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맞닿은 입술 사이로 몇 번의 숨결이 들락거리며 오고 갔다.
서서히 차오르던 고양감에 넋을 놓다가 그의 손이 드레스 자락 안을 파고드는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하는 건지. 실수는 한 번…… 아니, 두 번으로 충분했다.
이런 참담한 실수를 세 번씩이나 저지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후회도 여러 번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다급히 내 위에 올라타 있는 그를 밀어내고 흐트러진 잠옷을 바르게 정리했다.
“율리아.”
“불건전한 게 뭔지는 전혀 알고 싶지 않아서요.”
“…….”
“불순한 의도가 뭔지는 아주 잘 알았어요.”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내 몸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혼을 왜 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는 짐작됐다.
잠자리만 나랑 갖고 그 외는 애타게 찾는 그 여자랑 하겠다는 거 아닌가.
키스를 너무 잘하니까. 나도 모르게 휩쓸리는 것 같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는데.
“방금 그걸로 입 다무는 거예요.”
“후…… 율리아.”
“알았죠?”
“엄청 부당한 계약 같습니다.”
“전혀요! 오히려 제가 더 손해인데?”
“…….”
“그리고 결혼은 안 돼요.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그 마음에 두었다는 새끼라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아뇨.”
이제는 그 애를 놓아주기로 했다.
“그 이유라기보다는 저는 아빠랑 오빠랑 평생 함께 살 생각이거든요.”
“그렇습니까.”
왜지? 왜 이렇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저 눈빛이 왜 내 불안감을 더 키워주는 증폭제 역할을 하는 착각이 들지?
제발 기분 탓이길 바랐다.
“오빠랑 아빠가 죽으면 평생 혼자 살면서 두 사람을 그리워할 거예요.”
“…….”
“그리고 칩거 생활을 할 거예요.”
역시. 우리 아빠랑 오빠의 목을 뎅강 해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율리아. 그거 하나 입막음하려고 계약서를 운운한 건 아닐 텐데. 제게 원하는 다른 거라도 있나요?”
“……앞으로 평생 저를 모르는 척해 주면?”
그는 대답이 뻔한 소리를 하냐는 듯 웃었다. 아마도 저거 연기겠지?
웃는 얼굴이지만 웃는 얼굴이 아니라는 건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율리아, 당연히 안 되겠죠?”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쳇. 아쉽다.
“율리아. 결혼을 나중으로는 미뤄 줄 수 있습니다.”
“……그냥 결혼 안 하면 안 돼요?”
“제 처음을 가지고 가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도 처음이었는데요.”
“압니다.”
알면서! 알면 이렇게 행동하면 안 되지!
“제가 많이 양보해서 일단 약혼부터 하죠.”
“……전혀 양보한 게 아닌데요?”
“저는 되게 많이 양보한 건데. 저는 당신과 내일이라도 당장 식을 올리고 싶거든요.”
“…….”
아무리 생각해도 흑막은 절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제정신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공작님. 저는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
“전에도 말했듯 만약 결혼을 하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아, 그럼 저는 황녀 전하께 있어서 그냥 하룻밤의 장난이었다?”
“아니, 왜 말이 그렇게 되는 건데요?”
“괜찮습니다. 황녀 전하께 있어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주 나를 비꼬는 것 같은데. 이건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나를 돌려 까는 게 맞았다.
“황녀 전하께는 하룻밤의 일탈이었을지 몰라도 저는 아니었습니다.”
“…….”
“저는 황녀 전하를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요.”
그의 목소리에서는 집착이 뚝뚝 묻어났다.
“더더욱 제 처음을 가져간 사람이라면.”
“……결혼 말고 다른 방법으로 원하는 보상이 있다면 해줄게요.”
“제가 부족한 게 있어 보이십니까?”
“아……뇨. 그렇다고 해서 제가 필요해 보이지도 않는걸요.”
“당신이 제게는 필요해 보이지 않는다라…….”
그는 아주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하지만 무얼 잘못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
“제게는 황녀 전하가 무척 필요해서요.”
“……저는 공작님이 필요 없는걸요.”
“저는 황녀 전하가 무척이나 필요합니다.”
그럴싸하면서도 결혼은 절대로 못 할 만한 핑계가 있는지 머리를 굴렸다.
아주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제가 몸이 약해서 아이를 못 가질 수 있어요. 그러면 공작가의 후계자…….”
“후계자 따위 필요 없습니다. 정 필요하다면 입양을 하면 되겠죠.”
“하지만 제가 양심이 있지, 어떻게…….”
“저를 책임지지 않으시려는 것만 봐도 전혀 양심이 없어 보이는데…… 이제 와서 양심을 운운합니까?”
칫, 한 마디도 안 진다.
