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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24화 (24/141)

#24화

분명히 피 냄새였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흑막의 왼팔에 닿았다.

오른손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그는 계속 왼팔을 잘 움직이지 않았다.

“……왼쪽 팔…… 다쳤어요?”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그는 뭐가 좋은지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물어봤잖아요. 다쳤냐고. 그거 먼저 대답해줘요.”

“괜찮습니다. 그리고 흉터가 남을 만한 상처도 아닙니다.”

이거 거짓말이다. 피 냄새가 이렇게 진동하는데 어떻게 가벼운 부상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완전 바보도 아닌데.

“체스터. 정말 가벼운 상처 가지고는…… 제가 알아차릴 정도로 냄새가 나지 않아요.”

“……정말 크게 다친 건 아닙니다. 그저 출혈량이 많을 뿐이죠.”

출혈량이 많다는 게 크게 다쳤다는 거잖아!

그가 왼쪽 팔을 슬쩍 숨기는 게 보였다. 그걸 보고 다급하게 그의 왼쪽 손을 붙잡았다.

“……율리아?”

그의 소매가 축축했다.

내 손에 묻어난 액체를 확인하니 부정할 수 없는 붉은색이었다. 그리고 그 액체는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이거 피죠?”

“피는 맞죠.”

“왜 말 안 했어요.”

“큰 상처는 아니에요. 이 정도는 주로 있는 일이죠.”

아마도 지혈한 후에 상처 부근을 붕대로 감았을 텐데, 이렇게 피가 뚝뚝 묻어난다는 건 상처가 벌어졌다는 걸 의미했다.

나도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를 전쟁터로 내몬 건 나인데, 거기서 죽길 바랐던 것도 나인데, 어째서 이렇게 다친 걸 보고 당황하는 건지.

죽기까지 바랐던 사람이 나였는데, 고작 출혈량이 많다는 이유로 이렇게 흔들리는 이유가 뭘까.

“……많이 아파요?”

“그다지 아프진 않습니다.”

그의 왼손을 만지작거렸다. 죄책감인 걸까.

알 수가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율리아.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이 정도는 가벼운 상흔입니다.”

“……상처가 벌어졌는데! 아니, 이렇게 제가 알 수 있을 정도면 심각하다는 건데…… 가벼운 상흔이라고요?”

“…….”

“제가…… 바보로 보여요?”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오히려 아주 가벼운 부상에 해당하죠. 이 정도는 부상이라고 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일단…… 돌아왔으면 치료를 먼저 받았어야죠!”

“다친 거는 전데…… 아픈 건 율리아, 당신처럼 보입니다.”

나는 심각한데, 본인은 태평했다. 차라리 다쳤으면 아픈 내색이라도 하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흐릿하게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는 바닥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알 수 없는 기억을 떨쳐냈다.

“이 정도는 걱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팔 자체를 잃은 것도, 팔을 못 쓰게 될 정도로 다친 것도 아닌데요.”

“……하지만.”

“그래도 당신한테 걱정을 받으니 좋네요.”

그는 손수건을 꺼내서, 내 손을 닦아주었다. 정확히는 내 손에 잔뜩 묻어난 그의 피를.

“율리아, 손 더러워져요. 만지지 마세요.”

“……이 손수건을 제 손을 닦는 용도가 아니라, 상처를 제대로 지혈하는 데 써요.”

“지금 장인어른을 뵈러 가는 길인데, 따님의 손이 피범벅이 되어 있으면 사위가 되는 입장에서 난처하죠.”

“……이 정도는 아빠도 이해해줄 걸요. 패배한 것도 아니고…… 이번에도 이겨서 돌아온 거잖아요.”

“원래는 잘 다치지 않지만. 다쳐도 부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수준의 상흔 정도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예전에도 다쳤었어요?”

사실은 원작 속에서 체스터도 전쟁을 겪으면서 조금이라도 다쳐왔던 걸까. 그저 원작에서는 그 서술을 대충 했던 걸까.

딱히 그 부분은 원작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부상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친 적은 없습니다.”

“……어떻게 걱정을 안 해요.”

엄마가 어떻게 떠났는데. 차마 놀아달라는 말 한마디가 나오지 않아서 삼켜야 할 정도로, 엄마가 아팠는데.

그러다가 결국 엄마는 내가 엄마에 대해 알아가고, 익숙해지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었는데.

내 앞에서 사람이 다치거나 아파하면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엄마가 떠올라서.

“체스터가 아니더라도, 제 앞에서 다른 사람이 이렇게 다쳤거나 아파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지나치지 않았을 거예요.”

“그건 싫습니다.”

“장난치지 말고요.”

“당신의 그 모든 행동들이, 오로지 저만을 향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두 눈동자에 나만을 담은 채로 나른하게 웃었다.

“율리아. 그건 제 욕심에 불과하겠죠?”

“……욕심이에요. 그건 그거고, 다치지는 마요.”

정말 나는 모순적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다친 사람을 보고 외면할 정도로 냉정하지는 못했다.

마차가 멈추는 게 느껴졌다.

“도착했나 보네요. 이제 갈까요?”

“……괜찮겠어요? 정말로?”

그 팔로? 정말 걱정됐다.

어쩌면 나 때문이었을지도 몰랐으니까. 당연히 오래 지속되다가 패배했을 전쟁을 이겼으니까.

