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무척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흑막과 눈이 마주쳤다.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그렇습니까.”
정말 살아서. 그것도 패배할 전쟁을 겨우 6개월 만에 승리로 이끌고서 돌아왔다.
정말 괴물이 따로 없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는데요?”
“함께 가고 싶어서요. 저도 황제 폐하를 뵈어야 하거든요.”
그는 내 앞으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말하는 걸로 보아, 돌아오자마자 황성으로 간 건 아닌 것 같았다.
아니, 내가 여기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가는 길에 보였습니다.”
“…….”
거짓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었다.
여기는 지크베르트 공작저와 거리가 꽤 있는 곳이었다. 더불어 황성과도 거리가 있는 곳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입은 옷에서 비릿한 피 냄새 대신, 시원한 비누 냄새가 풍겨왔으니까.
수도로 오자마자, 집으로 가서 씻은 듯 보였다. 그리고 옷도 깨끗한 걸 보니, 갈아입었겠지.
“저도 황성에 가야 하는 입장이니, 황녀 전하와 함께 가고 싶습니다.”
“…….”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운명이 아니겠습니까?”
슬쩍 뒤에 있는 남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소공작님.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네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미안해요. 나중에 시간이 되면…….”
만나자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 뒤에는 흑막이 있었으니까.
둘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흑막 앞에서 그런 발언을 한다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친구를 죽여 버릴 사람처럼 보였다.
애꿎은 사람을 죽게 둘 수는 없으니까.
다른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뒤에서 흑막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는 황녀 전하께 접근하지 마.”
“나는 그저 황녀 전하를 우연히 만났을 뿐이야. 너와는 다르게.”
“그럼 나는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는 의미인가?”
이대로 두면 왠지 둘이 싸울 것 같았다.
아니…… 너희 둘 친구 아니었어? 왜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고 난리야?
“이만 가요.”
그가 내밀었던 손을 잡았다. 그는 잡은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었다.
“그러죠.”
그래도 순순히 물러나서 다행이었다.
원래는 저녁에 황실 마차가 여기로 오기로 했었지만 일이 틀어져 버렸다.
시간이 있을 때 수도에서 조금 노닥거리다가 들어가려고 했는데…… 내 계획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여행으로 편안하고 행복했던 기억은 사라지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드는 원흉이 눈앞에 있어서 그런지 벌써부터 피곤함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율리아.”
“…….”
“다른 놈들을 만나는 것도 안 되지만, 특히 블레어 소공작과는 절대로 가까이 지내지 마세요.”
“……왜요? 둘이 친구 아니었어요?”
아직은 친구 맞지 않나?
흑막과 남주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여주를 두고 충돌하기 시작하면서잖아.
“뭐…… 친구가 아니라고는 못 하겠지만, 율리아한테 있어서는 가까이 두어서 좋을 게 없는 인간이에요.”
내가 보기에 가까이 두어서 좋을 게 없는 사람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흑막님이신데.
“보고 싶었습니다, 율리아.”
왜 저렇게 웃는 건지. 어울리지만 어울리지 않았다.
잘생긴 얼굴로 저렇게 웃으니 되게 잘 어울렸지만, 흑막이라는 사실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저 웃는 얼굴이 소름 돋게 느껴졌다.
저렇게 웃는 얼굴로 나를 해할 사람이라는 게 떠오르니까.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좋았어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척이나 행복했었다.
그 어떤 걱정거리도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잊어버렸던 걱정이 피어나면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았다.
물론, 원작의 스토리가 바뀌었다고 결말까지 바뀔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여주와 남주가 이루어진다는 그 결말. 그건 변하지 않겠지만, 내가 죽는다는 엔딩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두려웠다.
“그렇습니까? 그러면 다행이네요. 그럼 어디가 좋으셨습니까?”
“……네?”
“바깥으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모르겠어요.”
“결혼하고, 이곳저곳 다녀오죠. 아니면 결혼 전에 다녀오는 것도 좋고.”
“저는 혼자 가는 여행이 좋은데요…….”
그냥 아무도 방해할 수 없고, 아무도 개입할 수 없는 나 혼자만 즐기는 여행이 좋았다.
흑막과 같이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어떻게 안심하면서 여행을 즐길 수 있을까.
“그리고…… 바로 결혼하는 건…… 조금 부담스럽고요…….”
슬쩍 흑막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혼인신고서에 사인을 하면 돌이킬 수가 없었다.
그리고 흑막은 애초부터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내게 했던 그 모든 말들은 가식에 불과했던 거니까.
“그…… 그냥 약혼 먼저 해요. 그쪽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까요.”
“율리아.”
“네?”
설마 안 된다고 하려나? 초조함에 손끝이 떨렸다.
다급하게 말을 이어 붙였다.
