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화
“세…… 세실! 내가 따로 연락할게!”
체스터의 손에 붙잡혀서 어쩔 수 없이 세실에게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3층까지 와서야 체스터가 내 팔목을 놓아주었다.
“율리아. 오늘은 저와 데이트하기로 한 날 아니었나요.”
“그……건 맞죠?”
“그런데 왜 제게 집중하지 않고, 한눈을 팔까요?”
“…세실은 제 친구고…… 그리고 체스터가 찾는 사람일 거예요.”
“제가 찾는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곁눈질로 봤는데 3층에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원래는 여기에도 손님이 한가득해야 하는데 의아함이 느껴질 때였다.
그는 내 뺨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을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한 층을 빌렸습니다.”
“……저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는데요.”
너랑 둘이 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다음번에는 주의하도록 하죠.”
“…….”
흑막과 단둘이 있다니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 아나.
“……체스터.”
“네.”
“세실이……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실이 아닐 리가 없었다.
원작 속에서 여주인 세실에게 집착했던 이유가 예전부터 찾아왔다던 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읽었으니까.
“율리아. 만약 제가 찾는 사람이 그 여자가 맞다 하더라도, 당신과 결혼할 테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는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라고요.”
“……제가 책임감이 없어서요.”
있던 책임감도 없애야만 했다. 그와 결혼하는 것만을 피할 수 있다면 못할 건 없었다.
아빠도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걸 보니 확실히 영향력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나도 좀 온건적인 방법으로 거절하는 게 좋겠지.
“압니다. 율리아가 책임감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는.”
“…….”
이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물론 내가 한 말이었지만 이렇게 들으니 되게 기분이 묘했다.
“체스터. 황성에 오지 마세요.”
“제가 가면 안 됩니까?”
“……공식적으로 방문하는 건 뭐라고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몰래 제 방으로 찾아오는 건 좀 자제해주세요.”
정말 황성의 경비가 허술한 건지 아니면 흑막이라서 들키지 않고 잘도 내 방으로 들어온 건지.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니 사전에 내 방에 오는 것을 차단해야만 했다.
“그러죠.”
의외로 순순했다. 그냥 웃는 걸로 무마할 사람처럼 보였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결혼하면 그곳으로 찾아갈 일도 없을 테니까요.”
“…….”
그러면 그렇지.
“율리아.”
“…왜요.”
“우리 어렸을 때 만난 적 있지 않아요?”
그거 네가 여주한테 하는 대사인데, 왜 나한테 해?
아니, 내가 언제 어디서 너를 만난 적 있겠어.
진짜 내가 세실 생일 파티에서 너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앞으로도 너를 만났을 일이 없었을 텐데.
내 인생 최대의 실수가 너랑 그렇고 그런 짓을 한 건데!
“아뇨. 저는 전혀 본 적이 없는데요.”
“……그렇습니까.”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거야? 사람 되게 부담스럽게.
쓸데없이 흑막 주제에 저렇게 잘생겨서는…… 아니, 원래 흑막은 잘생겨야 한다는 게 국룰이긴 한데.
“체스터. 그만 봐요.”
“무엇을요?”
“계속 저만 보고 있잖아요. 불편해요.”
“눈앞에 있는데 어떻게 안 봐요?”
할 말을 잃어서 입술을 뻐끔뻐끔거리고 있을 때 음료가 나왔다.
생각해 보니 아직 주문한 적도 없는데 어째서 음료수가 나온 건지.
그리고 가장 의심해야 할 부분은 늘 내가 여기에 와서 마시는 음료였다.
커피는 써서 마시지 않았던 나는 생과일주스를 마셨는데 그게 나왔다.
단골손님이라 알아본 건지 아니면 이 흑막이 내 뒷조사를 한 건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체스터. 꼭 저와 결혼해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어요?”
“이유가 필요한가요?”
“…제가 몇 번이나 말한 것 같은데…….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요.”
“…….”
“저를 사랑해요? 아니잖아요.”
나를 사랑하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만을 고수하는 너를 보면 안다.
너는 결코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양심 한 조각인 침묵을 선택한 거였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그냥 이런 육체적으로 얽힌 관계에서 평생을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혹사에 불과할 뿐이니까.
“대답하지 못하잖아요! 저를 사랑하지 않으니까요.”
“…….”
지금껏 흔들리지 않던 핏빛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저는 진심 어린 애정을 원하는 거지! 육체적인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율리아. 그럼 제가 평범한 연인처럼 대해주면 되는 겁니까?”
“…….”
“맛있는 걸 먹고, 연극도 보고, 선물도 사주고. 이런 걸 제가 해드리면 그것으로 되겠습니까?”
