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체스터는 내 말에 흠칫했다. 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눈에 선명하게 보였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라는 걸 알았다. 기껏 내게 고백까지 했는데, 돌아오는 건 금지령이었으니까.
“율……리아?”
“저를 사랑한다면서요. 혹시…… 거짓말이었어요?”
“…진심입니다.”
“그럼 그거에 대한 증명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러죠.”
그는 순순히 물러났다. 너무 순순해서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드레스 자락을 파헤치던 그의 손은 내 손을 가져가더니 내 손등에 그의 뺨을 가져다 대었다.
무척이나 잘생긴 얼굴로, 살짝 미소를 지은 표정이 사람을 홀리게 만들었다.
“제가 그렇게 해야 당신이 저를 신뢰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습니다.”
“…….”
“저는 당신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요, 율리아.”
꼭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농도가 짙은 열망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그 눈빛은 그의 눈꺼풀에 의해 사라졌다.
체스터는 눈을 감고서는 마치 강아지마냥 내 손바닥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율리아. 이제부터는 말 잘 들을게요.”
체스터는 내 손목에 입을 맞추고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니 내일 봐요, 율리아.”
그는 내 눈을 빤히 응시하면서,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췄다.
심장이 잘생긴 그의 행동에 쿵쿵거리며 반응을 했다.
무슨 사람이 이렇게 잘생긴 거지?
이건 반칙 아닌가. 저런 얼굴로 저렇게 웃으면서 저렇게 행동하면 태연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율리아. 안 잡아먹어요. 당신이 말한 유예기간까지는 입술 이상은 건드리지 않을게요.”
“……체스터.”
“네. 율리아.”
“그 말에 신뢰를 주려면…… 일단 제 위에서 비켜줄래요?”
아까부터 전혀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여서. 이렇게 입 밖으로 말을 해야만 비켜줄 것 같아서.
체스터는 딱히 별말 없이 일어섰다.
“체스터. 정말 저를 사랑하는 거 맞죠?”
“네. 당신을 무척 사랑합니다, 율리아.”
“……다른 이유 없이…… 오로지 그냥 저라는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사랑하는 척이 아니라’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나를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사랑한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고 싶은 만큼 믿을 수가 없었으니까.
“제가 만약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당신이 느낀다면 파혼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네. 그만큼 저는 자신도 있고, 무엇보다도 진심이니까요.”
정말 믿어도 될까?
원작에서 서술되는 그를 보면 그렇게 믿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미 원작의 세세한 부분은 벗어난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 믿어도 되는 걸까.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심입니다, 율리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
“내일 일찍 제게 와주세요, 율리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외출하기 위해 씻고, 드레스를 골라 입고, 화장대에 앉았다. 시녀들이 보석들을 진열했다.
하늘색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장신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머리카락은 늘어뜨리기로 했다.
“유모.”
“네. 황녀님.”
“……괜찮겠지?”
“그럼요.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보다 더 완벽한 혼처는 없죠. 결혼할 거라면요.”
“그건…… 맞지.”
“나이 차이도 그렇게 없고, 잘생기고, 작위도 황녀님의 부군이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으니까요.”
“…….”
“무엇보다 잘생겼잖아요. 그리고 공작 각하께서 황녀님과의 결혼을 먼저 요구했으니 분명 공작 각하께서는 황녀님을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요.”
“……유모가 생각하기에도 지크베르트 공작이 날 좋아하는 것처럼 보여?”
“적어도 아무 감정이 없는 건 아닐 거예요.”
내 질문에 유모는 살짝 웃었다.
그런 유모를 꽉 끌어안았다. 예전에는 유모의 품에 쏙 들어갔는데 이제는 마주 안을 정도로 내가 커져 있었다.
유모는 그런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우리 황녀님은 뭐가 걱정일까요.”
“그냥. 너무 이상해서.”
나를 사랑한다고 한 그 말이. 나는 왜 이렇게 믿기가 어려울까.
그가 흑막이라서? 아니면 다른 이유라도 있는 걸까.
“지크베르트 공작은 왜 나한테…….”
집착하는 건지. 사실 나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들을 온전히 믿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의심스러웠다.
갑자기 그렇게 태도를 바꾸는 게 이상했다.
“……결혼을 원하는 걸까. 황가와의 연을 이으려고?”
“황녀님은 제국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이세요. 황녀님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여성은 아무도 없으니 자부심을 가지세요!”
“…….”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녀님께서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돌아가신 황후 폐하를 쏙 빼닮으셨잖아요.”
