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방문이 열리면서 유모가 음식과 숄을 가지고 들어왔다.
“황녀님. 식사를…… 아니, 왜 차가운 바닥에 앉아 계세요?”
“어? 아무것도 아니야.”
유모가 건네는 숄을 걸치고 의자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보라색 히아신스로 구성된 꽃다발이 눈에 밟혔다.
“유모?”
“네?”
“그거 뭐야?”
내가 흑막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말라고 했는데!
저 꽃은 명백히 아까 흑막이 들고 있었던 꽃다발이 분명했다.
“뭐가요?”
“왜 꽃다발을 가지고 왔냐고!”
“제가 이걸 안 받아오면 공작 각하는 계속 저기 있을 것 같고, 황녀님은 공작 각하가 빨리 돌아가길 바라시는 것 같아서요.”
유모의 말을 듣자마자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정말로 흑막이 있었던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녀님. 꽃은 화병에 두면…….”
“버려.”
“하지만…….”
“버려! 지크베르트 공작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것도 꼴도 보기 싫단 말이야!”
“……네. 그럼 치우겠습니다.”
꼴도 보기 싫었다. 영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어.”
“네.”
유모는 빈 식기들을 가지고 나갔다.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자 차가운 바람이 내 뺨을 스치며 불었다.
멀리서 날아가는 새가 눈에 밟혔다.
“……어?”
근데 그 새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고 이내 그건 착각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새는 확실히 내 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새는 내 앞에서 멈췄다. 자세히 보자 발에 종이가 묶여 있었다.
“종이?”
발에 묶인 종이를 조심스럽게 풀어서는 펼쳤다.
{미안해요, 율리아.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쪽지를 한 손으로 구겨버렸다.
“……거짓말.”
누가 보낸 건지 짐작이 됐다. 내게 이렇게 말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니까.
흑막이 보낸 게 분명했다. 그러면 이 새는 흑막이 키우는 전서구인 걸까.
“하나도 안 미안해하고 있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잘도 종이에 적었다.
아니, 거짓말이니까 내 앞에서 말로 하는 것보다 더 쉽게 쓴 거겠지.
미안한 감정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할 사람이 이런 쪽지를 보내니 우습기만 했다.
그래도 새한테는 아무런 잘못은 없으니까. 물 정도는 줘도 괜찮겠지.
줄을 잡아당기자 시녀 한 명이 들어왔다.
“새한테 줄 물을 가져와.”
“네.”
새 앞에 물을 놓자마자 목이 말랐던 건지 잘 마셨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크베르트 공작가에서 황성까지 새가 날아서 오기에는 거리가 꽤 있는 편이니까.
“나는 네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새에게는 푸념을 늘어놓아도 되겠지.
이 새의 주인이 흑막이지만 여기서 내가 그를 험담하는 건 절대로 모를 테니까.
“제멋대로에. 전혀 다정하지 않고…… 얼굴이랑 몸을 빼면 남는 게 없는 사람이야.”
내가 기다리는 그 애는 분명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 되어 있을 거야.
무척이나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부모의 죽음에도 눈물을 쉽게 떨구지 못하던 강아지 같던 애였으니까.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나를 잊은 게 아닐까 싶어서 이제는 포기할까 해.”
찾고 싶었지만 그때의 나는 부작용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 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하나만은 기억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 지쳤다.
그래서 지금은 나를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바랐다.
“네 주인이 나와 결혼하는 걸 순순히 포기하면 좋겠는데.”
새는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지금까지 나는 자유를 갈망한 적 없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황녀라는 위치와 넘치는 재력부터 가족들의 애정까지. 딱히 부족할 건 없었다.
그저 나는 사랑을 갈망했다.
전생을 살아왔을 때 받았던 그 애정을 바랐지만, 지금은 그저 무난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유지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유모.”
“황녀님?”
방문을 열고 나가자 복도 끝에 유모가 보였다.
“유……모?”
왜 보라색 히아신스가 처음 보는 화병에 꽂혀 있는 거지?
왜 흑막이 들고 있었던 그 꽃과 똑같아 보이는 걸까. 내 눈이 이상한 것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 꽃은 뭐야?”
“아…… 황녀님, 그것이…….”
“유모가 아무리 내 유모라지만. 내가 그거 버리라고 했잖아.”
“황녀님…….”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유모는 황가에 소속되어 있는 거지…… 지크베르트 공작가에 소속된 게 아니야.”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화병은 큰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나 부서졌다. 바닥에 떨어진 꽃을 발로 짓밟아 뭉개버렸다.
“황녀님! 그러다 발을 다치십니다!”
“유모. 유모까지 내가 아니라 지크베르트 공작을 선택하지 마.”
불안했다. 믿어 왔던 유모가 사실 내 사람이 아니라 흑막의 사람일까 봐 무서웠다.
