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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29화 (29/141)

#29화

체스터는 내 말에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 뺨에 입술을 짧게 맞췄다.

“안 잡아먹습니다, 율리아.”

“방금 잡아먹으려고 했잖아요.”

“오해입니다.”

“아닌데…….”

진짜 내가 안 막았으면 그대로 날 잡아먹으려고 했던 게 분명한데. 본인은 아니라고 하니까 더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직도 나를 빤히 보고 있는 그 눈빛이 음험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은 또 무섭도록 잘생겼고.

무엇보다도 체스터가 상의를 입고 있질 않아서 차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가 보이는 반대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일단 말을 돌렸다.

“체스터! 그래서 여기가 어디예요?”

“흐음…… 꽤나 일찍 물어보십니다.”

아니, 물어볼 틈을 주지 않았잖아! 일어나자마자 달래주더니, 다음에는 키스해도 되냐고 물어보고!

그리고 그대로 키스까지 실컷 했으면서! 물론 나도 좋았지만…….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래서 여기가 어딘데요?”

“동굴입니다.”

“어…… 그건 저도 알거든요! 여기가 동굴 안이라는 것 정도는!”

“당신이 너무 추워해서…… 떨어진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일단 옷이라도 말려야 될 것 같아서.”

“…….”

“마차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을 테니, 날이 밝으면 찾으러 올 겁니다.”

“네……?”

그러면 지금 여기서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늑대 같은 남자랑 하루를 보내야 된다는 뜻이야?

물론 산짐승이 습격할 거라는 걱정은 없지만, 체스터가 짐승인데?

오히려 산짐승이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봤던 모양이다.

“율리아.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념하겠습니다.”

“제가 뭘 생각한 줄 알고요!”

“흐응…… 예를 들면.”

체스터는 은근한 손길로 내 허벅지를 간지럽히듯 쓸어 올렸다.

“이런 거?”

그는 여상하게 웃었다. 이제야 체스터가 내게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체스터!”

“알겠습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건 하지 않을 테니 안심해도 됩니다, 율리아.”

“…….”

“진심입니다. 이번엔 믿어주세요”

아주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예전처럼 체스터가 싫지는 않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하긴 했지만 꿈과 현실은 다를 테니까.

원작의 율리아와 나는 다를 거야. 이미 원작 스토리도 어느 정도는 벗어났잖아.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어. 분명 불안해 할 것도 없는데.

시선을 내려서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율리아. 좀 늦었지만…… 반지는 어떻습니까?”

“네?”

체스터의 팔이 내 허리를 휘감은 상태로 그의 얼굴이 내 어깨에 닿아 화들짝 놀랐다.

“마음에 들면 좋겠습니다.”

“아…… 예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네요.”

슬쩍 어깨에 닿아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옅게 웃고 있는 얼굴이 무척이나 잘생겼다. 정말 잘생긴 것도 보통 잘생긴 게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던 사람의 심장조차도 떨리게 만들 정도로 잘난 얼굴이었다.

반지가 끼워진 손을 만지작거렸다.

“체스터. 정말 우리 예전에 본 적 없어요?”

“……아쉽지만 없습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세요.”

그는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하지만 애정이 실린 눈빛으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체스터는 내가 그에게서 과거의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사람은 잊어요. 그리고 오로지 저만 생각해요, 율리아.”

“…….”

“당신의 입에서 저를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 걸 바라지는 않겠습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더니 내 아랫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매만졌다.

“하지만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사랑하지 마세요.”

“왜요?”

“사랑하는 여자가 제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말하면 제정신을 유지할 남자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

“무엇보다도 저는 질투가 아주 심한 사람이라서요. 더군다나 사람 한 명 죽이는 건 일도 아니죠.”

체스터는 섬뜩한 말과 상반되는 다정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본다면 순진무구해 보이는 소년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농담입니다.”

“……진심 같았는데.”

“그리고 저는 파혼을 절대로 할 생각이 없습니다, 율리아.”

“……그 말 지켜요.”

“당연하죠.”

“배신하지 마요.”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랐다.

처음 본 순간부터 나를 사랑한 게 아니어도 괜찮아. 그저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모든 말들이 전부 거짓만 아니면 돼.

뒤늦게 사랑에 빠졌더라도 지금 나를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시기가 어찌 되었든 괜찮으니까.

