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가 잘못했습니다. 얼마든지 저를 싫어해도 됩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율리아.”
그는 우는 나를 품에 끌어안았다.
“흐윽…….”
“당신이 우는 모습은 보고 싶지가 않아요.”
더는 같은 공간에서 그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 다시는 보지 마요.”
그를 힘껏 밀쳐내고 계단으로 내려갔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붙잡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엉성한 실력으로 리본을 묶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역시 흑막과는 절대로 얽혀서는 안 됐다.
입술에 남아 있는 이 감촉이 싫었다.
“…….”
오늘따라 하늘은 왜 이렇게 맑은 건지. 입 안을 물로 헹궈내고 싶었다.
그래, 이게 맞는 거였다. 애초부터 엮이면 안 될 사람이었으니까. 이렇게라도 끊어내는 게 맞았다.
본인의 잘못이 더 크니까. 얼굴이 철판으로 된 게 아니라면 마주칠 일 따위는 없을 테니, 안심할 수 있었다.
“레이디?”
“……누구?”
태양 빛을 머금은 것 같은 화사한 백금빛 머리카락. 태양이 떠 있는 하늘을 담아 넣은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무척이나 따뜻한 인상을 풍기는 모습이 흑막과는 다른 분위기의 남자였다.
마치 꼭 원작 속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을 마주친 기분이었다.
“이드리안 블레어라고 합니다.”
정말 남자 주인공이었다. 흑막에 이어 남주를 직접 보게 되다니!
“레이디께는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요.”
그는 새하얀 손수건을 내게 건네주었다. 내가 그렇게 안쓰러워 보인 걸까.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상태는 확실히 엉망이기는 했다.
“고마워요.”
흑막과는 정반대의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이니 여주인공의 마음을 얻은 걸지도 모르겠다.
물론 잘생긴 얼굴이라는 전제 조건 하에 이렇게나 다정한 성격이라니.
내가 여주인공이라도 흑막보다는 이런 남주에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체스터가 아주 기분이 더러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 이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심장이 덜컹거렸다. 공포라는 걸 무엇인지 알려주는 사람처럼 내게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레이디?”
“…….”
남주를 방패 삼아 체스터를 피하고자 했다.
여주를 만나기 이전까지 이 둘은 친구였으니까. 충분히 그를 막아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바로 도망치면 되니까.
“체스터?”
“비켜.”
“이 레이디에게 볼 일이라도 있어?”
“네가 상관할 일 아니야.”
“물론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겠지만…….”
“그러니 비켜.”
슬쩍 흑막을 봤더니, 그 순간에 눈이 마주쳤다. 무척이나 화가 나 보이는 표정에 나도 모르게 몸이 흠칫했다.
공포감에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다시 남주를 방패 삼아 흑막의 시선을 피했다.
“율리아.”
“……저는 더 할 말 없어요.”
때마침 클로이 후작가 문양이 있는 마차가 보였다. 아마도 세실을 데리러 온 마차겠지.
이 틈을 타서 세실과 함께 이 최악의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때마침 세실이 카페에서 나왔다. 그런 세실에게 달려갔다.
“세실!”
“율리아?”
“나 좀 데리고 도망쳐줘.”
“……갑자기? 일단 뭔지는 모르겠지만 급해 보이니 도와는 줄게.”
세실의 도움으로 이 최악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율리아. 무슨 일 있어?”
“……하아. 세실. 나 한동안 칩거 생활하려고.”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 때문이야? 요즘 사교계에 소문이 파다해.”
“무슨 소문?”
워낙 사교계에는 관심이 없다 보니 어떤 소문이 퍼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크베르트 공작이 네게 빠져서 선물 공세에 구애까지 하고 있다고.”
세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주 궁금하다는 눈빛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세실의 눈을 피했다.
“그게 정말 사실이야?”
“……음.”
정확히 말하자면 구애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깝고, 내게 빠졌다 하기보다는 내 몸에 집착한다에 가까운 것 같았다.
차마 세실에게도 사실을 말해줄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는 엮일 일이나 구설수에 오를 일 따위는 없을 거야.”
“……율리아.”
“나는 늘 네게도 말했듯…… 황녀라는 이름 아래에 혼자서 살 거야.”
“율리아. 나는 네가 가끔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이렇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삶이 행복한걸.”
“결국 네가 좋다면 그게 좋은 거겠지.”
“우리 아빠랑 오빠는 내가 죽기 전까지 나를 놓을 수도 없고 내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이 아니었다. 오빠는 나를 보면서 엄마를 떠올리기 때문이었고 아빠는 죄책감이었다.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아니, 과거의 그 일만 없었어도 정말 순수한 애정이라고 착각했을 테니까.
차라리 빙의를 했으면 나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환생했다.