이미 원작은 벗어났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등장인물의 설정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나의 선택이 나의 엔딩을 빠르게 재촉한 걸 수도 있었다.

“겨우 왼손입니다. 평소에 쓸 일도 없으니 실생활에 지장을 미치지 않습니다.”

체스터는 내 앞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왼손은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걸 보면, 아픈 건 분명했다.

정말로 멀쩡할 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도 아픈 손에 손을 얹는 것보다는, 그가 내민 멀쩡한 오른손으로 에스코트를 받는 게 맞겠지.

체스터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갔다.

여섯 달 만에 오는 집이었다. 익숙하게 느껴지면서도 무척이나 낯설게 보였다. 그만큼 여섯 달이 무척이나 즐거웠다는 의미겠지.

어차피 집무실에서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체스터와 함께 아빠가 있는 집무실로 향했다.

“아빠!”

“율리아!”

잡고 있었던 체스터의 손을 놓고, 한걸음에 아빠한테 달려가 안겼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욱 반갑게 느껴졌다.

“여행은 어땠니?”

“좋았어요! 다음에 한 번 더 가고 싶어요.”

“그래. 네가 또 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네!”

“아, 지크베르트 공작과 함께 왔구나.”

아빠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려, 다시 체스터 쪽에 시선을 두었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걸로 모자라서, 단기간에 종전시키는 데는 공작의 공이 컸지.”

“황송합니다.”

“공작은…… 지금도 짐의 딸과 결혼하고자 하는 마음에는 변함없나?”

“네. 그렇습니다.”

슬쩍 아빠를 보았다. 아빠의 표정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 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율리아. 너도 변함없느냐.”

“……네. 저는 괜찮아요.”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겠느냐.”

아빠의 말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후회하지 않겠냐는 그 말은 내가 체스터와 결혼하는 걸 진심으로 원하냐는 질문이었다.

즉, 내가 원치 않는다면 무를 수도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저는 괜찮아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이미 후회는 넘치도록 많이 했다. 또다시 후회할 수도 있다는 걸 알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바로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약혼만 하고 결혼은 늦출 수 있으니까.

그리고 체스터가 원한다면 언제든 파혼할 수 있도록 할 생각이었으니까.

“아빠. 결혼은 좀 미루고, 약혼만 하는 걸로 얘기했어요.”

“그래.”

“그리고…… 결혼 전에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 파혼할 수 있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약혼식을 먼저 해야 할 텐데…… 약혼과 관련된 건 전부 황실에서 하기로 하지.”

아빠는 그 말을 하며 체스터 쪽을 노려보았다.

전에는 체스터가 어떻냐고 자신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며 내게 물어봤었는데, 왠지 지금은 탐탁지 못한 눈빛이었다.

오히려 지금이 황가에 있어서 더 이득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는 걸까?

“아빠. 그럼 이만 갈게요.”

“그래. 내일 점심이나 함께 하자꾸나, 율리아.”

아빠의 집무실에서 나는 체스터를 데리고 나왔다. 발걸음이 자연스럽게 빨라졌다.

“율리아?”

“……따라와요. 팔 다친 거 제대로 치료도 못하고 온 거잖아요.”

“이 정도로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제 책임도 있으니까요.”

그를 내 성으로 데려오고, 궁의를 불러서 그의 팔을 치료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괜히 그에게 전쟁에 참전하라고 한 게 아닌지, 후회가 됐다. 저렇게 다쳐서 올 줄 알았다면.

나와 관련된 사람이 아픈 걸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옛날이 떠오르는 것 같아서.

“황녀 전하, 치료 끝났습니다.”

“……그래.”

치료가 끝났다는 궁의의 말을 듣고, 다시 체스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의 겉옷은 의자에 걸쳐져 있었고, 체스터는 셔츠 한 장을 입고 있었다.

체스터의 팔에는 새하얀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다급히 그에게 다가가서 그의 팔을 건드리며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래도 어디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간 것 같지는 않아서 안도할 수 있었다.

이제야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았다.

“체스터. 다치지 마요.”

“네. 명심하죠.”

그는 무척이나 상냥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왜 저 표정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체스터는 잘 웃지 않았기 때문에 어색하게 느끼는 게 맞는 건데.

마치 언제 한번 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꼭 그 애가…….

“율리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르고서야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붕대가 감겨진 그의 팔을 매만지고 있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묻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뭔데요?”

지금 그의 눈빛은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으로 느껴지는 진심이었다.

그랬던 만큼, 그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긴장되었다. 무슨 말을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불안감에 휩싸였다.

“저를 사랑하십니까?”

내가…… 너를 사랑하냐고?

그 질문에 바로 대답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당황한 탓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었던 질문이었으니까.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는 무척이나 진지해 보였다.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는 솔직히 말하기로 했다.

“……모르겠어요.”

적어도 사랑은 아니었다.

한때는 죽길 바랐을 정도로 무서웠고 싫었지만, 이렇게 다친 걸 보고서도 외면할 정도로 미워하는 건 아니었다.

내 감정이 어떤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아직…… 내 가족들은 살아 있으니까. 소설 속 율리아가 죽은 거지 내가 죽은 건 아니니까.

“율리아.”

“…….”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의 이런 어조는 처음이었다. 늘 어딘가 의미심장했었지만, 지금은 확고함이 느껴졌다.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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