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황제 폐하께는 미리 말씀드렸으나,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간청하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불안감에 고개를 돌려서 아빠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빠의 표정을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저 흑막의 생각도 모르겠지만, 아빠의 생각도 읽을 수가 없었다.
“이 전쟁에 승리하면, 신 체스터 지크베르트를 황녀 전하의 부군으로 삼아주십시오.”
저 발언에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불길한 예감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는 걸까.
다급히 아빠를 보았지만 아빠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아까 아빠와 흑막이 같이 들어온 이유가 공식적인 자리에서 공표하기 위함을 상의했기 때문이 아닐까.
“율리아. 네가 저 요구를 원치 않는다면 거절할 수 있단다.”
이미 전에 말을 다 끝낸 상태라서 부정하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기회와도 같았으니까. 흑막이 죽어서 안전해질 수 있는 기회.
그러니까.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원작의 큰 틀이 변할 리는 없을 테니까.
이 전쟁이 승리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냥 수락하면 됐다. 그런데 왜 입이 떨어지지가 않는 건지.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서야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요청을 승낙하겠습니다.”
이미 사전에 끝난 말이었잖아? 그러니까 내 선택에 대해 후회하면 안 돼.
어쩌면 알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패배할 게 뻔한 전쟁을 흑막이 이기고 돌아온다면 내가 잡아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실은 흑막이 전쟁터에서 죽어주는 게 내게 있어서는 가장 좋은 엔딩이지만 흑막인 만큼 쉽게 죽지는 않을 걸 알았다.
그러니 그저 패배하고 돌아오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다.
“황녀가 그 요청을 수락하였으니 반대할 이유가 없지. 허락하마.”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들지? 왜 이렇게 초조한 느낌이 드는 걸까.
“다들 파티를 즐기도록.”
아빠의 말을 끝으로 조용했던 파티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불편했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혼자 가도 충분해요!”
“그래.”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면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신분이 신분인지라 밖이 아닌 테라스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테라스에서 차가운 공기를 맞으니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등 뒤로 검은 인영이 보였다.
“누구?”
“율리아.”
흑막이었다.
“공작님?”
“이렇게 예쁘게 하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이 모습을 봤다는 걸 생각하니…… 기분이 아주 언짢습니다.”
“공작님은 아직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거 잊지 마세요.”
“처음부터 당신은 제 것이라고 낙인을 찍어둔 게 다행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는 무척이나 애틋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질투, 열망, 소유욕이 그의 핏빛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적어도 제가 없을 때 날파리들이 당신한테 꼬이지는 않을 테니까.”
“……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제 나가세요.”
“한동안은 보지 못할 텐데…… 아쉬워서요. 조금이라도 당신을 두 눈에 담고 싶습니다.”
정말 말 하나는 잘했다.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아니, 오히려 진심이길 바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말들이었다.
계속 저렇게 구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원작이 뒤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흑막이 여주한테 반응을 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나와 황족들은 죽임을 당할 위협에서 벗어난 걸 수도 있었다.
그런 희망을 품었다.
“공작님.”
그 희망을 확인받을 수 있는 수단은 하나였다.
어쩌면 나와 내 가족의 운명이 바뀐 원작의 흐름과 함께 틀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무서운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불안감의 대상은 되지 않을 테니까.
“진심으로 대답해주세요.”
“무엇이 궁금합니까?”
“……진심으로 대답해주겠다고 약속해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내 손을 그가 가져가서는 뺨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서는 뺨을 내 손바닥에 부비적거렸다.
그것도 나른하게 웃음을 지으면서.
“당신의 질문이라면 기꺼이 대답해줄 테니까요.”
내 손목에 입을 맞추며 꼭 마치 유혹하는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오로지 나만이 담겨져 있었다.
“공작님은 저를 사랑하나요?”
나 역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거짓말을 하는지 아니면 진심으로 대답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당연히 사랑합니다.”
믿어도 될까?
“제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지금도 못 믿겠어요.”
“율리아. 제가 어찌하면 당신한테 신뢰를 줄 수 있을까요?”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쌌다. 그는 허리를 숙여서 얼굴을 내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얼굴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당장이라도 숨결이 닿을 것만 같이.
