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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14화 (14/141)

#14화

“황녀님?”

“아…… 유모.”

“거기서 뭐 하세요? 아니, 황녀님! 지금 그렇게 입고 거기에 계시면 어떡해요?”

“어?”

“그러다가 정말 감기 걸리세요!”

“알았어……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는데.”

유모는 걱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이 정도로는 절대 감기에 걸리지 않는데.

내가 옛날처럼 몸이 약한 것도 아니고 아직 어린아이에서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어엿한 어른인데.

그래도 나는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니까. 원래 자려고 했던 거라 침대 안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황녀님.”

“응?”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이에요.”

“……내가?”

“네. 우리 황녀님…… 잠을 못 자는 것도 아니고 못 먹는 것도 아닌데 왜 안색이 안 좋을까요?”

그야…… 아마 흑막 때문에?

“걱정이라도 있으면 꼭 말해주셔야 해요!”

“걱정은 무슨!”

걱정이라. 딱히 걱정은 없는데.

아니, 굳이 걱정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흑막이 내일 찾아오지 않을지에 대한 걱정이었다.

유모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좋았다.

“유모.”

“네. 황녀님.”

“지크베르트 공작이 준 거는 전부 버려. 알겠지?”

“네, 그럴게요. 제가 그리해서 황녀님의 안색이 좋아질 수만 있다면요.”

* * *

“황녀님!”

“으응…… 몇 시야?”

“아침인데…… 일단 밖을 한 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유모의 말에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벗어나 창밖을 보았다.

순간 잠이 확 달아났다.

“허…… 어? 어제 간 거 아니었어?”

밤에 오지 않겠다는 그 말이 낮에 오겠다는 뜻이었던 걸까.

나는 낮에도, 밤에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으로 했던 말이었는데.

심지어 흑막은 또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걸까.

너무 빤히 봤던 걸까.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황녀님?”

“아빠한테 가야겠어.”

공식적으로 흑막을 제국에서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떠올랐다. 꽤나 합법적인 방법이.

가능하다면 거기서 죽어준다면 나의 소원이 이루어질 테고, 운명대로 패배한다면 그 힘을 억누르는 데 도움이 될 거였다.

이건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선택이었다.

“네에? 황녀님, 지금요?”

“응.”

“……급한 건 알겠지만 일단 옷부터 제대로 입고 가는 게 좋겠어요.”

“아…….”

깜빡했네. 내 정신 좀 봐.

다급히 옷을 갈아입고 흑막이 있는 쪽이 아닌 반대쪽을 통해 아빠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체통 따위는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체통보다는 내 목숨과 가족의 목숨이 중요한 거지.

“아빠!”

“율리아?”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아직은 제국이 패배하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이 전쟁이 처참하게 패배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흑막을 이 전쟁에 내보내 죽거나 참패해서 돌아오게 한다면 이것은 황가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또한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힘을 누를 수 있는 찬스.

원작에서 흑막이 참전하지 않은 전쟁이었던 만큼 황권이 약화되면서 반역을 통한 찬탈이 가능했다.

물론 내가 귀찮게 굴었다는 이유와 종합해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흑막이 이 전쟁에 참전해서 패배를 승리로 바꾸어서 미래가 변한다면?

이번에도 승전고를 울리면서 오면 어쩌지? 그의 명성에 누가 되는 전쟁이 아니라 그의 명성을 알리는 전쟁이 되면 어쩌지?

불안했지만 이내 그런 걱정은 떨쳐냈다.

“아빠. 아직 전쟁 준비 중이죠?”

“율리아? 그걸 네가 어떻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아빠! 지크베르트 공작도 그 전쟁에 참여하라고 하면 안 돼요?”

“하지만…… 율리아.”

“제가 이렇게 부탁할게요!”

“으음…… 이번 전쟁은 지크베르트 공작을 참전시킬 명분이 없단다.”

“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이었다.

“지크베르트 공작이 직접 참전하겠다는 의사를 보이지 않는 이상 우리 측에서는 멋대로 내보낼 수 없단다.”

“정말…… 불가능해요?”

말하는 걸 보니 진짜 같았다.

아빠는 무척이나 불가능하다는 느낌과 딸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결국 아빠도 어쩔 수 없는 걸까.

“율리아. 네가 지크베르트 공작을 무척 기피하고 있다 들었단다.”

“…….”

“네가 지크베르트 공작을 참전시키려는 이유가 네게서 그를 떨어뜨리기 위한 수단이라면…….”

아빠의 다음 말이 궁금했다.

“네가 황실 소속 별장에서 요양을 하고 오는 건 어떻겠니?”

“정말요?”

“그래. 네가 바란다면. 제국의 황녀인 네가 하지 못하는 건 없으니까.”

“…….”

“물론 너를 매일 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네가 그러는 편이 좋다면 허락하마.”

“아……빠.”

“우리 딸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 네게서 떨어뜨리기 어렵다면 네가 멀리 떨어지면 되지 않겠니.”

역시 나는 가족이 소중했다.

원인이 무엇이고 그 과정이 어떠하던 결과적으로는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가족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아빠. 있잖아요.”

“응?”

“이번 신년제. 신년제가 끝나면 갈래요!”

“그래.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이번 신년제에도 참석하지 않아도 된단다. 억지로 그럴 필요 없으니까.”

