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햇살이 정신을 깨웠다. 물론 아직은 잠에 취해 있는 중이라 눈은 뜨지 않았다.
“으음…….”
뺨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몸에서 느껴지는 푹신함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분명 이렇게 포근해서는 안 되는데. 흙바닥이어야만 하는데 왜 꼭 침대 위에서 자고 있는 착각이 드는 건지.
그 생각이 들자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어……?”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처음 보는 장소였다. 옆에 체스터도 없었고 방 안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언제 옷을 갈아입힌 건지. 분명 셔츠 한 장을 달랑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슈미즈를 입고 있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씻기라도 한 걸까? 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고 찝찝함도 없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기 위해 침대에서 내려와 문고리를 내리는 순간이었다. 방문이 내가 밀기도 전에 열렸다.
“체스터?”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 아마도? 아픈 곳은 없어요.”
“앉아 있어요. 식사는 이쪽으로 가지고 오라 하겠습니다.”
그는 문을 도로 닫았다. 낯선 방에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여기가 어딘지 알기 위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살랑거리는 바람이 열린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바깥 역시도 처음 보는 낯선 곳이었다.
“진짜 여긴 어디야?”
“궁금하면 식사 후에 구경이라도 하시겠습니까?”
언제 들어왔는지 바로 뒤에서 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침 먹어요. 다 먹으면 나가죠.”
뒤를 돌아보니 테이블에 접시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정말 소리 없이 언제 방에 들어온 건지.
그가 빼주는 의자에 앉아서 식기를 들었다.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그냥 입에 넣고 씹어 삼켰다.
어서 접시를 다 비워야 체스터가 데리고 나가줄 테니까.
“다 먹었어요!”
“흐음…… 그대로 나갈 생각입니까?”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네. 이건 예비 남편의 입장에서 그대로 나가는 걸 허락할 수 없습니다.”
“네?”
“잠옷 차림은 안 됩니다.”
“아…… 맞다!”
지금 잠옷을 입고 있었지! 잠시 깜빡했다.
“체스터, 제 옷은 누가 갈아입혔어요?”
“…….”
왜 대답이 없어? 게다가 시선까지 피했다.
“체스터?”
“굳이 알고 싶습니까?”
“혹시……?”
“예비 남편이기 이전에 우리 끝까지 다 했잖아요. 이제 와서 내외하는 것도 이상…….”
내가 그를 쏘아보며 뒷걸음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손에 당신을 맡기고 싶지 않았어요, 율리아.”
“……정말 그것뿐?”
“그렇다고 그냥 재울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깨우기에는 율리아가 깨우기 미안할 정도로 잘 잤어요.”
“…….”
“율리아…… 제발 저를 파렴치한으로 보는 눈빛은 거둬주세요.”
역시 체스터가 여러 의미로 제일 위험한 사람이었다.
“정말 씻기기만 하고, 옷만 갈아입혀서 눕혀준 것밖에 없어요.”
“으음…… 한동안 저와 거리 좀 유지해주세요.”
“율리아!”
“일단 나가게, 외출용 옷부터 가져다줘요.”
“…….”
“안 가져오면 손도 못 잡게 할 거예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의도치 않게 그를 협박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
체스터는 바로 방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런 협박이 통하는 만큼 의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 몸을 사랑하는 게 아닐까.
쓸데없는 의구심이겠지? 아니, 그래야만 해.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체스터는 화사한 연한 하늘색의 드레스를 들고 있었다.
“이거예요?”
그가 들고 있는 드레스를 빼앗아 이리저리 살펴봤다.
내가 평소 입는 드레스들도 노출이 거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거는 정말 조금의 노출도 허용하지 않았다.
일단 외출을 하려면 이 드레스로 갈아입기는 해야 해서 입으려는데 체스터는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체스터.”
“네.”
“왜 가만히 있어요?”
“그럼 제가 입혀 줄…….”
“나가요.”
“저희가 평범한 사이도 아니고 옷 정도는…….”
“당장 나가요.”
“율리아. 제가 입혀 줄…….”
“허튼수작 그만 부리고 나가요!”
어디서 수작을 부리려고! 옷은 금욕적으로 입었으면서 속내는 엉큼했다.
그를 문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아무리 내가 황녀로 살았다지만 정말 입는 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게 아니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직접 입었다.
그냥 그게 편했다. 이 드레스도 입는 방식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기에 혼자서 잘 입을 수 있었다.
“체스터!”
옷을 다 입자마자 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 다행히 체스터는 문 옆에서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꼭 지금은 주인을 기다리는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그의 품에 안겼다.
“이제 가요!”
“……좋습니까?”
“당연하죠! 20년 동안 칩거 생활을 해왔는데 당연한 거 아니에요?”
“좋아해서 다행입니다.”
“빨리 가요! 저는 여기가 어딘지 몰라서, 밖에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른단 말이에요!”
체스터는 옅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손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당겼다.
“안내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정말 다정한 연인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아! 맞다. 이미 나랑 체스터는 연인 사이였지? 잠시 깜빡했네. 이런 중요한 걸 잊어버리다니.
꼭 잡고 있는 내 손과 그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온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체스터가 내 연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손을 잡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바로 앞에 마차가 있었다. 체스터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율리아.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갈까요? 아니면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까요?”
