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원작에 있는 묘사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예전에 스치듯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 건지.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체스터만큼 잘생긴 얼굴을 스치듯 보았다면 기억에 분명히 남았을 텐데. 왜 제대로 기억이 나질 않는지.
그렇지만 아주 어렸을 때 보았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억이 흐려졌을 수도 있으니까.
“제가 본 은발은 당신 외에는 장인어른과 형님뿐입니다.”
이제는 저 호칭이 퍽 자연스러웠다.
뭐라고 할까 싶었지만, 어차피 약혼은 할 거고 결국엔 결혼까지 할 테니 그냥 두기로 했다.
“……어렸을 때 우리 본 적 진짜 없어요?”
내 기억을 온전히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묻는 거였다.
체스터가 그랬으니까. 무엇이든 물어보면 기꺼이 대답해주겠다고,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혹시, 라는 기대감은 체스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지울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라면 율리아가 저를 본 적이 없을 겁니다.”
“역시…….”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황성에 왔을 때는 작위를 폐하께 직접 하사받았을 때밖에 없습니다.”
“제가 착각했나 봐요.”
내 기억이 흐릿하니까. 아니, 사실은 체스터가 어렸을 때 봤던 그 아이라면 좋겠다고 내가 생각했으니까.
그냥 내 욕심이었다. 그저 착각에 불과했던 건데.
애초에 나는 누군가의 작위 계승식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아니, 어렸을 때는 성 밖으로 나가질 않았다.
딱 한 번 황성 밖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를 제외하면 황성 밖을 나간 적도 없었고 세실 외에는 외부의 내 또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율리아.”
“네?”
나를 부르는 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려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신의 모든 관심은 오로지 저만을 향하면 좋겠습니다.”
“……같이 있어 주잖아요.”
“그럼 둘이 있을 때만큼은 당신의 머릿속이 오로지 저로만 가득 차면 좋겠습니다.”
체스터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무슨 입을 맞추는 모습이 이토록 치명적으로 비치는지.
입을 맞추면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저 새빨간 눈동자는 고혹적인 악마를 연상시켰다.
이러다가는 정말 홀려 버릴 것만 같아서 다급하게 그의 손에서 내 손을 내뺐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도착했나 봅니다.”
체스터는 살짝 아쉽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서는 함께 온 사람들을 전부 물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치 잡으라는 것처럼.
“율리아.”
살짝 머뭇거렸지만 이내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그 덕에 쉽게 마차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땅에 발이 닿자, 내 손 아래 있던 그의 손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손가락을 끼웠다.
“……체스터?”
그의 행동이 당황스러워서 이름을 불렀지만, 오히려 그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꼭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율리아, 이거는 키스보다 전 단계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억이 흐릿했다. 키스만 하자고 했는지, 키스까지만 하자고 했는지.
내가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손을 잡는 건 싫으십니까?”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손잡는 건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손 정도는…… 허락할게요.”
내게 사랑한다고 말을 한 이후로 체스터는 무척이나 많이 웃었다.
그전에만 해도 이렇게 웃는 표정은 본 적이 없었는데,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인 이후부터는 확실히 자주 웃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체스터의 웃는 얼굴에서 내가 시선을 떼어낼 수 없는 거겠지.
절대로 핑계가 아니었다.
“제 얼굴을 보는 건 좋지만 주변도 보면 좋겠습니다, 율리아.”
그의 말에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이제야 너무 빤히 체스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으니까.
체스터의 말에 주위를 바라본 순간 믿을 수가 없어서 두 눈을 깜빡였다.
“……여기는?”
처음 보는 장소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이 내 시선을 앗아갔다.
풍경은 정말 감탄이 나올 정도로 예뻤지만 왜 몸에 소름이 쭈뼛 서는 건지.
그저 높이가 높아서 그런 걸까. 아니면 폭포 소리가 너무나도 커서 그런 걸까.
스산함과 알 수 없는 한기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체스터는 내가 추워하는 걸로 보였는지 입고 있던 겉옷을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율리아. 당신이 여행을 무척 좋아했다고 들어서 귀환하는 길에 이곳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체스터…….”
“매일 당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뒤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그 바람에 체스터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그의 온기는 고스란히 느껴졌다.
귓가에 감미롭게 들리는 체스터의 속삭임은 심장을 마구잡이로 간지럽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내가 체스터를 믿어도 될까.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 그가 나를 정말로 사랑해서 이러는 건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사랑하는 척하는 건지.
체스터가 하는 말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큼 망설임도 커져만 갔다.
“하루라도 빨리 당신을 보고 싶었습니다.”
“제가…… 왜 보고 싶었어요?”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혹시라도 나를 뒤에서 껴안고 있는 그에게도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초조했다.
무엇보다도 체스터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떨렸다.
지금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내 예상과 다른 표정의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 박동이 아까보다도 더 빨라졌다.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다정하게 악마가 유혹하는 것처럼 달콤한 저 속삭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체스터. 저를 사랑한다고 했죠?”
“네.”
“……제 어디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때 강한 바람이 불었고,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사르르 흐트러지며 나부꼈다.
나를 껴안고 있던 체스터의 팔에 힘이 실리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게 싫지 않았다.
