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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25화 (25/141)

#25화

그 말에 심장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내가 들었던 그 말을 오해라고 치부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결국 내가 맞았다. 아니, 정확히는 원작이 틀린 게 아니었다.

체스터는 단 한 순간도 나를 사랑한 적 없다는 그 판단이 옳았다. 원작이 옳았다.

그렇다면 가족들과 나의 결말은 죽음이라는 것도 변하지 않는 걸까.

“……사실……이라고요?”

그는 결국 여주에게 집착한다는 그 설정이 맞았다.

그저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원작처럼 행동하지 않았던 거에 불과했던 걸지도 모르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건데, 왜 이렇게 무기력한 느낌이 드는 건지. 그리고 왜 꼭 충격인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

충격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충격을 받을 것도 없는데.

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은지. 고작 그 말이 뭐라고 내가 이렇게 통증을 느끼고 있는 건지.

“율리아.”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그의 음성에 정신이 들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을 때와 비슷할 정도로 아주 다정하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무척이나 진지하게 들리는 어조였다.

“제가 그때 그 말을 했던 건,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거든요.”

“…….”

“하지만 지금은 당신을 사랑하는 게 맞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이번에도 제게 거짓말을 하는 건가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조차도 거짓된 연기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의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으니까.

일단은 그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기로 했다.

모두 다 들어보고 판단하는 게 좋겠지.

“전쟁터에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생각들은 오로지 율리아, 당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

“곁에 없으니 허전하고, 보이지 않으니 보고 싶었고, 당신을 볼 수가 없다는 게 답답했습니다.”

원작 속에서 서술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게, 원작 속 여주를 대했던 행동이었을지도 몰랐다.

물론 흑막이란 사실이 밝혀지기 전, 독자 모두가 서브 남주라고 인식하고 있던 시절과 흡사했다.

그때 여주도 이런 기분이 들었을까.

“그리고 이 감정이 사랑이라더군요.”

“……누가요?”

누가 가르쳐 줬을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황성으로 오기 전에 원작 남주와 체스터의 사이를 보았기 때문에 원작 남주에게 저런 걸 털어놓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체스터에게 원작 남주 이외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사장이 그러더군요.”

“…….”

“곁에 없으면 허전함을 느끼고, 보이지 않으면 보고 싶고, 뒷모습을 보면 끌어안고 싶은 그런 감정이 드는 게 사랑이라고요.”

그는 무해해 보이는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시선의 시작이자 끝이 향하는 사람이 당신이라는 것만큼, 확실한 건 없겠죠.”

할 말을 잃었다. 내 두 눈동자는 정처 없이 이리저리로 흔들렸다.

“그게 맞다면, 저는 당신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사랑에 빠져 있었다는 의미겠죠.”

“……진짜요?”

“네. 진짜입니다. 그리고 진심입니다, 율리아.”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나도 모르게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오늘 한 모든 말들에 있어서, 거짓은 없습니다.”

“……정말요?”

내 물음에 체스터는 피식 웃었다.

그 모습이 사람을 꾀어내는 고혹적인 악마 같으면서도, 무척이나 상냥한 사람의 웃음 같았다.

그는 내 머리카락을 한 줌을 잡고,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율리아. 저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요.”

“…….”

“받아달라고 강요하지는 않을게요. 그저 밀어내지만 말아줘요.”

체스터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질 않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으니까.

처음 겪는 일이라서, 어떠한 말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겨우겨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체스터.”

“네.”

“정말로…… 저를 사랑해요?”

“네.”

“진짜요? 진짜 진짜…… 진짜로 저를 사랑해요?”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흑막인 체스터가 나한테 저렇게 말을 한다는 게 믿기 힘들었다.

그것도 원작 속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던 대사였다.

“정말로…… 진심으로 저를 사랑해요?”

“당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제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제가, 율리아라는 단 한 사람으로 좋다는 거예요?”

“그럼 율리아라는 단 한 사람을 사랑하는 거지, 그리고 제가 당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정말 저를 사랑하는 거예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체스터가 이렇게 진지해 보이는 눈빛은 처음이라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기뻤다.

엄마가 내 곁을 떠난 이후로 받는 동정도 연민도 없는 사랑이라는 점이, 안도감을 들게 했다.

꼭 확인해야 할 게 생겨서 그의 얼굴 바로 앞으로 내 얼굴을 들이밀었다.

체스터가 거짓말을 하는지, 진심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눈을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빤히 보았다.

“정신적으로 저를 사랑하는 게 맞아요?”

“……율리아. 너무 가깝습니다.”

“대답해줘요.”

“정신적으로 사랑하는 게 맞습니다.”

그의 눈동자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무척이나 진심으로 느껴졌으니까.

