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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20화 (20/141)

#20화

“……정말요?”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말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어떤 여자가 세계관 미남 중 한 명이 저렇게 말을 하는데 부정할 수 있을까.

원작 속 율리아의 마음이 이해가 됐다.

내가 원작 속 율리아처럼 체스터가 흑막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로, 그를 보았다면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자신이 없었으니까.

지크베르트 공작이라는 점에서부터 황녀가 먼저 좋다고 쫓아다니는데 황실에서는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공작 가문의 힘을 억누를 필요 없이 사위로 삼으면서 황권과 조화를 이룰 거라는 계산까지 되었겠지.

물론 딸의 행복과 더불어서.

“네. 지금도 당신을 모조리 씹어 먹고 싶습니다.”

“그……건 좀 무서운데요.”

이미 원작은 틀어졌으니까. 그러니까 기대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찾는 사람은 아무리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체스터도 원작 속 흑막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정말 완벽한 신랑감이잖아.

솔직히 황가의 일원으로 그 의무를 다하자면 황녀의 부군으로 체스터만큼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남주인 이드리안 블레어 소공작은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긴 했지만, 황실 입장에서는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이 더 적합했다.

블레어 공작가 역시도 명문가라고 해도 참전은 거의 하지 않았던 만큼 황가에 있어서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지크베르트 공작가는 조금 달랐다.

현재 가주인 체스터 지크베르트가 지금까지 총사령관으로 참전한 전쟁은 모두 승전고를 울렸던 만큼,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입지는 블레어 공작가의 입지보다 커졌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적당한 시기에 나름대로의 명분만 있다면. 원작처럼 황실의 역사를 아니, 제국의 이름을 다시 쓸 수 있었다.

그런 위험 요소를 정말 결혼이라는 두 글자에 속박할 수 있다면?

“율리아. 저 외의 남자는 생각하지 마세요.”

죽이지 못한다면. 아니 죽지 않는다면. 차라리 황가에 복종시키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그게 내 가족을 지킬 수 있고 내가 소속된 황실에 안정을 줄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모두의 평온을 지킬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안 했거든요?”

“네. 믿어줄게요.”

“이만 갈 거예요.”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린 순간 체스터는 내 팔을 잡아당겨서 내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그러고는 내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여름이 오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전쟁을 그렇게 빨리 끝낼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어차피 오래 끌면 불리할 테니까요.”

“…….”

“그리고 조금이라도 당신이 빨리 보고 싶을 테니까요. 당신 생각이 많이 날 겁니다.”

체스터는 나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나는 그의 진심을 확신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데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의 품은 이렇게나 따뜻한데. 한 번 정도는 믿어도 괜찮지 않을까?

정말 체스터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되지 않을까?

“율리아. 여름이 오기 전에 돌아오면 그때는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할 겁니다.”

“……네?”

“돌아갈 생각이 없다면 여기서 이 이상을 해도 되겠습니까?”

귓가에 나직하게 들려오는 그의 속삭임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행히 그의 품에 갇혀 있어서 체스터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보지 못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분명 내 얼굴을 불타는 고구마 같을 테니까.

“율리아. 키스해도 됩니까?”

“네?”

아니 물론…… 키스가 뽀뽀 그 이상이기는 한데.

음…… 체스터는 키스를 생각하고 한 말이었구나. 나만 또 쓰레기 같은 생각을 했지.

“역시…… 안 되는….”

에잇! 일단 저지르고 보자!

체스터와 살갗을 부딪치는 건 싫지 않았다. 거부감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좋았다.

그의 얼굴 탓인 건지. 아니면 그에게 흔들리고 있는 내 마음 때문인지.

쪼옥.

체스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 짧게 입을 부딪쳤다.

“율리아?”

“키스……해도 된다고요.”

놀란 것처럼 보였던 그의 표정은 이내 나른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왠지 부끄러워서 노골적인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율리아. 눈 감아요.”

체스터의 말대로 눈을 감자 입술 위로 말캉하고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입술을 살짝 벌리자,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내 몸이 휘청거리자 그의 손이 허리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다른 손으로는 내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꼭 연약한 유리 공예품을 건드리는 것처럼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툭.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무언가가 등 언저리를 간지럽혔다.

“흣……!”

입술이 살짝 떨어지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다시 체스터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쳤다. 다정하게 잡아먹히는 기분이 들었다.

