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5화 (15/141)

#15화

“거짓말.”

전혀 그를 신뢰할 수 없었다.

“제 말이 거짓 같습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거짓인지 모르겠어요.”

“진심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뇨. 전 절대 공작님을 믿지 않아요.”

“……제가 당신한테 믿음을 주지 못했습니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나. 본인 스스로 직접 내게 말까지 했으면서.

내게 다정하게 굴었던 건 전부 연기였다고.

본인 스스로가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제 와서 뒤늦게 말을 바꾸려는 걸까.

애초부터 우리 사이에는 신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우리는 하룻밤 실수를 했을 뿐이니까.

“공작님이 제 입장이라면 진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율리아.”

“공작님은 온통 거짓되고 모순된 모습만 제게 보여주셨는데.”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당신 앞에서 진실만 말하고, 신뢰할 수 있도록…….”

“노력? 공작님이 노력할 필요 없어요.”

“율리아…….”

“그냥 우리는 여기서 끝내면 돼요. 솔직히 공작님이 제게 이러는 이유도 저는 모르겠거든요?”

“저는 당신이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거 무슨 뜻이야? 이거 되게 이중적으로 들리는데.

내가 썩은 건가?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보는 순간 이제는 머리가 아니라 마음도 복잡해졌다.

그는 무척이나 위태로운 사람처럼 보였다.

툭 하고 건들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사람의 표정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아니면 저 표정마저도 연기에 불과한 건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도 알 수도 없었다.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아니 무엇보다도 그에게 있어서 진심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지.

“율리아.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

지금 내게 애원하는 걸까. 아니면 애원하는 척을 하는 걸까.

“율리아. 제가 어떻게 하면 당신과 신뢰를 쌓을 수 있겠습니까.”

“저희 사이에 신뢰나 믿음이 존재했던 적이 있었나요?”

우스웠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는 신뢰는커녕 얄팍한 믿음조차 없었다.

언제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위태로운 관계.

그게 지금 우리의 관계였다.

“그러니 없었던 신뢰를 쌓을 필요는 없어요.”

애초에 우리는 운명도 인연도 아니니까. 원작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악연이었다.

나를 죽게 만든 원인은 너였고, 내 비극의 원인도 너였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렇게 진심인 것처럼 굴어도 네가 찾는 그 사람이 나타나면 쉬이 내게서 등을 돌릴 사람이니까.

“율리아. 정말 저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됩니다.”

“왜요? 어차피 공작님은 지크베르트 공작이고, 아주 젊고, 전쟁 영웅이기까지 한데.”

흑막인 그는 모든 걸 가진 사람이었다.

“뭐가 부족해서 저와의 결혼을 원하는 거예요?”

모든 걸 가진 그가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게 있다면 그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하나 더 있다면 황가의 혈통.

그 두 개만을 가지지 못했을 뿐. 그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저는 공작님이 저와의 결혼에 집착하는 이유를…… 저는 도저히 찾을 수 없네요.”

“율리아. 당신이 먼저 그랬잖아요.”

그는 내 손을 가져가더니 내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 행동에 깜짝 놀라서 도로 손을 가지고 왔다.

쿵쿵거리며 놀란 심장을 진정시켰다.

나를 바라보는 핏빛 눈동자에는 진득한 갈망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으려는 사람의 눈빛.

“형님보다 더 잘생긴 사람은 제가 처음이었다고요.”

억울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기억에 전혀 없는데!

아니 잠깐만. 왜 우리 오빠한테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해?

“우리 오빠한테 형님이라는 호칭 쓰지 마세요!”

“부인의 하나뿐인 오라버니인데 제게는 당연히 형님이 되실 분 아니십니까.”

“아직 결혼 안 했잖아요.”

“곧 할 거니까요.”

누구 맘대로? 절대 안 할 건데.

그래…… 그냥 적당히 무시하자. 그게 내 정신건강에 이롭겠지.

이거 가지고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테니까.

“그리고 제가 언제 그쪽이 우리 오빠보다 잘생겼다고…….”

아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걸 내가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이 없단 말이지.

“율리아. 언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혹시 그날…… 밤?”

“네. 잘 알고 계시네요.”

“어… 없던 일로 쳐요!”

“어떻게 없던 일로 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제 모든 것에 있어서 처음이었습니다.”

내 동공은 대지진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제 첫 키스도, 제 첫 경…….”

“아아악!”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그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정말 못 하는 말이 없었다! 그저 이 말을 들은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길 바랐다.

이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아빠도 오빠도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됐다.

그리고 그날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 벌써 이렇게 말을 꺼내면 어쩌자는 건지.

“약속이 다르잖아요!”

그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일부러 이러는 게 분명했다.

진짜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오빠랑 아빠가 알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을 했었는데!

흑막은 입을 막고 있는 내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아서 떼어냈다.

“율리아. 이미 약속은 파기됐습니다.”

“네?”

“상대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데, 제가 굳이 약속을 지킬 필요성을 못 느껴서요.”

이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내 입장에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율리아.”

“…….”

“입술 깨물지 마세요. 그러다가 피 나요.”

“……공작님이 원하는 게 뭐예요?”

“제가 무얼 원하는지 가장 잘 아시는 분께서 그리 되묻는다니 웃기지 않나요.”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쌌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는 강렬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설……마 저를 원해요?”

“네. 당신을 원합니다.”