“어…… 음, 별로 상관없어요. 하지만 굳이 선택하자면 이번에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보고 싶어요!”
“그렇습니까?”
체스터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이 한 마리의 고고한 늑대가 나른한 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잘생긴 얼굴은 심장에 해로웠다.
이성의 통제를 잃은 심장은 미친 듯이 팔딱팔딱거리며 뛰고 있었다.
“혼자 다녀온 여행이 더 재밌습니까?”
“적어도 사고는 없었어요. 그리고 혼자 다녀온 건 맞지만…… 호위도 많이 데려갔어요!”
“네. 많이 데려가야죠.”
“근데 아빠가 체스터랑 여행 다녀온다니까 혼자 여행 간다고 했을 때만큼 호위를 더 많이 붙이라는 소리를 안 했어요.”
아마도 체스터 한 명이면 그 많은 호위가 없어도 괜찮다는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보면 호위기사 100명보다 체스터 한 명이 더 위험했다.
호위기사는 나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지만 체스터는 나를 외부의 위험에서 지켜주긴 하겠지만 내부의 위험요소였다.
“제가 있으면 오히려 호위들이 걸리적거리죠.”
“……그 정도예요?”
“그래서 최소한만 데려온 겁니다. 어차피 제가 있는 이상 당신이 위험해져도 절대 다치지 않을 테니까요.”
어쩌면 세계관 최강은 남주가 아니라 체스터가 아닐까?
마차가 멈추자, 그가 먼저 내려서 내게 손을 뻗었다.
예전 같았다면 그냥 필요 없다며 혼자 내렸을 텐데. 지금은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은 생각보다 시끄러웠다.
고요한 곳에 주로 있다 보니 시끌벅적한 소리에 활력을 느끼려던 찰나, 갑자기 머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윽!”
“율리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 왔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왜 하필? 갑자기 머리가 왜 이렇게 아픈 건지. 그리고 왜 숨을 쉬는 법을 잊어서 제대로 된 호흡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건지.
체스터는 통증을 호소하는 나를 다급하게 안아 들었다.
아마도 의원을 찾아가려는 거겠지. 주치의가 함께 오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체스터…… 읏,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요…….”
“금방 의원에게 갈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내게 어둠이 찾아왔다.
* * *
오늘따라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하루라도 그를 보지 않으면 잠조차 오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상사병에 걸린 걸까.
밤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아질까 싶어 잠옷 위에 숄만 걸치고 테라스로 나갔다.
서늘한 밤바람이 몸을 스쳐 지나갔다.
“어…… 눈이 오네.”
손을 뻗어 확인해보니, 정확히는 눈과 비가 섞여서 내리고 있었다.
바깥 공기를 오래 쐬면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본능적으로 이질감을 느꼈다.
고요해야 할 황성이 묘하게 시끄러웠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소리. 낯선 비린내. 일렁이는 불빛. 숄을 붙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렸다.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유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급히 내게 외쳤다.
“황녀님! 어서 도망치셔야 합니다!”
“유모……?”
“여기서 태평하게 있을 시간이 없어요! 옷을 갈아입을 시간은 없으니 여기에 망토만 걸치세요. 그리고 무조건 도망치세요!”
유모는 내게 망토를 입히고 내 손목을 잡고서 어디론가 데려갔다.
도착한 곳에는 오빠가 있었다.
“오빠? 아빠는? 왜 나만?”
“율리아.”
오빠는 굳건한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아버지가 너만큼은 꼭 지키라고 하셨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쿠데타다.”
심장이 멈출 뻔했다.
“오빠…… 누가? 도대체 누가?”
“지크베르트 공작이 군사를 일으켰다. 황성 안에서부터 말을 타면 눈에 띌 테니, 황성 바깥에 말을 준비해 뒀어.”
“……오빠. 왜 그렇게 말을 해?”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가능하다면 너와 함께 도주하길 바라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오빠!”
“중간에 떨어질 수도 있고, 만약 나와 떨어지고서 황성을 빠져나갔다면 날 기다리지 말고 그냥 떠나.”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오빠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시간을 끄는 동안 최대한 거리를 벌려야 해.”
오빠의 손을 꼭 잡고서 불빛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으로 함께 뛰었다.
“율리아. 살아 있으면 언제든 다시 뒤바꿀 수 있어. 하지만 나와 아버지가 전부 죽었다면…… 복수는 꿈꾸지 말고 살아.”
“오빠…….”
“죽지 말고 살아줘. 그게…… 아버지의 유지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열심히 뛰었다.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았다. 오빠와 함께 살고 싶었다. 혼자는 싫었다. 황성에서만 무사히 빠져나간다면 오빠도 나도 살아남을 수 있겠지. 그래서 오빠의 손을 꽉 붙잡은 채로 달렸다.
하지만 그 희망은 이내 산산조각이 난 채로 흩어졌다.
쿵쿵거리는 시끄러운 발소리와 함성 소리. 날카로운 칼날이 움직이는 소리. 짓밟히며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여 귓가를 찔렀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저승사자 같은 남자가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어두운데도 불구하고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
매일 보고 싶었던 얼굴이 지금만큼은 반갑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