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눈을 뜬 순간 어제 있었던 일들이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도 정말 미쳤다. 술기운도 아니었고 온전한 맨정신으로 흑막과 또 그렇고 그런 일을 반복하다니.
몸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오히려 전보다 더 아팠다.
“윽!”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보이는 곳에는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해서 다행이었다.
아니, 이게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가?
손가락만 까딱할 정도의 힘만 남아 있었다. 정말 침대 신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정은 무슨 다정인지. 내가 알고 있는 다정의 정의가 잘못된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다정하긴 개뿔.”
역시 절대로 결혼하면 안 되는 이유가 추가됐다.
결혼하면 지금보다 더 무식하게 굴 게 뻔하니까.
소중하게 대해 준다는 것도 이번에 전혀 느끼지 못했으니까. 오히려 소유욕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더럽게 아프네…….”
움직이는 건 포기했다. 한참 동안 이러고 있으면 차차 움직일 수 있겠지.
해가 중천에 떠 있는 걸 보니 아침은 지난 모양이고 아마 점심이겠지.
가끔씩 오늘처럼 늦게까지 잔 적이 있었으니 그리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터라 좀 더 빈둥거리는 것을 선택했다.
아…… 정말 움직일 힘이 하나도 없었다.
“황녀님!”
“……나 일어났어.”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께서 황녀님을 뵙고 싶다며…….”
“나 잔다고 해.”
“……이미 그리 말했죠. 그런데 황녀님이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해서요.”
그렇게 어젯밤 괴롭힌 걸로는 모자라 낮에까지 찾아오다니. 악마가 따고 없었다.
“지금 나갈게. 일단 옷부터 좀 갈아입어야겠어.”
지금 입고 있는 슈미즈 차림에 숄만 걸치고 가도 별 상관없지만 남들의 시선을 생각해야겠지.
이미 그와는 알몸까지 다 본 사이지만, 가족도 아니고 약혼자도 아니니 잠옷 차림은 더더욱 안 되겠지.
“일단 응접실로 안내했습니다.”
“응. 잘했어. 그리고 너무 걱정 마, 유모. 내가 해결할게.”
“하지만…… 황녀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손이 엄청 떨리고 있는데요……?”
“티…… 나?”
나름 잘 숨긴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황녀님. 이렇게 떠실 정도면…… 그냥 안 만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내가 버티고 안 나가면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릴 사람이야.”
아니면 또 밤에 찾아올지도 모르고.
밤에 찾아오는 것만큼은 더는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대체 왜 대낮에 찾아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찾아온 건지. 어젯밤에 말이 다 끝난 게 아니었나.
“유모. 주변에 있는 사람들 전부 물려줘.”
“……괜찮으시겠어요?”
“안 괜찮을 게 뭐가 있겠어.”
“하지만…… 황녀님 안색이 파리하게 질려 있는 걸요.”
나 그렇게 심각한가.
어제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쉽게 알아챌 정도로 심각한 정도인 걸까.
불안하게.
“아니야…… 나 괜찮아, 유모.”
애써 유모한테 웃어주고 응접실로 들어갔다.
창밖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인간을 유혹하는 고혹적인 악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대로 홀릴 뻔했던 정신을 고개를 흔들어 바로 차렸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공작님. 왜 찾아온 거예요?”
“율리아.”
잘생긴 얼굴로 웃는 표정이 왜 이렇게 섬뜩하게 느껴지는지.
아마도 어제 저런 표정으로 끔찍하게 시달렸었지.
어제의 기억을 회상하는 순간 소름이 온몸에 오소소 돋았다.
“그렇게 웃지 마세요.”
“왜요? 혹시 제가 웃으면 설레십니까?”
“아뇨. 무서워서요.”
설렌다는 것보다는 공포를 느낀다에 가깝겠지.
“익숙해지세요. 제가 돌아온 후 저와 평생 함께 사셔야 할 테니까요.”
“……왜 온 거예요?”
“몸.”
“네?”
“괜찮은가 해서요. 다행히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제가 괜찮아 보여요?”
이게 무슨 참신한 개소리일까?
전혀 괜찮지 않은데.
지금 허리는 박살 난 것처럼 아파 죽어버릴 것 같고, 움직일 때마다 근육 하나하나가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
괜찮아 보인다고?
양심이 없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본인이 아닌가.
“전혀 안 괜찮거든요!”
“걸을 수 있을 정도면 괜찮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
기가 막혔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율리아.”
“…….”