아니. 그냥 너라서 싫을 뿐이야.
“율리아.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매일 속삭여준다면 저랑 결혼해주실 겁니까?”
“……아뇨.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은 하지 마세요.”
단 한 번도 너는 내게 빈말이라도 사랑한단 말을 내뱉은 적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그냥 넘어가도, 내가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고 네가 공작저로 돌아가면 여주에 대해 뒷조사를 시작하겠지.
그리고 너랑 결혼한다 하더라도 너는 나와 이혼할 게 분명했으니까.
내가 순순히 이혼해주지 않는다면 내 가족과 함께 날 죽일 사람이 너였으니까.
지금 내게 이러는 건 단지 착각에 불과한 거라고 생각하니까.
“단 한 번도…… 제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잖아요.”
“사랑합니다.”
“이제 와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 와중에 생과일주스는 맛있었다. 심각한 상황이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맛만 좋아서.
주스가 아깝긴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이라도 여기에 있으면 버틸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더는 같이 있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먼저 이곳에서 사라지기를 바랄지도 몰랐다. 세실을 지금까지 찾아온 사람이었으니까.
“율리아. 멈춰요.”
그가 뒤에서 나직하게 경고했다.
하지만 나는 그 경고에 순순히 응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단을 내려가려는 순간이었다.
“율리아.”
뒤에서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계단을 내려가려고 한 그 순간 그에게 잡혀버렸다.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무슨 사람의 힘이 이렇게 강한 건지.
귓가에서 그의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 말…… 끝까지 듣고 떠나요.”
“……더는 할 말 없어요. 그러니 이거 놔요.”
“율리아. 제가 어떻게 해야 마음을 돌릴 건가요.”
쿵-
등이 벽에 닿았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화가 나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상처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꼭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그의 표정은 많이 상처받았다는 사람 같았다.
“율리아. 사랑해요.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거짓말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해야, 믿겠습니까?”
사랑한다고 지금 내뱉는 그 말이 얼마나 가벼운 건지.
나를 붙잡기 위한 수단으로 쓰일 정도면 얼마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인 걸까.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말을 해도 믿을 수가 없을 텐데. 아니, 믿지 않을 텐데.
“상식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잤을 리가 없잖아요, 율리아.”
“아뇨. 가능해요.”
“…….”
“제가 그랬으니까요.”
“당신은 그러면…… 하!”
그의 표정은 어딘가 엇나간 사람 같았다.
“당신은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입을 맞출 수 있고 잠도 잘 수 있는 겁니까?”
“……네. 저도 그럴 수 없을 줄 알았는데……그럴 수 있더라고요.”
그의 손이 내 턱을 꽉 잡았다.
그는 무척이나 상처를 받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로 포개졌다. 갑작스런 입맞춤이었다.
아주 많이 당황스러웠지만 그 당황스러움도 이내 그의 입술에 의해 사라졌다. 입 안이 얼얼해질 정도로 무척이나 거칠었다.
전혀 다정함과 상냥함이 없는 오로지 갈증을 해소하려는 사람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입술이 부르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배려 따위는 전혀 없는 입맞춤이었다.
굶주린 맹수처럼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훑었다. 입 안을 전부 헤집고서야 입술이 떨어지면서 신선한 공기를 들이켤 수 있었다.
“흐으…….”
“사랑이 없어도 이럴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 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
“네? 율리아, 어서 대답해 봐요.”
무서웠다. 다시 한 번 더 이 사람이 흑막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황실 따위는 갈아엎을 수 있는 그런 외부적으로는 전쟁 영웅이라고 불리면서.
개인으로는 황실을 제압할 수 있는 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깜빡했다.
내가 잠시 겁을 상실했던 모양이다.
“정말 마음에 없는 사람이랑 이럴 수 있냐고요.”
여기서 그럴 수 있다고 하면 그는 꼭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이 떠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제가 묻잖아요…… 대답해줘요, 율리아.”
“체스터.”
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까지. 내가 알고 있는 그와는 너무 달랐다.
충동적이었다. 떨고 있는 목소리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표정, 그리고 그의 애원에 흔들린 탓이었다.
여전히 그가 무서웠지만 동시에 안쓰러웠다. 꼭 내 예전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어서.
고작 이런 이유로 후회할지도 모르는 선택을 했다.
그의 양 뺨을 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그의 입술 위로 내 입술을 맞대었다.
그의 성격은 입맞춤에서도 드러났다.
숨결 하나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사람처럼 그는 혀로 내 혀를 옭아맸다. 짙은 숨결조차 그의 입술에 모조리 집어 삼켜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질 만큼 고통스러울 정도로 소유욕이 짙게 밴 입맞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