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뒷걸음을 치면서 흑막에게서 거리를 두며 멀어졌다.
그의 눈빛이 너무 위험해 보여서.
“율리아.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
“누가 본다면 제가 당신을 해치는 줄 알겠습니다.”
당장은 아니겠지. 하지만 단 한 순간이라도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됐다.
“경계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요.”
“…….”
허어? 정말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뭐, 저런 마인드를 가졌으니 원작 속 흑막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율리아.”
“왜요.”
“이번 신년제에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가 흑막한테 말한 적은 없는데.
그리고 왜 내가 불안감을 느끼게 하는 웃음을 짓는 거지?
보통 사람이 웃으면 안심이 되거나 편안해져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해지는 걸까.
갑자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제게 숨기는 게 많은 것 같아서요.”
“……숨긴 게 아니라 말하는 걸 깜빡한 거예요.”
“그렇다고 해두죠.”
전혀 믿지 않는 눈빛이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는데 저런 반응이라 짜증 났다.
저런 반응을 보일 걸 알았다면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만 했을 텐데.
“율리아. 지금은 숨기는 게 있어도 눈감아주겠지만 제가 돌아오고 나서는 숨기는 게 없어야 할 겁니다.”
“……딱히 숨기는 건 없는데요.”
“제가 죽거나 전쟁에서 패배할 거라는 생각으로 저 몰래 애인을 만든다거나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네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올 일은 없을 테니까.
“제가 돌아왔는데 당신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면 그 사람을 죽여 달라는 요청으로 알아듣겠습니다.”
“네? 뭐, 뭐라고요?”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이 저렇게 쉽게 나올 말인가.
“제가 왔을 때 당신한테 애인이 생겨 있다면 그 사람을 죽이겠다고 말했습니다.”
“…….”
“당신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 하나뿐이니까요.”
여주에게 향해야 하는 저 집착이 왜 나에게 향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흑막을 쫓아다니지 않는 그 순간부터 원작이 조금씩 바뀌긴 했겠지만, 그 여파가 이런 식으로 드러나면 곤란했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언제 칼을 들고 황가의 일원들을 죽일지 몰랐다.
원작 속 반역도 정말 갑작스럽게 일어났던 거니까.
그는 전쟁의 패배로 인해 황가의 힘이 약해졌을 때 반역으로 황족들을 전부 죽인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니 아직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쩌면 원작보다 더 비참한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만약 애인을 만들어도 제가 오기 전에 처분한다면 뭐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
“그러니 제가 귀환해서 손에 피를 묻힐 일을 만들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네.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서는 제 손에 피가 묻을 일 없도록 협조해주세요. 부인.”
“아직 결혼 안 했잖아요! 왜 벌써 한 것처럼 굴어요?”
“할 거니까요. 당신이 걸린 전쟁을 패배하고 돌아올 수는 없죠.”
“하아…….”
정말 어디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라도 해야 할까. 정말 불안해서 살 수가 없었다.
아니면 몰래 자객이라도 매수해서 슥삭할까?
아니야. 그래도 명색이 흑막인데 자객 정도는 생포해서 모진 고문을 통해 내가 사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겠지.
“돌아가세요.”
“율리아. 당신께 승리라는 영광을 안겨드리겠습니다.”
“필요 없거든요?”
“싫습니까?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전혀 안 좋아하거든요!”
그는 내 손을 가져가더니, 손등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벌써 헤어지기는 아쉽지만 이만 가보도록 하죠. 제가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됩니다.”
“절대 찾아갈 일 없거든요?”
“공작저에 오면 아무런 제약 없이 제게 올 수 있을 테니 기억하세요.”
“……그런 건 기억하고 싶지 않거든요!”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다. 어차피 그 근처는 가지도 않을 텐데.
“그러니 어서 돌아가요!”
“그리 재촉할 필요 없습니다, 율리아.”
“……재촉하는 거 아니거든요.”
“그냥 가기에는 좀 아쉬워서요.”
아쉽긴 뭐가 아쉬워?
또 무슨 개수작을 부리려고! 그냥 얌전히 꺼져주면 안 되는 건가.
그 순간 무언가가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뭐지 싶어서 고개를 위로 들자 그는 살짝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급히 두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렇게까지 제게서 도망칠 필요는 없는데.”
“그대로 돌아가요!”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왜 입맛을 다셨는데요?”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죠. 뭐, 어제도 사실 부족했지만 저는 다정한 사람이니까요.”
다정은 무슨! 네가 다정한 사람이면 세상에 있는 모든 다정한 사람은 전부 얼어 죽었나.
어이가 없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인간을 돌려보내려면 헛소리에 대답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다음에 봐요, 율리아.”
“……다음에도 보기 싫은데요.”
* * *
벌써 신년제가 다가왔다.
태어난 이래로 처음 참여하게 된 신년제…… 아니, 행사인 만큼 떨리긴 했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는 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세실의 생일 파티에 모였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곳은 가보지 않았다.
하지만 신년제는 국가적인 행사인 만큼 아주 사람이 많을 테니 걱정이 됐다.
이런 심란한 나와는 다르게 나를 담당하는 시녀들은 무척이나 신이 난 모양이었다.
“황녀 전하! 드디어 묵혀두었던 저희의 실력을 드러낼 수 있겠어요!”
“이번에 황제 폐하께서 신년제 때 입으라며 보내신 드레스로 할까요?”
