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정……말?”
“응.”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구나.
복잡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세실. 사랑하면 보통 어때?”
“으음, 율리아.”
“응?”
“나도 아직 연애 안 해봤거든?”
“어……?”
뭐야. 남주랑 썸이라도 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진짜?”
“율리아. 내가 연애를 하고 있었다면 너랑 지금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
“아…… 그러네!”
정말로 원작이 뒤틀리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여주인 세실은 남주인 이드리안과 이어져야 할 텐데.
둘이 잘 어울리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나로 인해 그 둘의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이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나 하나 살자고 내 친구의 행복한 결말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세실. 블레어 소공작은 어때?”
“응?”
“블레어 소공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잘생겼지.”
“그러면……!”
“하지만 어떤 것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고 엮여서도 안 돼.”
“어…… 왜?”
세실의 단호한 목소리에 당황스러웠다.
“율리아, 너는 황녀라 별로 상관없을지는 몰라도 우리 가문과 블레어 공작가와는 추구하는 방향이 많이 다르거든.”
세실은 살짝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세실이 한 말은 블레어 가문과 클로이 가문은 상생하는 관계가 아니라 대립하는 관계라는 뜻이겠지?
“그러면…… 지크베르트 공작가는?”
“공생관계지. 추구하는 방향성이 같거든.”
그러면 흑막과 여주는 같은 파벌이라는 소린데?
“그럼 너는 지크베르트 공작한테 아무런 마음 없어?”
“응.”
“어…… 왜?”
“으음…… 별로 엮이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맞아. 나도 흑막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거든.
“특히 적으로 절대 돌리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렇다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아.”
“세실.”
“응?”
“너는 약혼 언제 해?”
“어……?”
“결혼은 천천히 할 수 있지만 너는 약혼도 아직 안 했잖아.”
아니면 혹시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아직 약혼도 하지 않은 걸까?
“세실. 너…… 혹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야.”
“지크베르트 공작을 마음에 두고 있…….”
“절대 아니야!”
깜짝이야!
“으응…… 알겠어.”
“율리아.”
“응?”
“정말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응.”
진짜 흑막이랑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닌데.
말라가는 입 안을 축이기 위해 차를 마시려는 도중이었다.
“그러면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의 짝사랑인 거야?”
“푸흡! 콜록콜록!”
깜짝이야.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건지.
정신을 차리니 이번에는 내가 세실에게 찻물을 뿜었다. 다급하게 세실에게 손수건을 쥐여주었다.
“미안.”
“아니야. 정말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거든! 네가 기대하는 그렇고 그런 사이 전혀 아니야!”
“그래? 그러면 조심해. 사교계에 네 소문 장난 아니야.”
“…….”
“너도 마음이 있다면 상관없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확실하게 하는 게 좋을 거야.”
세실이 이렇게 말할 정도라면 어느 정도일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사교계에 얼굴을 단 한 번도 내비치지 않는 비밀스러운 황녀님을 짝사랑하는 전쟁 영웅이라니. 꽤 자극적인 이야기잖아.”
“뭐…… 뭐가 자극적인데?”
“그야 당연히 너와 지크베르트 공작의 비밀스러운 첫 만남이겠지. 어떻게 만나게 된 건지 모르니 다들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절대로 흑막과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는 알려지면 안 된다.
그냥 조용히 칩거 생활이나 마저 할까? 괜히 사교계에 발을 들여서 복잡한 일을 만들지 말고.
“율리아.”
“응?”
“이번 신년제 때는 네가 꼭 참여했으면 좋겠어.”
“……생각은 해볼게.”
고민은 하고 있지만 쉽사리 결정을 내리긴 어려웠다. 나는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참여한 적이 없었으니까.
세실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꼭 벌써 가려는 사람처럼 드레스를 정리했다.
“벌써 가게?”
“가야지. 내가 가는 게 아쉬우면 다음에 또 불러줘! 아니면 네가 클로이 후작저에 와줘.”
“응!”
세실을 배웅해주고 마차가 온전히 보이지 않아서야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빠?”
이제 방에서 쉴 생각이었는데 오빠가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율리아. 잠시 시간 좀 내줄래?”
“갑자기?”
“응. 갑자기.”
“오빠. 언제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어?”
설마 세실이 돌아갈 때까지 미련하게 여기서 나를 기다렸던 건…… 아니지?
“오래는 아니고 그냥 좀 있었어.”
오래 기다렸구나.
오빠는 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꼭 나를 에스코트 해주겠다는 의미로 보이는 행동이었다.
살짝 머뭇거렸지만 이내 오빠가 내민 손 위에 손을 포갰다.
“율리아.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응?”
“너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연애하니? 그게 진짜면 헤어져.”
“오……빠?”
아니. 나는 그 흑막과 사귄 적이 없는데 무슨 헤어져라 말라 하는 거야!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정말 세실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맞는 사실을 물어보면 억울하지는 않지!