“아니에요.”

억지로는 아니었다. 한 번 정도는 가보고 싶었다.

단지 내가 원작대로 움직이면 가족들이 죽을까 무서워서 지금까지 사교계에 직접적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니 한 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번 신년제만 참여하고…… 경치 좋고 사람은 별로 없는 곳에서 쉴래요.”

“여기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율리아, 너는 매일 쉬지 않니?”

“그건……!”

맞는 말이네요. 아빠의 말을 반박하려 했지만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정말 나는 날로 먹는 돈 많은 백수 생활을 영위하고 있으니까.

“맞……죠. 그건 맞지만! 집에서 쉬는 거랑 어디 놀러 가서 쉬는 건 엄연히 다르죠!”

“그래. 어디로 가고 싶은지 신년제가 끝나기 전까지 준비해두라고 할 테니 한번 찾아보면 좋겠구나.”

“네! 아빠 열심히 일해요!”

“그래.”

들어올 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빠의 집무실에서 유유히 빠져나왔다.

그래. 한적한 곳에서 좀 놀다 오면 다른 좋은 해결책이 생각나겠지.

그래도 이제는 마음이 후련했다.

흑막이 있는 곳은 피하는 게 좋겠지? 심리적으로 불편한 것도 있었고 그냥 조금이라도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제일 이해가 안 되는 점은 그래도 공작인데 하루 종일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있어도 업무에 지장이 없는 걸까.

그렇다고 밤에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꽤 의문이 드는 점이 차고 넘쳤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정말 일이 바빠지면 더는 여기에 오지 않을 테니까. 그때까지 칩거를 하면 그만일 뿐이었다.

“유모!”

“네, 황녀님.”

“황실 소속의 별장 중에 위치가 가장 좋은 곳이 어디야?”

“일단 목록을 뽑아다 드릴까요?”

“응!”

유모가 나가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장 좋은 방법은 흑막을 패배하는 전쟁에 참전시키는 거지만, 원작에서도 이 전쟁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니 포기해야겠지.

애초에 제국에서 이 전쟁을 하지 않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전쟁은 제국에게 있어서 자존심이 달린 일이었으니까.

전쟁을 피한다는 건 제국의 위상이 추락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니까.

어차피 참패할 전쟁. 흑막이 참전하면서 죽는다면 그보다 더 완벽한 스토리는 없을 텐데.

불가능하겠지? 원작의 큰 틀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

“황녀님. 최대한 추려서 가지고 왔답니다.”

유모에게서 황실 별장 목록들을 받았다.

“유모. 바다가 보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산이 보이는 게 좋을까?”

“음…… 아무래도 바다가 좋지 않을까요?”

“그런가?”

“네. 아무래도 수도에서는 바다를 보기는 힘드니까요. 산은 가까워도 바다는 거리가 있으니까요.”

“…….”

“물론 황녀님이 선택하는 거지만요.”

“응. 조금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창밖을 보자 체스터는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 걸까.

아니면 끈기가 넘친다고 해야 될까.

* * *

매일매일 같은 패턴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 왔는지도 모를 그가 꽃다발을 들고 있는 채로 서 있었고, 해가 지면서 어둠이 드리울 때 돌아갔다.

지겨울 정도로 반복했다.

그가 지쳐 떨어지기보다는 내가 먼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결국 먼저 지치고 포기한 사람은 나였다. 언제까지나 황성에서만 지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흑막이 찾는 사람이 세실이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원작 속에서도 세실만 언급되었지 다른 사람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제가 졌어요.”

매일 이렇게 구는 끈기 하나만큼은 인정해줘야지.

오히려 원작에서는 흑막이 아닌 내가 이렇게 굴었는데. 원작과 상황이 뒤바뀐 것 같았다.

원작대로라면 내가 상사병이 걸렸다며 그를 불러내고, 만나러 와주지 않으면 공작저로 친히 찾아가고, 밖에 있다면 기어코 찾아내서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게 나였다.

짝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토커처럼 굴었던 만큼 죽음으로 응징당했다.

그 내용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면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소설 속에서도 잘린 적 없는 목마저도 스산하게 느껴질 정도니까.

“공작님이 이겼어요.”

“율리아.”

“하지만. 제가 공작님한테 다가갈 일은 결코 없을 거예요.”

“…….”

“이제 이 짓도 그만 해요. 어차피 저를 사랑하는 것도. 제게 죄책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면 그저 보여주기 식일지도 몰랐다. 나는 흑막의 생각을 알 수 없으니까.

차라리 원작에서 보였던 행동이었다면 알 수도 있었겠지만.

원작에서는 전혀 내비치지 않았던 행동인 만큼 행동에 대한 의도를 알 수는 없었다.

“공작님께서 찾는 사람이 세실이 아니었다면 다시 찾으세요. 어차피 그 사람한테…….”

그냥 말을 하면 될 것을. 입이 쉬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 사람을 찾거나 그 사람이 나타난다면 분명 그 사람한테 집착할 거면서.

어차피 부질없는 짓이잖아. 그 사람이 나타나면 오히려 그는 내 존재를 귀찮게 여길 테니까.

“……그 사람한테 가요. 어차피 저는 공작님이 찾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율리아.”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제가 찾는 사람이 당신이든 당신이 아니든 이제 저는 당신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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