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아주 많이 즐거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쉬워질 만큼 무척 재밌었고 잡생각을 전부 떨쳐버릴 수 있었다.
원래는 두 달 안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아빠한테 편지를 보내서 여섯 달 동안 휴양지에서 즐겁게 놀았다.
이래서 솔로 라이프가 행복하다는 걸 납득했다.
정말 결혼하기 싫다는 게 고스란히 와닿을 정도로 무척이나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황성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수도에서 새 옷과 보석들을 구입할 생각이었다.
요즘 수도에서 가장 핫하다는 보석 전문 가게로 들어갔다.
그 순간 눈앞에는 햇살을 머금은 듯한 금빛 머리카락과 전형적인 온미남의 얼굴이 펼쳐졌다.
“황녀 전하?”
“……어? 블레어 소공작님?”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다. 여기서 남주를 만나다니, 뭔가 힐링 될 게 없었던 내 심정이 더 완벽히 힐링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주는 우리 오빠와 마찬가지로 순한 눈매를 가진 온미남이었다. 그래도 우리 오빠가 더 잘생겼지만.
내가 최애의 여동생으로 환생했으니,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최애를 이성으로는 가질 수 없지만, 최애의 사랑을 독차지한다는 게 짜릿했다.
하지만 원작 남주를 본다는 건 그와는 다른 거였다. 최애는 최애고, 남주는 남주고, 흑막은 흑막이듯이.
“여행을 떠났다고 들었었는데 돌아오시는 길인가요?”
“네. 너무 오래 나가 있었죠. 그런데 블레어 소공작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세요?”
남주와 만났다는 것과는 별개로 장소가 의아했다.
남성보다는 여성의 취향을 공략한 가게였던 만큼, 남주가 왜 여기에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선물을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거든요.”
“……누구요?”
혹시? 여주인가?
내가 흑막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던, 세실의 생일파티에서 만난 걸까? 궁금했다.
그 운명적인 만남이 조금은 부러웠다. 아니,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자세한 내막은 세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테니까. 물론, 남주가 말하는 그 사람이 여주인 세실이 맞다는 가정하에.
“혹시…… 선물을 주고 싶다는 사람이, 세실 클로이 후작 영애이신가요?”
“글쎄요?”
맞나? 아닌가?
남주는 여상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세실이 맞는지 아닌지 헷갈렸다.
“그럼 다른 사람인가요? 누구예요?”
“일단 비밀이라고 해두겠습니다.”
“그 사람도 알아요?”
“음…… 아니요. 아마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그저 제 짝사랑일 뿐이죠.”
여주가 아닌가? 그럼 도대체 누가 남주의 마음을 가져간 거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럼 원작의 흐름이 거대하게 바뀌는 거잖아!
더 캐묻고 싶었지만 지금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내게 있어서 남주는 내적 친밀감이 무척 높은 사람이었지만, 남주의 입장에서는 마주친 적도 거의 없는 황녀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친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것저것 캐물을 수는 없을 테니까.
“황녀 전하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선물 고르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네! 그럼요!”
“제가 워낙 보는 눈이 없어서…….”
“근데 보통은 사용인을 시키지 않나요?”
그는 내 질문을 듣더니, 멋쩍게 웃었다.
이런 모습도 원작 속에서는 여주에게 보였던 걸까. 정말 이 순간들이 여주에게 격한 공감이 일렁이게 만들었다.
내가 여주였어도 저 얼굴에, 저런 행동이면 넘어가고도 남았다고.
차라리 흑막이 이런 순수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아니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행히 남주의 목소리가 끼어들어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인 만큼, 제가 직접 보고 골라서 선물하고 싶거든요.”
“와아!”
역시 남주! 어쩜 이렇게 다정한 성격을 갖고 있는 건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누군가와 엄청 비교가 됐다.
괜히 남주가 아니었다. 이렇게 다정한 성격을 가졌으니 남주라는 타이틀을 가져간 거였다.
이런 다정함을 실제로 영접하게 되다니!
“그런 정성이면, 그 사람도 분명히 소공작님의 진심을 알아줄 거예요!”
“……그럴까요?”
“이미 결혼을 했다면 힘들겠지만, 약혼자 정도는 소공작님이 이길 수 있을 거예요!”
남주를 이길 사람은 우리 오빠밖에는 없을 텐데. 하지만 오빠는 결혼 생각이 없다고도 했고, 아직 황태자비로 내정된 영애도 없었으니 남주의 입장에서는 딱히 거리낄 건 없겠지.
일단 남주는 아직 공작 작위를 받지 못했지만, 소공작이었으니까.
황태자인 우리 오빠가 연적 상대거나 상대방이 기혼이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다.
음…… 그리고 흑막도 이겼다. 소설에서도 흑막과 남주가 대치했지만, 결국 남주가 여주와 결혼하는 엔딩이었으니까.