아니, 어째서 내가 왜 흑막과 연애하는 것처럼 소문이 나 있는 거지?
“나는 그 공작이랑 사귄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세실도 그렇고 왜 오빠까지 이래?”
“너…… 연애하는 게 아니야?”
아니거든?
“네가 지금까지 남자를 만난 적이 없…….”
“적어도 지크베르트 공작은 아니야. 절대로!”
괜히 시간 낭비만 했다.
무슨 거창한 얘기라도 하는 줄 알고 나름 긴장도 하고 마음의 준비도 했었는데.
겨우 저런 말이나 듣자고 시간을 할애한 게 억울했다. 아무리 내 최애가 오빠라도 이렇게 말하니까 짜증 났다.
“……혹시 차였니?”
심지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해댄다.
“아니야! 도대체 무슨 소리야?”
“음…… 아까 네 친구는 언급을 하지 않은 모양인데.”
“뭐가?”
“네 눈가가 지금 되게 붉어. 꼭 운 사람처럼.”
“……심해?”
“응. 꽤. 그래서 널 울린 사람이 지크베르트 공작인 줄 알았지.”
아니 틀린 말은 아닌데. 이유가 좀 다르네.
“근데 연애하는 게 아니라면 네가 혹시 차였나 해서…….”
“오빠. 내가 누구한테 차일 사람으로 보여?”
아니, 실제로 소설 속에서는 많이 차였지만!
그건 원작에 불과할 뿐이지 지금의 내게는 전혀 상관없는 사실이었다.
애초에 고백을 한 적 없으니 차인 적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와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그건 아니지……?”
왜 말이 살짝 의문형으로 들리지?
“그럼 그런 헛소리는 하지 마. 그리고 나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아무런 사이도 아니거든?”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
“한동안 밖으로 안 나갈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칩거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칩거하면 흑막과 우연히 마주칠 일은 없을 테니까.
그쪽에서 또 황성에 몰래 들어오는 게 아닌 이상 마주칠 확률은 0에 가까우니까.
“그래. 네가 무슨 생각이고 어떤 행동을 하든 나는 너를 지지해줄 테니까.”
“오……빠.”
“나는 언제든 이유를 불문하고 네 편이 되어줄 테니까. 안심해.”
“정말?”
“응. 정말.”
온전한 내 편이…… 되어주겠다고? 정말 오빠는 무조건적으로 내 편을 들어줄 수 있을까.
* * *
“황녀님!”
“우응.”
“황녀님. 해가 중천에 떴어요. 이제는 일어나야 해요.”
“으음…….”
“황녀님. 지금 성에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께서 와 계세요.”
뭐? 지크베르트 공작?
“어?”
“성 앞에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어요.”
등골이 오싹했다. 아침부터 흑막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이었을까.
아, 해가 중천에 떴으니 더는 아침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하지만.
“그냥 돌아가라고 해.”
“물론 황녀님이 일어나면 전달해 드리겠으니 우선 돌아가시라고 했죠. 그런데도 황녀님이 나올 때까지 있겠다고 해서요.”
“……내버려 둬.”
어차피 적당히 있다가 돌아가겠지.
짜증 났다. 마지막에 어땠는지 알면서 이렇게 찾아오다니 정말 뻔뻔스러웠다. 정말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도 식사는 해야죠. 일어나세요.”
“으응…….”
그냥 한시라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흑막의 존재를 보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있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흑막이 싫었다.
하지만 궁금했다. 흑막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정도는 봐도 괜찮겠지.
“유모. 여기에서도 보여?”
“네. 저쪽이요.”
유모의 손가락이 향하는 곳을 보자 그는 보라색 히아신스가 한가득한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서 그런지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황녀님?”
나도 모르게 놀라서 벽 뒤로 숨어버렸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그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시선이 마주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저 꽃이라도 받아올까요?”
“아니! 아무것도 받지 마! 뭐라도 보내면 전부 돌려보내. 알겠지?”
“네. 그럴게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서웠다.
흑막의 생각을 읽고 싶어도 전혀 읽히지 않았다. 과정이 바뀌더라도 결과는 똑같을까 봐.
내 엔딩은 비극적인 죽음일까 봐.
“유모. 나 배고파.”
“여기로 가져다 드릴까요?”
“응. 숄도 가져다줘.”
“네. 잠시만요.”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으니까. 적어도 소설 속 율리아처럼 비참한 감정을 느끼지는 않겠지만.
소중한 가족들을 잃는 슬픔은 고스란히 느끼겠지.
다리의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죽고 싶지 않아. 그냥 살고 싶은데.”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닌데!
누가 남주랑 잘해보고 싶다고 했어? 누가 여주가 되고 싶다고 했냐고?
나는 그저 평범하게 가족들과 함께 살고 싶었을 뿐인데.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친 걸까.
그냥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사랑받고 싶을 뿐인데.”
무릎에 내 얼굴을 파묻은 채로 혼잣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