“황녀님. 저는 늘 황녀님의 편이랍니다.”
“그러면 왜 지크베르트 공작이 준 꽃을 화병에 꽂아둔 건데? 왜 자꾸 내 말을 거역하는 건데! 유모는…… 유모는 내 편이 맞는 거지? 유모는 내 곁을 절대로 떠나서는 안 돼.”
“네. 저는 죽는 그 순간까지 황녀님 곁에 있어 드릴게요.”
“약속 어기면 안 돼.”
유모를 꽉 끌어안았다. 눈에서는 뜨거운 액체가 흘러나왔다.
나는 절대로 흑막에게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을 거야.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지켜낼 거야.
가족도. 유모도. 황녀라는 신분도.
“황녀님. 울지 마세요.”
상냥한 유모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유모는 소리 없이 울고 있는 나를 달래주기 위해 내 등을 다정하게 토닥여주었다.
그 품이 너무나도 따뜻했다. 나는 이 온기를 지키고 싶었다.
* * *
저녁을 먹고 목욕을 한 후, 샤워가운만 걸친 채로 씻고 나왔다. 낮에 봤던 새가 창문 밖에 있었다.
새를 방 안으로 들였다. 자세히 보니 이번에도 발에 쪽지를 묶고 왔다.
이 쪽지 안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래도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으니까.
“지금…… 찾아왔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테라스 쪽에서 검은 형체가 일렁이는 게 보였으니까.
그래. 대낮에는 방으로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렇다고 밤에 불쑥 찾아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 낯짝을 내게 들이밀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왜…… 왔어요?”
테라스의 커튼 뒤로 사람의 실루엣이 얼핏 보였다. 아마도 흑막이겠지.
“보고 싶었습니다. 율리아.”
“저는 공작님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거 알잖아요.”
“율리아.”
“제가 그쪽 꼴도 보기 싫다는 거 공작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요!”
새는 자신의 주인에게 도로 돌아가려는 듯 테라스 쪽을 향해 날갯짓을 했다.
그 바람에 열린 문틈 사이로 그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미안해 보이는 저 표정까지도 전부 연출된 연기인 걸까.
“새는 데려가요. 누가 봐도 그쪽이 주인인 것 같으니까요. 그리고 다시는 새도 보내지 마세요.”
“율리아.”
“그리고 외간 남자는 황녀의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어요.”
황녀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아빠인 황제와 오빠인 황태자뿐이었다.
흑막만큼 무턱대고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경우는 더더욱 없었다.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님.”
“…….”
“우리 사이는 여기서 끝내요.”
제발…… 여기서 끊어내고 싶었다.
“애초에 공작님이 찾는 그 사람은 제가 아니니까요.”
이게 서로를 위한 길이니까. 아니, 어쩌면 나만을 위한 길일지도 모르지.
나는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고 소설의 내용과는 다르게 제국의 이름을 지킬 생각이니까.
그리고 이 남자를 소설 속 율리아처럼 바보같이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않을 거야.
“……다시 말해보세요, 율리아.”
“우리 여기서 끝내자고요. 앞으로는 아는 척도 하지 말아주세요.”
“…….”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고 싶었다.
“저는 공작님이 싫어요.”
“…….”
“공작님이 예전부터 찾던 사람은 클로이 후작 영애니까…….”
“제가 누굴 찾는지.”
계속 침묵을 고수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스산하면서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속내를 알아차리기 힘든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세실이 네가 찾던 그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이 소설을 읽은 독자로, 이 소설의 결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부할 수 있었다.
나는 소설의 흐름을 전부 바꿀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나의 비극적인 엔딩을 막고 가족들과 함께하는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바랐을 뿐이었다.
어쩌다가 모든 것이 어긋나버린 걸까.
내가 원작의 내용을 사소하게나마 바꾸려고 해서? 아니면 이게 내 욕심이라서?
“율리아. 방금 말은 정정하겠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은 제가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
거짓말.
세실이 아니면 누군데? 내가 아예 모르는 제삼자인 거야? 그럼 그 삼자한테 가면 되겠네.
그래. 이제 더는 흑막과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아서 안심이었다.
그런데 왜 해방감이 아니라 허전함이 드는 거지?
“율리아.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오지 마세요.”
“당신이 먼저 제게 모습을 드러내 줄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오겠습니다.”
“오지 말라고요!”
“…네. 당신이 제게 먼저 다가와 주기 전까지 제가 먼저 밤에 찾아오는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퍼덕거리던 새는 테라스로 날아가더니, 흑막과 함께 사라졌다.
이번에도 여기서 뛰어내린 건지 궁금해서 테라스로 뛰어갔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내가 봤던 모든 것들은 환상 혹은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