“그 사람 많이 예뻐요?”
“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어디가 좋은 거예요?”
“……글쎄요?”
아니 선물을 주고 싶다는 건, 좋아한다는 뜻 아닌가? 그러면 분명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을 텐데.
궁금했다. 그 상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부럽게 느껴졌다.
남주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누구일지. 궁금한 만큼 알고 싶었다.
혹시라도 원작의 스토리가 바뀌었을까 봐. 그래서 내가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면서.
“누군지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이 정도도 못 알려주나요? 그 사람 선물 고르는 데 도움도 주고 있는데요.”
“…….”
“머리 색이나 눈 색도 못 알려줘요? 알려주면 선물 고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건 좀 곤란해서요.”
조금이라도 그 사람에 대해 공개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남주의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아주 많이 부러웠다. 나는 흑막 때문에 심장을 졸이며 살아왔는데.
내 가족들이 내 눈앞에서 죽는 그 비극이 닥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악몽에 시달려왔었는데.
“곤란하다면…… 어쩔 수 없죠.”
“죄송합니다.”
“죄송해할 게 뭐가 있나요? 그저 소공작님이 말하고 싶지 않으시다면, 어쩔 수 없는 거죠.”
“죄송합니다.”
남주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온미남이었던 만큼 옅은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 사람의 심장을 들었다 놨다 했다.
저렇게 웃어준다면, 세상 넘어가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게 분명한데.
“음…… 소공작님이 좋아한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네.”
“소공작님은 좋은 사람이니 소공작님의 진심을 알면 그 사람도 분명 소공작님을 좋아할 거예요.”
“……제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나요?”
그야…… 소설로 읽었으니까.
원작을 알기 때문에, 남주인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으니까.
원작에서도 남주는 햇살 같은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물론 흑막도 서브 남주 시절에는 여주에게 착한 태도로 맹목적으로 매달리기는 했지만, 그거는 여주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냥…… 척 보면 알죠.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황녀 전하께 그런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아까는 옅은 웃음이었다면, 지금은 무척이나 환한 웃음이었다.
정말로 기뻐 보이는 사람처럼 웃는 얼굴에 모든 정신을 빼앗겼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남주를 좋아해서는 안 됐다. 남주의 짝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게 남주의 힘인 건가 싶었다.
“아! 오늘이 체스터가 돌아오는 날이라는 걸 알고 오신 건가요?”
“……네?”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왜 거기서 흑막의 이름이 나오는 거지?
“아마 오늘 정도에 도착한다고 들었어요.”
뭐…… 뭐라고? 아니, 물론 아직 여름이 오기 전이지만, 이렇게 빨리?
정말로 여름이 지나기 전에 온다는 그 약속을 지키는 거라고?
당연히 여름이 오기 전이라는 건 최소한 내년 여름이 아니었어?
이렇게 겨우 6개월 만에 종전을 한다고?
혹시나. 아니 내 바람이 이루어졌을까 싶어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희망 사항을 읊었다.
일찍 돌아오는 이유가 혹시 패배해서 그런 걸 거라고.
“……그러면 패배한 건 아니죠?”
젠장! 이번 여행이 너무 평화롭고 즐거워서, 바깥소식에 대해 신경을 전혀 쓰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
제발 남주의 입에서 이번 전쟁에 패배해서 아쉽다는 말이 나오길 간절히 바랐다.
“체스터가 총사령관으로 있을 때는 단 한 번도 패배한 역사가 없었죠. 이번에도 이변은 존재하지 않았고요.”
“……그런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어서, 조금은 기대했었다.
솔직히 이번만큼은 원작이 틀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 주질 않았다.
아니, 애초에 흑막이 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부터가 원작이 바뀐 것과 다름없는 건데.
괜한 기대를 한 걸까. 아니, 아주 괜한 기대는 아니었다.
원작에서는 패배하는 전쟁을 흑막이 참여함으로써, 그 전쟁에서 죽기를 바랐었다.
하지만 그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흑막의 패배 혹은 죽음이었는데.
분할 정도로, 신께서는 내가 바랐던 그 어느 것도 들어주시지 않았다.
흑막은 사랑을, 아니, 감정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하는 거짓말을 진실로 믿으려 했던 내가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율리아.”
내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무척이나 익숙하지만 날 불안에 떨게 하는 목소리.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아빠와 오빠. 그리고 내 가족이 아닌, 단 한 사람.
“흐음…… 분명 여행을 갔다고 들었는데, 아니었습니까?”
익숙하도록 나직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스산하게 들려왔다.
분명 화가 났다. 아니면 심사가 뒤틀려 있는 게 분명했다.
고개를 돌려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기가 두려울 만큼, 심장이 초조하게 두근거렸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예상이 되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