여기서 양심이 있다고 하면 책임감 있게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할 게 뻔했고, 양심이 없다고 해도 결혼해야 하고.
아니, 이건 뭐 도망칠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 내 무덤을 내가 팠구나…….
“결혼 말고는 안 되나요?”
“네.”
너무 단호했다.
“제가 원하는 것도 제게 부족한 것도 단 한 분이라서.”
“…….”
나를 보는 눈빛이 맛있는 먹잇감을 보고서 아껴서 먹으려 하는 여유로운 맹수의 눈이었다.
정말 흑막만 아니었더라면. 아니, 내가 애초에 황녀가 아니었거나, 원작을 아예 몰랐다면 넘어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작을 알고 있고 거기서 흑막에 의해 비극적인 사망 엔딩을 맞이하는 엑스트라 황녀로 환생한 만큼, 지금의 저 말에 넘어가서는 안 됐다.
지금 저렇게 구는 것에서는 진심이 없을 테니까. 전부 가식 덩어리라고 생각해야 했다.
“공작님은 사랑이 필요 없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랑이 필요해서요.”
“…….”
“객관적으로 제가 뭐가 부족해서 사랑 없는 결혼을 하고 싶겠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응?
“저보다 황녀 전하께 있어서 적합한 남편감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거부하시는 건지.”
너만큼 황녀의 남편으로 부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래. 눈 딱 감고 너랑 결혼했다고 치자. 그런데 과연 황녀의 부군으로 만족할까?
원작만 하더라도 황제 자리에 앉았던 너였는데, 겨우 황녀의 부군이라는 위치가 만족스러울까.
오히려 나를 통해 황성을 장악하고 결국에는 나와 내 가족들을 모조리 죽이고서 황제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겠지.
“정말 그 쓸데없이 기다리고 있다는 남자를 기다리느라 저와의 결혼을 거부하시는 겁니까?”
“……결혼 안 하겠다고 했잖아요.”
“제가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 버러지를 죽여 데려오면.”
“하지 마요.”
정말 흑막인 그라면 충분히 그런 행동을 하고도 남았다.
나도 찾지 못한 그 사람을 나보다 먼저 찾아서 죽여 가지고 내 앞에 데려오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그러지 마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
“율리아. 제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근데 너무 거리가 가까웠다. 그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일단 제게서 좀 떨어져 주세요.”
“그건 싫습니다.”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는 은근슬쩍 아까보다 더 가깝게 다가왔다.
그런 그를 좀 더 힘을 주어 밀어냈다.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죠.”
“네.”
“해줄게요. 단.”
여기서는 승부수를 던지는 것밖에 없었다.
그는 절대로 물러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내가 거부해도 어떤 방법으로든 나와 결혼하거나. 내가 허락할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겠지.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그와 결혼을 해야 한다면 결혼하기 어려운 조건을 내걸면 될 뿐이었다.
“이번에 제국이 전쟁을 준비한다는 거 알고 있죠?”
“네.”
“그 전쟁에 참여해서 승리해 돌아와요. 그러면 결혼해줄게요.”
죽으면 좋고 어차피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이니까.
그것도 제국이 참패하는 전쟁이라는 걸 원작을 통해 읽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있는 만큼, 이건 흑막과 결혼하지 않을 절호의 수단이었다.
전쟁에서 죽는다면 위험요소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에 그건 그거대로 기쁜 거고.
살아서 온다 하더라도 패배해서 돌아올 테니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힘을 억누름과 동시에 그와의 결혼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나른하게 웃으며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습니다. 그 제안 받아들이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싫다고 잡아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순히 승낙할 줄은 몰랐다.
“단, 저도 조건이 있습니다.”
“네. 뭔데요?”
“제가 승리해서 돌아오면 그때 가서 다른 소리 하지 않고 저와 순순히 결혼해주십시오.”
“……그럴게요.”
종이에 적으려고 하는데 흑막에 의해 저지당했다.
“굳이 종이로 적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몸이 그대로 침대에 넘어갔다.
등에는 푹신한 침대가 닿음과 동시에 불안감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 의지로 방에 흑막을 들인 것부터가 아주 잘못된 선택이 아닐까.
내 다리 사이로 그의 무릎이 파고들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대충 예상이 됐다. 그날 일이 반복될 것 같다고 본능이 외치고 있었다.
“율리아. 종이 쪼가리에 적는 것보다는 몸에 각인시키는 게 나중에 다른 말이 나오지 않겠죠.”
“네……?”
“처음도 아니잖아요.”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면서 여유로운 승자의 미소를 잔잔히 머금었다.
그는 내 두 손목을 감쌌다. 더는 피할 수 없었다.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두 눈을 감았다.
아마도 오늘 밤은 길어질 게 분명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