“…….”

“당신의 머리카락 끝부터.”

그는 내 머리카락 한 줌을 손에 쥐더니 그 위에 입을 맞추며 진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발끝까지 전부 소유하고 싶다고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저는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거든요?”

“네. 당연히 사람이죠.”

“…….”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가 아닌 다른 놈들한테 당신의 숨결 한 조각조차 넘겨주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니었다.

“당신이 내뱉는 그 숨결 한 조각까지 모두 제가 가지고 싶습니다.”

역시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날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내가 그의 처음을 가져갔다는 것에 대한 집착에 불과했다.

그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앞으로는 찾아오지 마세요. 사과는 받아줄 테니까…… 더는 찾아오지 마요.”

“……제가 어떻게 해야 당신한테 다가가는 것을 허락해주실 건가요?”

“…….”

“율리아.”

체스터는 내 손을 붙잡더니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 밤에 찾아가겠습니다.”

“아뇨. 찾아올 필요 없어요.”

“해야 할 말이 무척이나 많지 않습니까.”

“…….”

“아버님과 형님의 눈을 피해서 저희 단둘이서만 해야 할 대화가.”

아니…… 물론 아빠랑 오빠 몰래 해야 할 대화가 있기는 한데.

왜 우리 아빠랑 오빠를 그런 호칭으로 부르는 건지.

어떤 방향으로든 흑막과 엮이고 싶지 않은데!

“그렇지만 저희는 결혼을 아직 안 했고 앞으로도 결혼할 생각 없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호칭으로 우리 아빠랑 오빠를 부르지 마세요.”

“어떠한 방식이든 저희는 결혼할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제 마음대로?”

“……제가 싫거든요!”

그를 뒤로하고 빠르게 달려서 실내로 들어왔다.

아무리 흑막이어도 공식적인 방법으로는 내 허락 없이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

비공식적으로 들어오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차라리 찔리는 구석이라도 없었으면 모를까.

그가 내 방에 들어왔다고 말하는 순간 저 입이 깃털보다 가벼운 흑막이 어떤 말을 할지 몰랐으니까.

* * *

해가 지기 무섭게 어둠이 깔리면서 테라스에서도 사람의 인영이 드리워졌다.

내 방 근처에는 사람이 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를 해두었으니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밖으로 새어 나갈 걱정은 없었다.

“이번만 허락하는 거예요.”

“네. 율리아.”

“다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오지도 말고. 허락해주지도 않을 거예요.”

“…….”

미리 준비해두었던 새하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구두 계약은 안 됐다. 이렇게 종이로 계약서를 써야 나중에 딴말이 나오지 않을 테니까.

“이리 와요.”

“네.”

“그날 밤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발설하지 마세요!”

“…….”

왜 대답이 없어?

“그 조건으로 결혼해주세요.”

“네? 아니…… 왜 결혼에 집착하는 거예요?”

“결혼이 가장 건전하고 순수한 방법으로 당신을 제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요.”

그는 내 옆에 앉았다. 아니, 왜 이렇게 바로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앉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침대가 좁은 것도 아닌데 굳이 넓은 자리를 놔두고 여기에 앉는다고?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저 외의 사람은 당신한테 머리카락 한 올조차 스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공식적인 방법.”

그는 내 뺨을 손으로 감싸더니, 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심장이 멎어버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이었다.

심장이 공포로 인해 뛰는 건지 잘생긴 얼굴이 가까이 있어서 뛰는 건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며 거리를 두려고 했다.

“그럼 비공식적이고 불건전하고 불순한 방법은 뭔데요.”

“말보단 행동이 빠를 것 같습니다.”

밀어낸 것이 무색하게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어졌다.

떨어지려고 그의 어깨를 손으로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가 내빼지도 못하도록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진퇴양난이 이럴 때를 말하는 걸까.

그의 혀가 입술을 비집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무리 밀어내려고 머리를 뒤로 움직여도 그 움직임에 따라서 입 안을 어지럽게 헤집었다.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져 아무런 생각조차 떠올릴 수 없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머릿속을 새까만 물감으로 물들여서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내 모든 게 그에게 잠식되고 있었다.

“하아, 흐…….”

숨이 막혀서 컥컥거리기 직전에 입술이 떨어졌다.

전에 했던 것처럼 입 안이 헐어버릴 정도로 고통스러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따지자면 상냥함에 가까웠다.

겨우 키스 한 번으로 이렇게 숨이 차다니 정말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푹신한 침대에 등이 닿아 있으니 그나마 나았다. 편하다는 느낌이 다분했으니까.

하지만 아직도 그의 핏빛 눈동자는 채우지 못한 열망으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율리아. 이건 불순에 불과해요.”

뭐? 이게 겨우 불순이라고?

“불건전이 뭔지 이제 직접 알려드리겠습니다.”

아니. 굳이 불건전이 뭔지 몸소 느끼고 싶지는 않은데.

“아뇨! 알려줄 필요 없는데요!”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했었죠? 걱정하지 말아요. 이번에는 분명 다정할 테니까요.”

두 팔목이 그의 손에 의해 붙잡혔다. 더는 움직일 수도, 피할 공간도 없었다.

나른한 맹수처럼 웃음을 짓는 그의 얼굴을 보며 닥칠 암담한 미래를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다.

또다시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집어삼켰다. 내 몸은 그를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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