“여름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패배하는 전쟁이었고 종전까지는 더더욱 오래 걸렸다.
그런데 그걸 여름이 오기 전에 끝내고 돌아오겠다고?
오만인지. 자만인지.
어디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뭐, 그만큼 자신감이 넘친다는 걸로 받아들이면 될까.
“네. 그게 가능하다면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불가능한 일 아닌가요.”
“…아버님께 말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뭘? 뭐를 우리 아빠한테 말을 해?
“이제 관심을 보이시네요.”
“무슨 말을 하고 오는 길이었는데요?”
“참전하겠다고 말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
“당신이 걱정하거나 불안해할 발언은 일절 하지 않았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게 안심해도 괜찮은 일이 맞는 걸까.
“제가 몸으로 한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이라서요.”
“공작님!”
“그리고 이제 그 딱딱한 호칭은 고치는 게 좋겠습니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저를 이름으로 잘 불러주셨는데.”
잘생김과는 별개로 그의 웃는 얼굴이 마음에 안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 가장 사람을 유혹하기 좋다고 하지만, 이 흑막이 웃는 건 꼭 사람을 비웃는 느낌이 다분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제 이름을 기억하고 있잖아요, 율리아.”
“…….”
“그리고 남편을 공작님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딱딱하잖아요.”
“전혀 안 그런데요.”
“제가 유일하게 제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는 사람은 당신 한 명뿐입니다. 율리아.”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어요.”
“체스터.”
“…….”
“체스터라고 불러요.”
그는 내 손을 낚아챘다.
“지금부터 이름으로 부르는 연습을 해야 결혼해서는 더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을 테니까요.”
가져간 내 손바닥 위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은 손바닥은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는 착각이 일렁였다.
다급히 그에게서 손을 내뺐다.
“앞으로도 이름으로 부를 생각 없어요.”
“흐음…….”
“지금도 그렇고요.”
“지금은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와 결혼한 이후부터는 이름으로 부르세요.”
“승리나 하고 돌아와서 그렇게 말해요.”
패배할 전쟁이니까. 내가 흑막과 결혼할 일은 없었다.
그냥 내가 기다리는 그 사람을 찾거나, 혼자 살면 될 터였다.
“황녀 전하께서는 제가 전장에서 전사하길 바라시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
“아니면 제가 전쟁에서 패배하길 바라시는 것 같은데 폐하께 참전하는 조건으로 총사령관의 자리를 받았습니다.”
“그럴 수 있죠.”
그는 내 머리카락을 가져가서는 매만졌다.
“그리고 황녀 전하께서는 제게 관심이 없으셔서 모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리는데.”
무척이나 나른한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총사령관으로 참전했던 전쟁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 없습니다.”
“…….”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율리아. 그러니 제가 패배하거나 죽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마세요.”
어떻게 내 바람을 알고 있었지?
전쟁터에서 죽길 바랐지만 그걸 흑막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는데.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던 그의 손이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흑막이 쳐놓은 덫에 걸린 느낌이 들었다. 혹시 나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건 아니겠지?
“멀쩡하게 살아서 승전보를 알리며 귀환할 테니까요.”
“…….”
“당신도 전쟁에서 제국이 승리하길 바라지 않습니까.”
“…….”
“그 바람을 제가 이루어 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네. 제가 불가능한 말을 하는 것처럼 들리십니까?”
분명 승리는 불가능한 전쟁일 텐데.
흑막이 저렇게 말을 하니까 왠지 승전보를 알리며 올 것 같아서 불길했다.
황족인 만큼 제국이 이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 좋겠지만 패배한다는 미래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흑막의 참전으로 인해 정해진 원작의 흐름이 또 무너진다면?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나를 끌어안더니 그의 품 안에 가두었다.
“전쟁터에 있을 동안 당신의 얼굴을 보지 못할 생각을 하면 그건 꽤나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
“그러니 전쟁터로 나가기 전까지는 매일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저는 싫은데요.”
“뭐, 전쟁이 끝나면 평생 보겠지만. 그래도 전장에 있을 때는 볼 수 없을 테니까요.”
평생 보기도 싫고 짧은 시간조차 딱히 보고 싶지 않은데.
물론 흑막의 얼굴은 취향을 넘어서는 얼굴이지만 그건 그거였고, 성격은 절대 내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율리아.”
“…….”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전쟁터로 떠나는 날이 오기 전까지 제 눈에는 오로지 당신만을 담고 제 머릿속에는 당신만을 각인시키고 싶습니다.”
그는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짙은 열망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꼭 나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