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숨이 턱 끝까지 막힐 때가 와서야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낼 수 있었고 맞닿은 입술이 떨어졌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을 저질러버렸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다시는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미 지나버린 시간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후회되는 순간 중 하나가 또 생겼다.
“체스터.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요.”
“……무엇을요?”
“당신은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냥 제 몸에 집착할 뿐이에요.”
내 말에 오히려 그는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율리아, 당신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면. 그만한 책임을 지셔야죠.”
“……그게 왜 제 책임이에요?”
정말 어이가 없었다. 뭐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내뱉을 만한 말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짙은 욕망이 서린 새빨간 눈동자로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
“먼저 유혹하고, 먼저 저를 덮치고, 적극적으로 제 순결을 앗아간 사람이 율리아잖아요.”
아니, 내가 기억 안 나는 건 좀 없애주면 안 되는 거야?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니까!
진짜 저렇게 말하면 무슨 변명도 할 수가 없었다. 기억도 나지 않는 거라서.
“이제 율리아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아니, 그건 제 탓이 아니잖아요!”
“당신이 없으면 악몽을 꿔요.”
“…….”
사람 마음 약해지게 왜 이렇게 행동하는 건지.
이렇게 불쌍한 척 굴면 내가 무슨 말도 내뱉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는 건지.
만약 알고서 이렇게 구는 거면 되게 영악한 거다.
“당신이 없으면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율리아.”
“……제가 아니어도.”
“당신을 봐야…… 환각을 보지 않아요, 율리아.”
“…….”
“제발 제 옆에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이거 정말 진실일까? 아주 많이 의심이 됐다.
원작은 흑막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준 게 없었으니까.
그저 부모 없이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나왔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가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전쟁 영웅이 되어 돌아와서 제국의 공작이 되었다.
여주의 아버지 장례식 때 그녀를 처음 만나고 그 이후부터 다정함을 가장한 집착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을 예전부터 쫓아다닌 황녀에 대해서는 귀찮다며 황실 일가를 몰살시켜 버린다.
결국 그는 여주와 남주가 이어지기 위한 발판으로 전락하게 된다.
여주에게 어떤 말을 듣고 정신이 반쯤 나가고 미치광이가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퇴장하는 역할이었다.
하지만 체스터라는 캐릭터의 세세한 부분에 대해서는 원작에서 언급이 없었다.
어쩌면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환각을 보는 걸 수도 있었다.
“체스터…… 결혼은 안 돼요.”
“…….”
“그리고 아는지는 모르겠는데 집이 좀 엄해서요. 외간 남자랑 함께 있는 거 안 좋아해요.”
“아버님께서는 저와 함께 있는 걸로 뭐라 하실 분이 아닙니다.”
“……오빠가 뭐라 할 거거든요?”
솔직히 아빠는 내가 체스터와 함께 있는 걸로는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좋다고 두 팔 벌려 환영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오빠는 달랐다. 오빠는 내가 누군가와 결혼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아마도 아빠는 이제 엄마에 대해 내성이 생긴 걸 테고 오빠는 아직 엄마를 놓지 못한 거겠지.
나는 엄마를 무척이나 닮았으니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지금은 어떤 방향이든 나를 사랑한다는 건 사실이니까. 이제는 괜찮았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지금 제국의 황제 폐하는 아버님이 아니십니까.”
아니, 왜 우리 아빠 호칭이 아버님이 되어 있는 거야?
“아니…… 잠깐만요. 왜 아버님이라고 불러요?”
“황제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그 누구도 그 결정을 번복할 수 없다는 걸 알잖아요, 율리아.”
지적을 하자 말을 돌렸다.
“아뇨. 제가 요구하면 그 결정을 번복하실걸요.”
“정말 그럴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처음에는 애원하는 것처럼, 처량한 강아지처럼 굴었으면서 지금은 맹수처럼 굴었다.
어떤 모습이 진심인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모습 전부 진심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속삭여준다면…….”
“체스터. 연기하지 마요. 진심인 거 하나도 없잖아요.”
“율리아. 제가 연기하지 않고 진심으로 당신을 대한다 하더라도 도망치지 않을 자신이 있겠습니까?”
“…….”
“지금조차도 이렇게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제가 진심으로 대한다면 버틸 수 있겠습니까?”
이조차도 가면을 쓴 모습이라는 걸까. 흑막의 진심을 알기는 어려웠다.
원작은 남주와 여주의 서사를 중요하게 다루면서 그 외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거의 생략했었으니까.
그의 두 눈에는 오로지 나만이 담겨 있었다.
“네? 율리아. 어서 대답해보세요. 제가 지금처럼 친절이라는 가면을 쓰고 당신을 대하는 것이 좋을지.”