“결혼하면! 아빠랑 오빠를 볼 시간이 많이 없을 것 같아서…….”
“…….”
“결혼 전까지는 그래도…… 시간이 넉넉해야 아빠랑 오빠랑 더 오래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 말이 과연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한 치의 거짓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나는 가족과 함께 있고 싶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더 그들의 곁에서 있고 싶었으니까.
그는 옅게 웃었다.
“당신이 그걸 바란다면 그러죠. 하지만, 제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정말요?”
“뭐.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요.”
“…….”
“약혼한다면 결혼은 충분히 미룰 수 있는 거니까요. 결혼식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성대하게 하는 게 좋겠죠?”
“……그건 아빠랑 상의해볼게요.”
“네.”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서, 흑막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계속 나를 뚫어져라 보는 것 같아서 되게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이거 가지고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율리아.”
“……네?”
“이름으로 불러줘요.”
“아…….”
“언제까지 딱딱한 호칭으로 부를 건가요. 제 이름을 잊은 거라면 다시 알려줄 테니, 앞으로 체스터라고 불러요.”
“…….”
“율리아. 어서 불러 봐요. 전에는 잘 불렀잖아요.”
계속 입을 다물었다.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질 않았다.
“이제 와서 제 이름을 못 부르는 척하기엔 늦었단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앞으로 제 이름으로 부르지 않을 때마다 키스할 겁니다.”
“……체스터.”
시선은 마차 밖 풍경에 고정하고, 마지못해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고작 이름 하나 불렀다고 왜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말했다.
“이제 됐나요.”
“앞으로도 그렇게 불러주세요, 율리아.”
“…….”
“제 얼굴을 봐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저는 당신이 무척 보고 싶었는데.”
“그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미 전부 알고 있으니까. 전부 가식이라는 거. 내게서 뭘 원해서 저렇게까지 구는지 모르겠지만.
“전쟁터에서도 늘 당신 생각만 했습니다. 율리아.”
“사탕 발린 거짓말이라는 거 알아요.”
“네?”
“저를 사랑한다고 했던 말들. 전부 거짓말이었잖아요.”
“……거짓말로…… 생각하셨습니까? 지금까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어요.”
사실은 흔들렸는데. 정말 진심인 것 같은 태도에 흔들렸었는데.
정말 몇 번을 생각해봐도 잠시나마 흔들렸던 내가 바보 같았다.
하지만 정말 진심 같았던 거짓말이었으니까 내가 아니었더라도 충분히 흔들렸을 거야.
“……약속을 파기할 생각은 없어요. 약속대로 결혼은 할게요. 다만, 그 기간을 늘려줘요.”
“……율리아. 누가 그랬습니까? 제가 당신한테 사랑한다고 했던 말들이 거짓이었다고.”
“…….”
멍하니 창밖 풍경을 보았다. 익숙한 풍경이었으니 얼마 있지 않으면 황성으로 도착하겠지.
“이드리안입니까?”
왜 여기서 남주 이름이 언급되는 건지.
하긴, 내가 몰래 엿들은 거니까. 알 리가 없겠지.
“체스터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말했잖아요. 사랑이라는 걸 할 사람으로 보이냐고.”
내가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 어떤 대답이 나올지 궁금했다.
어떤 눈빛을 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차마 확인할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율리아. 오해입니다.”
“그렇게 말하겠죠. 누구든지 아니라고 하죠.”
“……적어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심입니다.”
뻔한 거짓말.
친구한테 그렇게 말을 할 정도면, 정말 사랑이라는 걸 할 사람이 아닌데 이제 와서 이렇게 군다는 게 신뢰성이 없었다.
믿으라고 하는 거짓말일까. 차라리 그럴싸한 변명이라도 내뱉었다면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알아둘게요.”
“율리아.”
아까 전부터 비릿한 냄새가 심해졌다.
시원한 비누 향과 뒤섞인 피비린내.
내게는 피가 흐를 만한 상처가 있지 않았다. 하지만 마차 안에는 단 두 명뿐인데? 내가 아니라면 흑막밖에 남지 않잖아.
한참이나 창밖에 고정해두었던 시선을 흑막에게로 옮겼다.
흑막이 다쳤을 리는 없고…….
“……혹시 저한테 오기 전에 사람 한 명 죽였어요?”
지금 코끝을 스치는 이 비릿한 냄새는 피 냄새가 분명했다.
그는 내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하긴 누군가를 죽였다 하기에는 옷이 상당히 깨끗했다. 그리고 저렇게 깨끗하다면 누군가를 죽였어도 씻고 왔다는 소리니까.
그러니 비누 향만 나야 하는데 피 냄새가 섞였다는 건.
정말 흑막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계속 오른손만 사용했던 그였기에.
“……다쳤어요?”
그의 왼쪽 팔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