“일단 황녀 전하의 눈동자처럼 예쁜 보석들부터 가지고 올게요!”
분명 분주한 건 시녀들이었는데, 왜 피곤하고 힘든 건 나 같지? 기분 탓인가?
아침부터 목욕에 힘을 썼더니 벌써부터 피곤함이 느껴졌다.
“황녀 전하! 가만히 계세요! 움직이시면 번져요!”
“……응.”
얼마나 더 눈을 감고 있어야 하는 건지. 간지러움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한참을 눈 감고 있었더니 졸음이 쏟아지려고 할 때가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황녀 전하! 다 되셨어요!”
“와아……! 너희 되게 실력이 좋구나!”
“이제 드레스와 어울릴 만한 귀걸이랑 목걸이를 고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녀들은 다양한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를 진열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3분의 1 정도는 흑막이 준 걸 테고 3분의 1 정도는 아빠가 나머지는 오빠가 준 거였다.
최대의 난제였다.
나는 어떤 장신구가 누가 준 건지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내 기억력은 생각보다 좋은 편이 아니라서 뭐가 누가 준 건지 기억을 잘 못했다.
여기서 나는 흑막이 준 것만 선택하지 않으면 됐다.
“그래도 신년제니까 아빠가 선물로 준 걸 하고 가는 게 좋겠지?”
“그럼 이걸로 할까요?”
뭐, 내가 보는 눈보다는 시녀가 보는 눈이 더 좋겠지.
내 눈을 믿지 말자. 내 안목은 믿을 만한 게 못 되니까. 신뢰해서는 안 되는 안목이니까.
“황녀 전하……!”
다들 감격에 찬 목소리였다.
늘상 늘어뜨렸던 머리카락은 깔끔하게 위로 틀어 올렸다.
그리고 은과 투명한 보석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귀걸이와 한 세트인 목걸이를 착용했다.
노출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적당한 연보라색과 짙은 보라색이 적절히 어우러진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모습이 거울에 비춰졌다.
분명 내가 맞았지만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이번 신년제의 주인공은 당연히 황녀 전하이시지요! 황녀 전하보다 더 높은 신분을 가진 여성은 세상에 없으니까요!”
“…고마워.”
이런 칭찬은 어색했다.
“율리아.”
밖에서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적절한 때에 맞춰서 오빠는 도착했다.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기로 했으니까.
“오빠!”
“율리…….”
나는 오빠가 꾸민 모습은 많이 봤지만 오빠는 내가 꾸민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으니 놀랐겠지.
어쩌면 꾸민 내 모습에서 엄마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율리아. 예쁘네. 하늘에서 천사가 떨어진 줄 알았어.”
오빠는 에스코트를 해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감언이설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늘 내게 예쁘다고 해주지만…… 역시 예쁘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았다.
“……어머니도 지금의 너를 살아서 보셨다면 좋아하셨을 텐데.”
“오빠.”
오빠의 손을 꼭 붙잡고 이동했다.
문 앞에까지 와서야 괜히 온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감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손을 꼭 잡고 들어갔다.
내가 처음으로 참석하는 외부 행사였으니까.
“그리고 율리아. 아버지는 일이 끝나는 대로 올 테니까. 아마 우리보다는 조금 늦게 도착하실 거야.”
“……응.”
“긴장하지 말고. 긴장할 게 뭐가 있겠어.”
“응!”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간 순간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 같다는 느낌이 고스란히 와닿았다.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얼어붙을 뻔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인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쏠리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율리아. 버티기 힘들면…….”
“아니야, 오빠. 나 괜찮아.”
“율리아. 너 전혀 안 괜찮아 보여서 이렇게 말하는 거야.”
“……괜찮아. 아빠가 오면 괜찮아질 수도 있잖아?”
“그래. 대신 옆에 계속 있어 줄게. 그러니 그렇게 겁먹은 표정은 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네가 오늘의 주인공일 테니까.”
오빠의 손에 이끌려, 상석으로 향했다. 그래도 오빠가 있으니까. 의지는 되긴 했다.
“율리아. 어쩌면 여기서 네가 그토록 기다린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지.”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그 애는 분명히 귀족이었다. 입고 있었던 옷의 재질이 평민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냥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어.”
아는 척은 하지 않을 거야.
그 애가 먼저 아는 척을 하는 게 아닌 이상 내가 그 애를 알아본다 하더라도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아는 척을 하거나 말을 거는 모습을 보고 흑막이 죽여 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래. 신년제에는 대부분의 귀족들이 참여하니까 잘 찾아봐.”
“응.”
그때 아빠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국의 태양, 지고하신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문이 열리면서 아빠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을 보고 조금 당황했다.
아니, 왜 흑막이 아빠랑 같이 들어오는 거야?
나만 놀란 건 아니었는지. 귀족들은 술렁거렸다.
하필 우리 아빠랑 왜 같이 들어온 건지. 불안했다. 아니, 괜한 걱정이겠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아빠가 가장 상석에 앉자 흑막은 계단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왜 저 행동에서 불길함이 느껴지는 걸까.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었다. 불안했다.
그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향해 살짝 웃음을 지었다.
왜 저 웃는 얼굴이 이렇게 불길하게 느껴지는 걸까.
“신 체스터 지크베르트. 황가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원작에서 이런 장면이 있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