그의 손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당장이라도 나를 잡아먹고 싶은 걸 억누르고 있는 눈빛을 한 채로.
“아니면 제 진심으로 당신을 대하는 것이 좋을지.”
“……진심이 뭔데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말을 이을 수도, 그의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내 입술은 그의 입술에 잡아먹히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그를 밀어내고 싶어도 손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두 손이 겨우 그의 손 하나로 잡혀버렸으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 정도였다.
그의 입맞춤이 싫은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어 주길 원했다.
입술을 살짝 벌리자 그는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숨이 턱 밑까지 막혀왔을 때 입술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달뜬 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하…….”
머릿속이 온통 새까만 물감으로 물들어진 것만 같았다. 간신히 뜬 눈에는 새빨간 눈동자가 비춰졌다.
무척이나 차가워 보이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게 진심이에요?”
감정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오로지 소유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그 눈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야?
오로지 육체적으로만 소유하고 싶은 게 흑막의 진심인 걸까.
그렇다면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가면을 쓴 모습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결국 그 가면 안에는 이런 본성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니까. 어떠하든 원하지 않는다.
그냥 흑막과 더는 얽히고 싶지 않았다.
“이게 당신의 진심이라면…… 우리 다시는 보지 말아요.”
“제가 진심으로 당신을 대한다면 과연 제가 당신을 황성으로 돌려보내 줄 것 같습니까?”
섬뜩했다. 정말 흑막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았으니까.
“체스터.”
“당신은 꼭 불리한 상황이 닥쳐야 제 이름을 불러주시는군요.”
왜 그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제가 당신을 진심으로 대한다면 당신을 방에 가두고 저 이외의 사람은 만날 수도 없게 만들 겁니다.”
그는 손등으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눈빛은 아무런 감정도 읽어낼 수가 없을 정도로 미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한 사람인 건지. 아니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 건지.
“어쩌면 침대에서 일어날 수조차 없도록 만들 수도 있겠죠.”
“……체스터.”
“당신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리카락 한 올마저도.”
그는 내 머리카락을 가져가더니 입을 맞췄다. 그런데 왜 그 모습이 야릇하게 보이는 건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채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숨을 쉬는 방법을 망각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무척이나 잘생겨 보였으니까.
“당신이 내쉬는 숨 한 조각까지도 전부 저만 소유하고 싶습니다.”
“……그런 걸 사랑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래.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라고 하는 거였다. 이대로는 나만 상처를 받을 게 뻔한 미래가 보였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만 했다.
“체스터.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일 뿐이에요.”
“집착이면 어떤가요.”
어떠냐니?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당신을 다른 놈한테 뺏기고 싶지 않다는 건 결국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라는 감정과 흡사한 게 아닌가요.”
“그 뜻이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의미입니까? 당신이 원하는 이상형의 모습으로 맞춰주려고 저답지 않은 행동도 했습니다.”
“…….”
“당신이 다정한 사람을 원한다고 해서.”
“……연기했다고요? 다정한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요?”
“제가 다정한 척이나마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까?”
내 손가락 마디마디에 그의 손가락이 얽혔다.
그리고서는 나를 그대로 벽에서 움직일 수 없도록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힘을 주었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또 입을 맞추려고 하는 건가 싶어서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닿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을 뜨고서 살짝 밑을 보니 그는 입으로 내 옷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그러자 고정되어 있었던 리본이 한순간에 천 쪼가리로 바뀌었다.
“체스터!”
“어차피 여기는 저희 둘밖에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처음도 아니잖아요.”
그 말을 끝으로 풀린 매듭으로 인해 목 부근이 훤히 드러났다. 이제야 깨끗해진 피부가 다시 붉게 물들어갔다.
아마 돌아가서 확인해보면 선명한 잇자국이 남아 있을 게 분명했다.
“체스터!”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움직임을 멈췄다.
“율리아…… 울어요?”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가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로 내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으니까.
“율리아…… 울지 마세요. 제가 이렇게 구는 게 싫다면 평생 숨길게요.”
“…….”
“당신이 우는 모습은 침대 외에서는 보고 싶지 않아요.”
아니, 왜 잘 가다가 말이 그렇게 빠지는 건데! 그 말만 아니면 정말 넘어갈 뻔했다.
저 당황했다는 표정이 진심으로 느껴질 뻔했다.
“율리아. 울지 마세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그가 손가락으로 닦아주었다. 이 모습에 착각할 뻔했다.
이 사람은 다정해질 수가 없는 사람인데, 앞에서 했던 말처럼 본성을 다시 감추었을 뿐인 건데.
여기에 조금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그를 강하게 밀치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면서 강하게 말했다.
“……당신이 싫어요!”
아주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