시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진심이 중요했다.

“진심입니다. 그러니 당신한테 실망을 안겨드릴 일도 없겠죠.”

“……체스터.”

“네.”

왜 여기서 그가 차갑게 조소를 머금은 채로 내뱉었던 말이 떠오르는 건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왜 지금 여기서 떠올라서는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건지.

“……제가 마지막으로 당신을 믿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당신의 마음이 진심이면 좋겠어.

“이거는 약속해줘요.”

“무엇을요?”

“약속해줘요. 당신이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 파혼해요.”

“저희가 파혼할 일은 제가 죽지 않는 이상 없을 일이겠네요. 그러니 충분히 안심해도 됩니다.”

그의 말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체스터의 손을 꼭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았다. 낮은 체온이 아닌 높은 체온이라서 안심이 되었다.

“율리아. 저는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붙잡고 있던 내 손을 입가에 가져갔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습니다. 제 진심을 의심하지 말아요, 율리아.”

“정말…… 단 한 순간도.”

체스터는 내 손등 위에 도장을 찍듯 입을 맞췄다. 아니, 입술을 손등 위에 지분대며 살짝 웃는 눈으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얽혔다.

“저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어요?”

우리 아빠도, 우리 오빠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는데.

나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도, 혈연도 아닌 온전한 남이자, 타인인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고?

허무맹랑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만큼 고스란히 믿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속삭임이었다.

“네. 전쟁터에 있던 순간도, 오로지 당신만이 제 머릿속에 가득했습니다.”

“정말 제 생각으로 가득했어요?”

“하루라도 더 빨리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몸을 움직여 체스터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에 내 머리를 기댔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돌아가는 대로 약혼식을 치르고 싶습니다, 율리아.”

“좋아요. 돌아가면 약혼해요.”

마음이 편안해지자 잠이 솔솔 쏟아지면서 두 눈이 감겼다.

* * *

율리아는 그의 어깨를 베개 삼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체스터는 그런 율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그의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아마도 누워서 잠드는 게 더 편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율리아.”

그녀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떼어내고서는 귀 뒤로 넘겨주었다.

세상모르게 잠든 율리아의 모습은 날개만 달리지 않았을 뿐 천사가 따로 없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을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그는 바닥에 흐트러진 은빛 머리카락 한 줌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핏빛 눈동자에는 짙은 열망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정확히 체스터는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한 발 다가가면 두 발 멀어지고, 멈추면 한 발 멀어지고…… 정말 까다롭습니다.”

체스터는 손에 쥐고 있는 은빛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마치 지독한 갈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물 한 모금으로 갈라진 입 안을 축여, 달래는 행위였다.

“손에 들어온 줄 알았는데, 아주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빠져나가고, 어떻게 해야 당신을 붙잡아 둘 수 있을지.”

율리아는 무언가 불편한지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의 입가에는 짙은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은 마치 순수한 영혼을 탐내는 고혹적인 악마의 형상이었다.

“아프지 않게 당신의 날개를 꺾고, 눈과 귀를 전부 가리면 당신이 언제 제 곁을 떠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살지 않아도 될까요?”

바깥에서는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체스터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던 상황인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자신의 무릎에 눕힌 율리아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사람들의 발소리와 목소리가 가까워지길 천천히 기다릴 따름이었다.

“각하!”

“쉿. 황녀 전하께서 깨신다.”

소리를 낮추라 명령했다. 혹여 잠든 그녀가 깰까 봐 그의 목소리조차도 아주 작았다.

“황녀 전하는 내가 직접 데려가지. 커다란 담요 하나를 가져와.”

“예!”

“그리고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숙소를 잡아 놓도록. 영주성이라도 좋다.”

명령이 떨어지자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가장 먼저 담요를 가지고 와 체스터에게 건넸다.

그는 율리아의 몸을 담요로 감싸고는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빠르게 이동하기 위해 마차가 아닌 말을 선택했다. 그는 건네받은 상의를 입은 후 율리아를 소중히 품에 안은 채, 말을 몰았다.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며 무방비하게 품 안에 잠들어 있는 그녀를 보며 체스터는 입꼬리를 올렸다.

“율리아,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양의 탈을 써줄게.”

올라간 입꼬리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율리아가 깨어 있을 때 존재하던 다정함은 사라지고 음험하게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만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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