거칠거나 난폭하고 제멋대로라기보다는 상냥하고 자상한 키스에 가까웠다.

그와 동시에 입 안을 헤집는 그의 혀에서는 짙은 집착과 강렬한 소유욕이 느껴졌다.

조금의 틈도 놓치지 않겠다는 갈망. 나를 원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싫지는 않았다.

그런 그의 목에 두 팔을 휘감았다.

좀 더 오랫동안 숨결이 오고 갔다. 달뜬 숨이 터져 나올 때까지 입술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아, 하…….”

숨이 턱 끝까지 차서야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율리아.”

나직한 음성으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상냥하게 내 뺨을 쓰다듬는 그의 손에서 애정이 느껴졌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너무 예쁩니다. 꼭 잡아먹고 싶게.”

핏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어쩌면 이 손길은 애정이 아니라 욕망을 참아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일렁였다.

“그……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러다가는 위험해질 것 같아, 그에게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다.

얼굴이 뜨거웠다. 아마도 엄청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악!”

“……레이디?”

누군가와 부딪힌 것 같았다. 이 목소리는 남주인 것 같은데.

“아, 이제는 황녀 전하라고 불러야 옳은 거겠죠?”

“블레어 소공작님.”

“편하게 이드리안이라고 불러주셔도 된답니다.”

“소공작님은 왜 테라스로 왔나요?”

“오랜 친우를 오늘이 아니면 볼 수가 없을 것 같아서요.”

아, 체스터를 만나러 온 거구나.

아마도 둘은 원작의 내용에 의하면 아직은 친구 사이가 맞을 터였다.

체스터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많은 교류가 있었다고 들었으니까.

그리고 여주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둘의 사이는 원만했다니까.

그러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아직 둘 모두가 여주에게 사랑에 빠지거나 집착하기 이전이니까.

“음…… 이런 걸 물어보면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혹시 체스터와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지크베르트 공작님과요?”

“말해주시기 곤란하다면…… 말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원나잇을 한 관계? 지금의 관계를 정의하자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아직은.

“만약…… 이번 전쟁에서 정말로 승리하고 귀환한다면 모두의 앞에서 공표했듯…… 결혼하게 되겠죠.”

그뿐이었다. 체스터와 나는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었다.

이번 전쟁을 패배하거나 전쟁에서 그가 죽는다면 아무것도 아닐 그런 관계.

파도가 휩쓸면 사라질 모래성 같은 관계일 뿐이었다.

아까 그와 키스했던 이유는 그저 그 잘생긴 얼굴에 홀려서 그랬을 뿐이야.

“그런가요…… 제가 실례했습니다, 황녀 전하.”

다시 돌아가려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그 순간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건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리 장식 하나를 아까 그 테라스에서 흘린 게 분명했다.

다급히 돌아갔다.

그 안에서 무슨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저 안에는 체스터와 이드리안이 있을 터였다.

나도 모르게 숨어버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너…… 그분을 사랑하는 게 맞아?”

그분? 혹시 나를 지칭하는 걸까?

내게 사랑한다고 했던 말들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엿듣는 게 나쁜 거라는 걸 알면서도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어쩌면 의문스러운 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순간이니까.

“사랑?”

“그래. 네가 했던 행동들이 보통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다르니까. 오늘만 해도…….”

“하…… 아하하!”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저 웃음의 주인은 흑막인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들었던 만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웃음소리였으니까.

하지만 왜 웃는 거지?

“아…… 모처럼 웃어보네. 내가 지금껏 그렇게 보였나?”

불안했다. 체스터가 어떤 말을 내뱉을지 예측할 수가 없어서.

“……그럼 아니었어?”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할 사람으로 보이나?”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하며 내려앉았다.

사랑한다는 그 모든 달콤한 속삭임들은 거짓이었다. 내게 했던 그 모든 행동들도 가식인 거겠지.

더는 들을 것도 없었다.

그가 내게 진심이라고 생각하면서 찰나에 흔들렸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유린당할 마음도 없는데 마음을 유린당한 것 같다는 착각이 일렁였다.

지금은 머리 장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들키기 전에 이 자리에서 달아났다.

“……나쁜 자식.”

믿으려고 했는데. 사랑한다는 그 말을 믿으려고 했는데.

아니, 애초부터 그가 날 사랑한다는 건 착각이었던 건데. 나도 정말 미련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근데…… 거짓말이었던 거야?

“정말……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

왜 두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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