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오늘은 흑막이 전쟁터로 떠나는 날이었다.
굳이 직접 가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것에 가까웠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내게 어떤 의도로 그런 진실 같은 거짓말을 내뱉은 건지는 알아볼 필요성이 있었다.
지금 내가 성벽으로 향한 건 꽤나 충동적인 발걸음이었다.
얼굴을 보는 건 싫었지만 그래도 떠나는 게 맞는지 확인은 하고 싶었다.
그냥 떠나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성벽으로 올라오자, 강한 바람이 나부꼈다.
“황녀님!”
“…….”
떠나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흑막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거리가 제법 있어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꼭 눈이 마주쳤던 것 같았다. 그리고 나를 향해 웃음을 지었다.
전부 가식 덩어리였다. 그의 미소가 역겹게 느껴졌다.
“……거짓말쟁이.”
“네?”
그래도 앞으로 오랫동안은 보지 않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숨이 트였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낯짝을 안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틈에 원작대로 흘러가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어쩌면 흑막이 나와의 결혼에 집착하는 건, 원작처럼 황좌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황족들이 안심할 수 있게 해두고, 뒤통수를 때릴 생각으로 구는 걸까.
이번 전쟁에 참여하는 것도 결국 그와 비슷한 이유일까?
“…유모, 돌아가자.”
“네. 황녀님.”
어차피 소중한 오빠나 아빠가 직접 가는 전쟁이 아니었다.
죽어준다면 오히려 고마운 존재인 흑막이 참전하는 전쟁이었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 생각하면 되는데.
“황녀님……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없어.”
“제가 전부 들어드릴게요. 폐하께는 비밀로 해드릴 테니 안심해도 돼요.”
“…유모. 유모는 내가 지크베르트 공작과 결혼한다는 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음…… 황가에서는 어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저는 황녀님께서 행복하시길 바라죠.”
“내…… 행복?”
“네. 지크베르트 공작과 결혼해서 행복하다면 옳은 선택이고, 불행하다고 생각되면 후회가 남을 선택이죠.”
애초부터 이건 패배할 전쟁이었다. 그러니 그와 결혼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자꾸 드는 이 불안감은 뭘까.
“유모. 내가 지크베르트 공작과 결혼한다면 그건 황실에 있어서는 좋은 선택이지만, 나를 위한 좋은 선택은 아니야.”
“저는 황녀님께서 행복하시길 바랄 뿐이지요.”
“…….”
“모든 선택은 황녀님이 하시는 거니까요.”
선택은 내가 하니까. 선택에 대한 책임도 내게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거지?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거지?
“나는 일단…….”
유모의 말을 듣고 일단 방에 있는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역시 이불 밖은 위험한 게 틀림없었다.
이불 안에만 있으면 이렇게 편안한데.
“유모. 나 도망칠까?”
“어디로요?”
“……아니면 그냥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나쁘지 않죠. 여행이 황녀님께 기분 전환이 되어준다면요.”
“……그럼 갈래.”
어차피 시간은 충분하니까. 여행을 떠나서 이 싱숭생숭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정리하면 될 테니까.
아빠랑 오빠는 바쁜 사람들이니까 나랑 함께 가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겠지.
나는 어린아이로 남아 있고 싶지만 두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냥 두 사람이 걱정하지 않게 황실 소속의 별장들을 돌아다니면서 예쁜 경치를 보며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다가 내가 찾는 사람을 보게 된다면 더 좋겠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빠한테 말하고 올래. 그래야 내일 출발할 테니까!”
“……황녀님.”
“유모는 휴가 줄게. 어차피 혼자 여행하고 싶었거든. 그냥 호위들만 붙이고 가려고.”
어차피 어려운 요구도 아닌 만큼 아빠한테 말하면 당연히 허락해줄 요구였다.
바로 망설임 없이, 아빠가 일하고 있을 집무실로 향했다.
“아빠!”
“율리아?”
“여행 다녀올래요.”
“여……행?”
“네! 물론…… 호위는 대동할게요!”
“얼마나 떠나 있을 생각이니?”
“두 달 정도는 여행 다니고 싶어서요.”
“네가 지크베르트 공작이 내민 요청을 수락하지만 않았다면…….”
“아뇨. 그것 때문은 아니에요.”
다만,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한동안은 여행을 다니면서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가족을 지킬 수 있는 계책이 떠오를 수도 있을 테니까.
“그냥…… 지금까지 너무 황성에만 있었던 것 같아서, 기분 전환을 하고 싶어서요.”
“……혼자 갈 생각이니?”
“호위는 붙여주세요.”
“시녀도 데려가는 게 좋을 거다.”
“그럼 그렇게 할게요.”
누구와 함께 가든 괜찮으니까. 어차피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여기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여기가 내 집이니까.
“두 달 안으로 꼭 돌아올게요.”
“그래. 네가 원한다면 더 오래 있어도 된단다.”
“괜찮아요. 빨리 돌아올 수 있으면 빨리 돌아올게요. 아빠는…… 많이 바쁘죠?”
“……일만 없었다면 너와 함께 가줄 수 있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이제 저는 가볼게요!”
“그래.”
나가는 길에 오빠 얼굴이 떠올랐다.
적어도 두 달은 못 볼 텐데 오빠한테 인사는 하고 가야 될 것 같아 내 궁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렸다.