“종이 쪼가리로는 절대로 신뢰를 줄 수 없을 것 같고.”
“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도 아니거든요?”
다급하게 손으로 그의 입을 덮었다.
대충 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이 돼서, 사전에 원천봉쇄를 했다.
그런 의도로 입을 막은 건데, 그의 혀가 내 손가락 마디마디를 훑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다급하게 손을 빼내려고 했는데 그가 내 손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손끝마다 입을 맞추며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음산한 기운을 풍기는 것 같았다.
“신뢰를 주는 중이죠.”
“이게 무슨 신뢰예요?”
“그럼 믿음을 주는 중이라 하겠습니다.”
아니, 그거나 이거나 개소리잖아!
“율리아. 아니면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까?”
“……뭐가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부족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저 나른한 웃음 뒤에는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까.
“제 애정에 대한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확신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 손목을 놓고서는 내 턱을 붙잡았다.
흑막과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 시선을 마주치려면 아니, 얼굴이라도 보려면 목이 뒤로 꺾일 것처럼 들어야 그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웃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노골적이고 짙은 열망을 담고 있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요.”
그 말을 끝으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면 그는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피할 수도 없게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붙잡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뒷목을 감쌌다.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겹쳐진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서 이대로 질식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입 안을 구석구석 헤집어댔다. 정신을 차리기 버거울 정도로.
더는 숨을 참기가 어려워졌을 때 그의 어깨를 밀쳐내고서야 신선한 공기가 입으로 들어왔다.
“하아, 하…….”
손등으로 입술을 훔쳤다.
그의 이런 막무가내인 점이 싫었다. 입술이 붓지는 않았을까 괜한 걱정을 하게 된다.
“율리아. 제 진심이 전달되었기를 바라죠.”
“……진짜!”
“사랑하냐고 물어봤잖아요.”
그 질문을 먼저 한 사람은 나였고 너는 그 질문에 긍정했지만 나는 그걸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는 이런 방식으로 내게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런 저급한 방식으로?
아니야. 내가 여주가 아니니까 이렇게 막무가내로 구는 거야. 진짜 사랑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여주였다면. 아니, 내가 네가 찾는 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굴었을까? 왜 나는 비참할까?
“율리아. 제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는 사람처럼 보이시나요?”
“……그쪽이 저를 사랑하는 건지. 제 몸을 원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으니까요.”
그는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내 아랫입술을 쓸었다.
아니, 무언가를 닦아내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입술이 번졌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이게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까? 저는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나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버님과 형님께 돌아가야 할 텐데 입술이 번진 채로 간다면.”
“애초에 그쪽이 안 건들면 됐잖아요!”
“……안 건들기에는 너무 건들고 싶은 얼굴이라서요.”
“…….”
“율리아가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당장이라도 잡아먹고 싶을 만큼.”
흑막 주제에 이렇게 잘생기면 반칙 아닌가. 없던 마음도 생기게 만들 법한 얼굴이었다.
물론 내 취향의 얼굴은 오빠지만 그렇다고 흑막의 얼굴이 오빠보다 모자란다는 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세계관 최고 미남이라 봐도 됐다.
어차피 원작 남주는 운명대로 여주와 이뤄질 게 뻔하니까. 흑막을 내가 가질까?
하지만 흑막은 위험 요소가 너무 컸다.
가장 최고는 그냥 얌전히 죽어버리는 건데 비중이 워낙 많은 역할이라 쉽게 죽지는 않을 거였다.
정말 어떤 선택이 옳을지 고민이 되었다.
“율리아.”
“왜요.”
“당신을 사랑한다는 건 진심입니다.”
정말 흑막과 관계를 맺은 게 원작의 내용을 비튼 거라면 내 가족들이 죽는 원작의 내용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단, 흑막이 정말로 내게 사랑한다고 하는 저 말이 진심일 경우에만 적용이 되는 거였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흑막을 죽여야만 했다.
그게 나와 내 가족들이 살길이었으니까. 나는 흑막보다 나와 내 가족들이 더 소중하고 우선이었으니까.
“정말 믿어도 돼요?”
“네. 전쟁터에 가면 당신이 그립고 보고 싶을 겁니다. 전쟁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찰나 동안 볼 수 없다는 것이 무척 두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