 속에는 어떻게 체스터가 반역을 일으키고 율리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서술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개꿈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렇다고 해서 소설 속 율리아의 경험이라기보다는 마치 내가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을 꿈으로 끄집어냈다는 것에 가까웠다.
아니야. 괜한 생각이겠지. 나는 전생에 죽기 전까지 한국에서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왔잖아.
그래! 그저 이건 꿈이 내게 하는 경고였다.
체스터를 믿지 말라고. 믿으면 내 엔딩은 죽음이라고 암시하는 거였다.
“정말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여기는 책 속이잖아! 그리고 이미 흐름은 바뀌었잖아.
분명 책 속에서는 율리아가 체스터에게 집착했고, 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율리아를 극도로 싫어했잖아.
이미 그와의 첫 만남부터 틀어졌잖아.
하지만…… 정말 만약에 지금도 체스터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뒤엉키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체스터였다.
하지만 왜 몸이 달달거리며 떨리는 걸까.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쿵거리며 날뛰기 시작했다.
어디서 비롯된 두려움이지?
“율리아, 몸은 괜찮습니까?”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피가 차게 식으며 몸이 굳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고 검은 장갑은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서늘하게 나를 응시하던 핏빛 눈동자.
저 손으로 내 가족들과 유모까지 전부 도륙했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섬뜩했다. 손이 바들바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침대 구석으로 뒷걸음질 쳤다.
착시라는 걸 알면서도 이 떨림을 진정시킬 수는 없었다. 그가 걸어온 곳에서부터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어디 아픈 곳은…….”
그는 말을 하다 멈추고 더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계속되는 환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체스터는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이었고, 얼굴은 무엇 하나 묻은 것 없이 깨끗했다.
그냥 내가 헛것을 본 거였다.
그제야 안심이 됐다. 덜덜 떨리던 몸도 차츰 진정을 되찾았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가만히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체스터.”
그래. 지금 나를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보는 이게 진짜야.
그러니까…… 꿈은 꿈일 뿐이야. 그저 소설 속의 내용이잖아. 그러니 불안해할 이유가 없어.
체스터는 내 허리를 꽉 끌어당겨 안고는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어깨의 맨살을 간지럽혔다.
“율리아. 걱정했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괜히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서…….”
“체스터 탓이 아니에요.”
그래. 내가 아는 체스터는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야.
그런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보고, 무감정한 표정을 하고 있고, 눈앞에서 내 소중한 사람들을 도륙한 소설 속 체스터가 아니야.
그리고 소설 속 체스터와는 다르게 내가 아는 체스터는 나를 사랑한다고 하잖아.
“어서 귀환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지 않습니다.”
체스터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의 품이 너무나도 따뜻해서 그 온기를 좀 더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그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이렇게 나를 향해 심장이 뛰고 있는데 사랑한다는 말이 거짓일 리가 없잖아.
마지막으로 그를 믿기로 했다.
나는 불길하기 짝이 없는 생생한 악몽이 아니라 현실의 따스한 그를 신뢰하기로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