나는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만약 엄마를 닮지 않고, 아빠를 닮았다면 과연 어땠을까.
그랬다면 엄마를 닮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사랑해줬을까.
지금은 나아진 거지만, 엄마가 죽은 직후에는 너무나도 힘들었으니까.
“……다녀올게.”
“네, 황녀님.”
그래도 지금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이었다. 그때는 정말 가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가는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도착한 건지, 마차가 멈췄다. 열리는 마차의 문밖으로는 체스터가 보였다.
“율리아.”
체스터는 에스코트를 해주려는 듯, 내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살포시 내 손을 올렸다.
“왜 나왔어요.”
“당신이 온다는데, 제가 기다리고 있어야죠.”
“……다친 곳은 괜찮아요?”
“당신한테 걱정을 받는 건 좋지만, 아주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
“그렇게 걱정된다면, 확인해 봐도 좋습니다.”
체스터는 왼손을 내게 내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괜찮아 보일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지만,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아픈데 괜찮은 척을 하는 건지. 정말로 괜찮은 건지는 내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율리아.”
“……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이제부터 저와 데이트할 텐데, 데이트하기도 전에 그런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하면 제가 속상하잖아요.”
물끄러미 그의 왼쪽 팔을 바라보았다.
“그리 걱정된다면, 직접 확인하셔도 됩니다.”
“……네?”
그는 망설임 없이, 왼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풀었다.
다행히 지혈은 제대로 되고, 상처도 벌어진 것은 아닌지 피가 어제처럼은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옅은 핏자국이 붕대에 묻어 있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율리아.”
“……믿을게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잠시 함께 걸어도 되겠습니까? 여기에서도 보여주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잡고 있는 내 손을 잡아당기며 정원 쪽으로 데려갔다.
전에는 구경조차 할 생각이 없었던 장소였던 만큼 눈길조차 내비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시선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지금 두 눈에 담긴 정원에는 그가 전에 내게 보냈던 수많은 꽃들이 이곳저곳에 심어져 있었다.
“율리아. 당신이 무얼 좋아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이 정도로밖에 못 꾸며놨습니다.”
“…….”
“당신이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말만 해주신다면 정원을 새로 가꾸라고 해두겠습니다.”
“……리시안셔스.”
“다음에 왔을 때, 여기는 리시안셔스로 가득 채워져 있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 웃음을 지으면 무척이나 따스한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왜 체스터가 웃으면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래도 잘생긴 얼굴로 웃으니까 더 잘생겨 보이기는 했다.
“결혼 후에는 공작저의 모든 곳이 당신의 취향으로 도배되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도 돼요?”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체스터는 잡고 있던 내 손을 얼굴로 가져다 대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공작저 안의 모든 것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바꿔주세요.”
“왜 그렇게 말을 해요? 정말 제가 그렇게 해도 괜찮아요?”
내 질문에 체스터는 내 뺨에 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췄다.
아까는 손바닥. 이번에는 뺨이었다.
깜짝 놀라서,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안 괜찮을 게 있겠습니까.”
“…….”
“어차피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 분인데 당연히 괜찮죠.”
“……그래서 어디 갈 거예요?”
그는 대답 대신 잡고 있는 내 손을 이끌고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에 나를 태웠다.
끝까지 대답을 해주지 않을 생각인가.
“비밀입니다, 율리아.”
“진짜 안 알려줄 거예요?”
“네.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좋아하면 좋겠는데…… 좋아해 주실 겁니까?”
“몰라요!”
체스터는 피식하고 옅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표정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아주 흐릿한 기억.
‘다시 만나면 그때는 옆에 있어 줘!’
간절하게 내 손을 붙잡으며 말했던,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던 내 또래의 소년.
얼굴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아니, 애초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을 때였으니까.
그렇기에 확신은 없었다. 그저 심증만 있을 뿐.
“체스터.”
“네.”
“……아니에요.”
이름을 불렀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걸 눈치챘는지. 체스터는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부담을 갖지 말라는 것처럼 상냥하게 속삭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요. 당신한테는 뭐든지 제대로 대답해줄 테니까요.”
체스터와 마주 보고 앉는 것도, 그가 내 뺨을 쓰다듬는 것도, 이제는 딱히 거부감이나 이질감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을 뚫어질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아니, 착각일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그 아이와 체스터는 닮은 구석이 머리카락 색뿐이지만.
그 아이와 동일인물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달랐지만.
“체스터.”
“네. 율리아.”
그렇다고 체스터가 그 애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