오빠도 분명 아빠만큼 바쁘지만, 인사도 없이 여행을 가면 분명히 삐질 사람이었다.
그러니 오빠한테 찾아가야겠지.
아빠야 내가 자리를 오래 비워도 괜찮지만 오빠는 내가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것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니까.
아마도 내가 없으면 불안감을 느끼는 거겠지.
“율리아?”
“오빠! 오늘 인사하러 왔어.”
“……무슨 인사?”
“나 기분 전환 좀 하러 한동안 별장에 놀러 가서 쉬려고.”
“율리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묻는 건데…… 너는 애초에 늘 쉬지 않아?”
이 오빠가? 괜히 인사하러 왔다.
“나 갈게. 나 분명 여행 간다고 오빠한테 말했다?”
“……얼마나 떠나 있을 건데?”
“아마도 한…… 두 달은 있지 않을까?”
“그래. 네가 즐겁게 놀다 오면 그만이지. 같이 가주고 싶지만…… 네가 싫어할 테니 나는 여기에 있는 게 좋겠지?”
“응.”
“매정하네. 바로 대답 나오고.”
말은 그렇게 해도 오빠는 자상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면 조심해, 율리아.”
“당연하지! 호위도 많이 데려갈 거니까. 오빠가 걱정할 일은 없을 거야.”
오빠의 저 눈은 나를 걱정해서 나오는 건지. 아니면 엄마와 닮은 나를 오랜 시간 동안 볼 수 없어서 나오는 건지.
잘 모르겠다.
* * *
“황녀님, 준비 다 됐어요. 이제 일어나셔야죠!”
“으응……? 벌써?”
역시. 행동력이 빠른 아빠.
어제 내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니까 하루아침에 전부 준비를 끝내줬네.
“……아. 아직은 좀 피곤한데.”
“마차에서 주무세요. 마차에 마법이 걸려 있어서 장시간 있어도 멀미를 하지는 않을 거예요.”
“……응.”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막상 이 현실을 마주하니 스케일이 정말 남다르다는 걸 느꼈다.
무슨 호위 기사들의 수가 저렇게 많은 건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호위가 많아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그리고 그만큼 아빠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니 좋게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호위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흑막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방법은 이제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내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아니, 내가 왜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패배할 전쟁인데 왜 승리해서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이래서 무의식이 무섭다는 거구나.
“뭐…… 어차피 지금은 여행을 가니까.”
그냥 즐기자는 마인드로 다녀오면 되겠지.
휴식을 취한다는 마음으로 여행을 다녀오면 되지 않을까.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나만을 생각한 채.
마음을 비우고 돌아오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흑막은 전쟁터에 있을 테니 그동안은 걱정할 게 없으니까.
그러니 흑막이 오기 전에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는 게 좋겠지?
그냥 나만 생각하자.
“……하.”
불안감에 손으로 머리를 꽉 부여잡았다.
“진짜…… 나 어떡하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도 안 되지만. 만약 흑막이 정말 전쟁을 이겨서 귀환한다면?
정말 도망갈 퇴로가 없었다. 아니, 딱 하나가 있긴 했다.
이승 탈출! 내 죽음! 내가 죽는 게 도망가는 유일한 퇴로라니.
흑막한테 온전히 묶이게 되면 몸이 성할 날이 없겠지. 전에야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 그 정도에서 끝난 거겠지만.
눈을 감으니 내 미래가 보였다. 아주 깜깜한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암담한 미래가 나를 반겼다.
영원한 밤을 맞이하는 게 율리아라는 캐릭터의 엔딩이지만. 그래도 나는 더 살고 싶었다.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이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담긴 달콤함에 허우적거리면서 살고 싶었다.
“살고 싶어.”
마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어여쁜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었다. 아주 맑은 하늘에 시선이 빼앗겼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꼭 살아남을 거야!
“죽고 싶지 않아.”
나와 내 가족들이. 베아트리스 황족들의 결말이 원작의 엔딩을 맞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만약 흑막을 죽여야만 원작의 엔딩을 피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럴 생각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쩌면 흑막과의 결혼은 가까이서 그를 감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일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너무 우울해하지는 말자.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냥 전쟁터에서 죽어버리면 좋겠다.”
그럼 위험할 일도 없을 텐데.
그는 모든 게 기만인 사람이었으니까. 뭐가 진심이고 뭐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인 만큼 그냥 죽어버리면 좋겠다.
혹시나 싶었다. 나를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해 믿으려고 했던 내가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이미 원작을 알면서도 그런 달콤한 거짓말에 홀라당 넘어가려고 했었다니.
정말 그 말을 듣지 못했다면 믿었겠지.
신년제 때 우리 아빠 앞에서 황가에 충성을 맹세하겠다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겠지.
하지만 이제 더는 속지 않을 거야. 그 잘생긴 얼굴에 넘어가지도 않을 거야.
“날이 좋네.”
그래도 이번 여행은 나름 재밌지 않을까? 날씨가 변덕스럽지만 않는다면 충분히 즐거운 여행이 되지 않을까.
이 불안감을 훌훌 털어내고 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함께.
이번 여행에서 내 걱정을 온전히 털어줄 수 있길 바라야겠지. 그것으로도 여행의 의미는 충분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