내가 저 말이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그의 진심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이제야 제대로 웃을 수 있었다.

“율리아.”

“네?”

“제 앞에서만 그렇게 웃어요. 이렇게 예쁘게 웃는 얼굴을 제가 아닌 다른 사람한테는 보여주면 안 돼요.”

“……아빠랑 오빠한테도요?”

“외간남자로만 한정하죠.”

“……제 입장에서는 체스터도 아직은 외간남자인데.”

“저는 예외죠. 곧 약혼하고 결혼까지 할 사이인데.”

“그건 맞지만…….”

“율리아. 우리 결혼 앞당길래요?”

결혼을 앞당기자는 말에, 현실로 돌아왔다.

체스터가 날 사랑한다는 게 진심이기는 해도, 결혼은 좀 신중해야 했다.

이미 원작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았지만, 아직 여주와 체스터의 제대로 된 만남은 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 이전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2년. 2년 후에 결혼해요.”

“그러길 바란다면요.”

“아직은…… 가족들이랑 더 오래 있고 싶어요.”

다른 이유는 아직은 가족들을 놓을 수 없었으니까. 내게 있어서 가족은 무척이나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떨어지기도 싫고, 헤어지기도 싫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직은 가족이 우선이었다.

“……괜찮아요?”

“네. 충분히 이해합니다. 가족이랑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을 테니까요.”

체스터는 어렸을 때,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 어떻게 본다면 체스터가 흑막이 아니었더라면 안타까운 캐릭터일 수도 있었다.

지금 체스터는 흑막이 아니니까. 아직 서브 남주가 되기도 전이니까.

사실 이런 이유가 없더라도, 그냥 이런 행동을 하고 싶었다. 그저 이유가 어찌 되었든 지금의 그를 꼭 안아보고 싶었으니까.

“……율리아?”

그를 와락 껴안았다. 체스터도 내 행동에 처음에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마주 안아주었다.

이러니까 안심이 되었다. 귀에 들리는 그의 심장 소리가 안정감을 들게 만들었다.

뭔가 몸이 좀 불편했다.

“체스터.”

“네?”

“왼쪽 팔만 다친 거예요? 다리에는 전혀 상처 없고?”

“네. 걱정할 필요…….”

다리는 다치지 않았다는 말에 냉큼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읏, 율리아?”

“……싫어요?”

“싫은 건 아닙니다.”

“안 돼요?”

역시 안 되는 걸까. 그의 무릎에 앉아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면 혹시?

“……제가 무거워요?”

“무거워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요?”

싫은 것도 아니고, 안 되는 것도 아니고, 무거워서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왜 이렇게 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왜 체스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을까?

“오히려 이렇게 굴면 좋지만, 지금은 좀 많이 곤란해서요.”

체스터는 오른손을 내 뺨에 가져다 대더니, 무척이나 따뜻해 보이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내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이 좋았다.

“율리아. 제가 여기로 올까요? 아니면 율리아가 제게로 올래요?”

“……팔 다쳤잖아요. 내일 제가 갈게요.”

“그러면 내일 놀러 갈래요? 보여드리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어딘데요?”

체스터는 피식하고 웃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고혹적으로 웃을 수 있는 걸까. 정말 인간을 유혹하는 악마가 따로 없었다.

“조금 멀리 있습니다.”

“……많이 멀어요?”

“네. 아버님과 식사하고 오셔도 됩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흐음……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해요!”

그는 내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율리아. 이것만 기억해요, 제 모든 시작과 끝은 당신이라는 것.”

“…….”

“그리고 제가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요, 율리아.”

체스터답지 않은 만큼, 무척이나 달콤한 사랑 고백이었다.

“원래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그건 좀 힘들 것 같네요.”

“왜요?”

“당신이 너무 잡아먹고 싶을 정도로 예뻐서요.”

분명 체스터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순간 등 뒤에는 침대가 닿아 있었다.

설마 지금 내가 되게 당황한 게 얼굴로 드러나지는 않았겠지? 불안감에 심장이 초조하게 쿵쿵거렸다.

게다가 나오는 목소리마저도 떨림이 한가득 묻어났다.

“체스터……?”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그는 무척이나 나른한 웃음을 지으면서 단숨에 내 입술을 삼켰다.

그의 손이 다정하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애정이 느껴지는 손길에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마치 그는 갈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혀를 밀어 넣더니 집요하게 입 안을 헤집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면서 슬쩍 눈을 떴다.

“하아…….”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을 때, 도로 입술이 맞물렸다.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그의 혀가 부드럽게 내 혀를 옭아맸다.

드레스 자락 안으로 그의 손이 파고드는 순간 정신이 들면서 다급하게 그의 손을 저지했다.

“체스터! 우리…….”

“율리아?”

“……결혼 전까지는 키스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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