내 유년 시절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빠와 오빠가 나를 향하는 애정이 순수한 애정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빠랑 오빠도, 내가 평생 곁에 있어 주는 걸 원할 거야. 아빠는 몰라도 오빠는 그럴 사람이거든.”
“……율리아. 너는…… 이번에 다가올 황실 신년제에 참석하지 않을 거야?”
“가능하면. 이제는 성인이니까…… 아빠가 그런 거는 꼭 참여해야 한다고 하면 해야지.”
“나는 네가 사교계에 나오면 좋겠어, 율리아.”
솔직히 귀찮다는 이유가 가장 컸다.
이렇게 부족함이 없이 태어났는데 굳이 힘들게 머리를 쓰거나 눈치 싸움을 할 필요가 있을지.
가족들이 향하는 애정이 어떠하든 나를 사랑한다는 점은 변함이 없는데 굳이 피곤하고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낯을 많이 가리는걸.”
“율리아.”
“그래도…… 참석은 할게. 언제까지나 숨어서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어차피 흑막을 만나버렸으니 굳이 꽁꽁 숨어서 지낼 필요는 없을 테니까.
흑막과 절대 얽히고 싶지 않아서 지난날들을 황성에 칩거하면서 살았던 건데 이제는 그게 아무런 쓸모가 없어졌으니까.
“율리아. 힘든 일이 있으면 꼭 말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겠지만…… 적어도 들어줄 수는 있을 테니까.”
마차가 멈췄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세실.”
“응?”
“혹시 집에 급한 일 있어?”
“아니? 특별히 없는데.”
“차라도 마시고 갈래?”
여주인공. 남주의 사랑을 받고 섭남인 흑막의 집착을 받는 가장 행복하면서도 가장 힘든 인물.
“정말?”
“응.”
“좋아! 근데 연락도 없이 온 건데 괜찮을까?”
“왜? 뭐가 문제야, 세실. 너는 이 황녀님의 유일한 친구인데 이 정도의 특혜는 있어야지.”
이건 진심이었다. 아니, 세실에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진심이었으니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내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다.
“어…… 오빠?”
그런데 마차에서 내리자 오빠가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니, 왜 오빠가 여기서 나와?
“친구랑 같이 온 거야?”
“응. 왜? 안 돼?”
“아니……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만나러 간다고 나갔던 애가 공작가 마차도, 황실 마차도 아닌 마차를 타고 와서.”
“크게 신경 쓸 거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래.”
오빠를 지나쳐서 가려고 했는데 깜빡했던 세실이 떠올라서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뭐라고 해야 하지? 되게 밝은 느낌의 핑크핑크한 색이 가득해졌다는 느낌이 다분했다.
“으음…….”
기분 탓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세실과 오빠를 보자, 아까의 그 미묘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실! 어서 가자.”
“응!”
그냥 내가 착각한 건가?
세실과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함께 정원 한가운데 있는 테이블에서 차를 마시기로 했다.
하지만 세실은 마차에서 내리고 난 이후 뭔가 이상했다.
“세실.”
“응?”
차를 마시는 와중에도 눈빛이 뭔가 영혼을 빼앗긴 사람의 눈이었다.
“너 우리 오빠 좋아해?”
“콜록콜록!”
세실은 내 말에 사레들린 사람처럼 급격히 기침을 했다.
나는 봤다. 세실이 차를 삼키지도 않고서 기침을 하는 것을.
“흠흠…… 율리아. 전혀 그런 거 아니야.”
“뭐…… 네가 아니라고 하면 아닌 거겠지.”
딱히 더 추궁할 생각은 없었다. 세실이 저렇게 아니라고 손사래까지 칠 정도니 의심스럽더라도 믿어줘야겠지.
나는 세실의 절친이니까!
“세실. 그러면 너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푸흡!”
이번에는 마시던 찻물을 전부 입 밖으로 뿜었다.
“세……실.”
“율리아!”
내가 되게 거창한 걸 물어본 것도 아닌데. 그게 이렇게나 과민반응할 일인가?
“괘……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으음…… 근데 갑자기 왜 그게 궁금해?”
“그냥. 궁금해서.”
“어떤 종류의 사랑을 말하는 건데?”
“그냥 남자와 여자의 사랑?”
이런 사랑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내 주변에는 세실밖에 없었다.
“연인의 사랑이라면 역시 다정함 아니겠어? 혹시 이런 거 물어보는 이유가……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와?”
“아니야!”
“으음. 그래?”
“진짜 아니야!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아무런 사이 아니거든!”
“그래. 아직은 아니어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왠지 세실에게 말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율리아.”
“응?”
“내가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는 너한테 진심 같던데?”
“…….”
“그러니까. 진심이 아닐 거라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