“율리아. 당신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사랑합니다.”
“……저를 사랑하게 된 계기는요?”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나를 처음 본 그 순간부터라고?
하지만 내가 체스터와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마 그때 술에 취해서 필름이 끊겼으니까.
그래서 내가 어떤 말을 또는 행동을 했는지 전혀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다.
내가 아는 거라고는 그저 술에 취한 채로 체스터를 처음 만났지만, 그가 흑막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원나잇을 했다는 사실뿐.
이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전부였다.
“체스터…… 저는 체스터를 처음 본 날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지금껏 그의 얼굴을 보는 걸 무의식적으로 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속삭임에 그의 표정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강해졌다.
살짝 몸을 틀어 그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체스터의 입꼬리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마치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껴져서 다시 몸을 바르게 해서 그의 품 안에 안긴 채 풍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율리아.”
“……네?”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나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드리고 싶은 물건도…… 아니, 정확히는 당신이 꼭 받아주었으면 하는 물건입니다.”
“뭔데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머뭇거리는 걸까. 괜한 호기심만이 크기를 점점 부풀려갔다.
“율리아. 우리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고, 곧 약혼도 할 예정이지만.”
그건 나와 체스터 이외의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 그런 당연한 걸 왜 언급하는 건지.
나를 껴안고 있던 그의 팔이 풀어졌다. 그리고 뒤에 있던 그는 무언가를 꺼내고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체스터?”
그의 손에는 작은 상자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척 보기에도 정교하게 세공된 반지가 담겨 있었다.
반지의 중심에는 체스터의 눈동자를 연상시키는 핏빛의 루비가 박혀 있었다.
지금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도, 내게 한쪽 무릎을 굽힌 이유도, 이해가 되지 않아 어서 설명해보라는 의미를 담아 그를 바라보았다.
“결혼을 전제로 당신과 교제를 하고 싶습니다, 율리아.”
그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의 손이 내 왼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고는 상자에 담긴 반지를 빼냈다.
왼손 약지에 반지가 온전히 끼워지기 직전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체스터는 한없이 다정해 보이는 얼굴로, 무척이나 상냥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 연인이 되어주시겠습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그의 발언에 놀라 두 눈이 자연스럽게 깜빡거렸다.
연인이라는 다정한 말이 왜 이렇게 나와 그 사이에서는 어색하게 느껴지는 건지.
“……연인이요?”
“네, 율리아. 저는 당신의 연인이 되고 싶습니다.”
“저는…….”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고, 더는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질 않았다.
그의 눈을 마주치고 있었지만, 시선을 밑으로 내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체스터.”
“네.”
“저는…… 체스터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체스터…… 정말로 괜찮겠어요?”
“네. 제가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시선을 그의 얼굴 쪽으로 올리자,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정말 괜찮다면…… 좋아요.”
반지는 거짓말처럼 약지에 꼭 맞게 들어갔다. 그의 손을 보자, 그의 왼손에도 내게 끼워준 것과 한 쌍으로 보이는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는 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면서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의 피처럼 붉은 눈동자는 눈앞에 있는 먹잇감을 보고 입맛을 다시는 맹수 같은 눈빛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율리아, 싫으면 밀어내세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입술과 그의 입술이 맞물렸다.
손끝이 파들거리며 떨렸다. 이걸 어떻게 밀어낼 수 있을까. 정신을 쏙 빼놓는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데.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공기를 들이마시는 그 순간,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두 팔을 그의 목에 휘감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한참 동안이나 서로의 숨결이 오고 가서야 입술이 떨어질 수 있었다.
“하아…… 하…….”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체스터는 내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아직도 체스터는 부족함을 느끼는 것처럼, 짙은 열망이 서린 눈동자로 나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본능적으로 더 함께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걸 생각하니 부끄러웠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황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 도로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딱히 나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팔딱대며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는 도중, 마차가 덜컹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율리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와 밖에서 체스터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무엇인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서서히 푸른 하늘을 비춰가고 있었고 내 몸은 마차와 함께 기울어지고 있었으니까.
다급히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해봤지만 덜컹거리기만 했다. 마치 고장 난 것처럼.
그 순간 창밖으로 체스터의 얼굴이 보였고 그는 다급하게 문을 부쉈다.
“체스터……?”
“겁먹을 필요 없어요, 율리아. 그냥 저만 믿어요.”
그가 내민 손을 꽉 붙잡자 그는 내 몸을 마차 안에서 끄집어내고는 품에 안았다.
“율리아. 숨 크게 들이마시고, 참아요. 그리고 눈 감아요.”
왜 그렇게 하라는지 몰랐지만 그가 시키는 대로 눈을 꾹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신 채로 입을 꽉 다물었다.
그의 손이 내 머리를 소중하게 감쌌고 허리를 붙잡은 그의 손에는 힘이 더 실렸다.
발부터 느껴지는 시린 차가움이 점점 머리로 올라왔다. 위에서 봤던 폭포가 떨어지는 그 물 속이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의 온도가 익숙하면서도 두려웠다. 나를 안고 있는 그의 체온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자 더 불안해졌다.
무엇보다도 전생보다 더 전에 이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또다시 나는 물에 빠져서 죽는 걸까.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꼭 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