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화
“황녀님! 어서 일어나세요!”
“으음…… 5분만 더 잘래…….”
“오늘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와 만나기로 하신 날이잖아요!”
“……그러면 10분 더 잘래.”
강제로 일어났다. 생각보다 흑막의 영향력은 큰 모양인 것 같다.
벌써 그 이름만으로 내 유모를 구워삶다니 정말 대단한걸.
이미 씻을 준비가 다 되어 있기까지 했다.
씻고 나오면서 거울을 보자 다행히 목 부근의 붉은 흔적들은 희미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나오기가 무섭게 생각보다 화려한 드레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모. 이것보다는 수수하게.”
“네? 황녀님, 하지만……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와 만나는 거라면…….”
“수수한 거.”
나는 흑막에게서 벗어나야 하는데 화려하고 예쁜 드레스는 오히려 독이 될 테니까.
그래도 명색이 황녀이니 너무 수수하면 안 되고 적당히 화려하면서 과하지 않은 그런 옷으로 골랐다.
연보라색과 흰색이 적절하게 아우러진 드레스를 입자 유모는 나를 화장대로 데려갔다.
“유모……?”
“이제 단장하셔야죠.”
“아니. 화장 안 할 거야.”
“물론 황녀님께서는 맨 얼굴도 엄청난 미인이시긴 하지만…….”
“유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럼 귀걸이와 목걸이만이라도…….”
“……응. 그것까지만.”
유모는 아쉬워하는 눈빛이었지만 내가 말을 바꿔서 그마저도 안 된다고 할까 봐 부랴부랴 장신구를 가지고 왔다.
짙은 보랏빛이 도는 보석으로 세공된 귀걸이와 목걸이를 골랐다.
“황녀님…… 정말 이 정도로만 하실 건가요?”
“응. 모자만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많이 아쉬워하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흑막은 세실을 보는 순간, 내게서 관심을 거둘 사람이니까.
원작 속 율리아는 흑막이 여주를 만나기 전부터 봤었고, 흑막이 여주에게 집착하기 전부터 쫓아다녔다고 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조차 흑막은 관심을 주지 않았으니까.
“이제 갈게.”
“네. 여기 모자요.”
마차를 타고 지크베르트 공작가로 향했다. 물론 아빠 말을 잘 듣는 딸이니까 호위는 대동했다.
절대로 흑막이 무서워서 호위를 데려간 게 아니었다.
마차의 문이 열려서 내리려고 했는데, 바로 앞에 흑막이 있어서 심장 마비로 죽을 뻔했다.
“……안에서 기다리는 거 아니었나요?”
“남편이 부인을 에스코트하는 건 당연한 거죠.”
“……아직 결혼 안 했고 할 생각도 없다니까요.”
“곧 저와 할 텐데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더는 이어나갈 자신이 없었다.
“율리아. 그날 이후로는 처음 온 거잖아요? 언제든 이곳에 와서 지낼 수 있도록 방을 마련해두었으니…….”
“밖으로 나가는 거 아니었어요?”
혹시라도 집 안에 있다가는 지난번과 같은 불상사가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그런 최악의 상황은 피해야 하니까.
망각하면 안 됐다. 내 목적은 흑막과 얽히지 않고 내 가족들의 평화를 지키는 거니까.
“……흐음. 밖에서 데이트하고 싶으셨나 보군요. 뭐…… 아직은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에게 이끌려서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져 있는 마차에 탔다.
내 의견은 확실히 말을 해두어야 할 것 같았다.
“공작저 안에는 들어가고 싶지 않아요.”
“왜요? 거기만큼 저희의 추억이 있는 곳이 어디에 있다고.”
“전혀요. 정말 잊고 싶은 기억만 있는 곳이거든요!”
“흐음…… 저만큼 당신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남자는 없을 텐데요.”
무슨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건지!
낯 뜨거운 말들만 내뱉으니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제가 말하지 않았나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육체적인 사랑도 사랑 아닌가요.”
“……정신적인 사랑을 원한다구요.”
“그것도 제가 채우면 되는 거 아닌가요.”
“……공작님은 저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너는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니까. 원작 속에서도 그랬으니까.
-내가 그 여자를 사랑하냐고? 내가 사랑이라는 걸 할 사람으로 보이나?
체스터는 사랑을 집착과 소유로 아는 사람이었다. 결코 온기가 있고 애틋한 그런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삐뚤어진 사랑이라는 게 맞겠다. 독자들이야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야! 라고 댓글을 달았지만.
어쩌면 체스터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랑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독자일 때 생각했던 거지 당사자 입장에서는 전혀 원치 않았다.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러면 공작님은.”
“제 이름을 또 잊으셨습니까?”
암묵적인 협박이었다.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어느 정도는 그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해 말을 바로 바꿨다.
“……체스터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율리아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사랑을 모른다고 할 게 분명했다. 그런 대답이 나올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 상상 그 이상의 말을 내뱉었다.
“육체적 이끌림 역시도 사랑이라고 하죠.”
“…….”
지금 저게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지만 막상 직접 겪어보니 상상 그 이상으로 이상했다.
동공이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원작 속에서는 당연하게도 흑막과 여주가 한 번이라도 잔 적이 없어서 저런 대사가 안 나왔었다.
손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저랑은 반대네요. 저는 정신적 이끌림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맞춰드리겠습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방향이라면 기꺼이 맞춰드리죠.”
“……저는 다정한 사람이 좋아요.”
너는 결코 다정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걸 알아서 다정한 사람이 좋다고 말한 거였다.
아무리 네가 흉내 낸다고 하더라도 너는 결코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없을 테니까. 너는 결국 내게서 등을 돌릴 사람이니까.
“다정하고 상냥하고 잘생긴 사람이 좋아요.”
“그 사람이 당신이 기다리고 있다는 그 사람인가요?”
“……네. 엄청 착하고 잘생기고 다정한 사람이에요.”
아마도 그럴 거였다. 무척이나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부모님의 죽음에 목 놓아 울지도 못할 정도로 안쓰러운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꼭 강아지마냥.
“이미 율리아의 조건을 전부 충족했네요.”
“……네?”
내 귀를 의심했다. 물론 잘생긴 거 하나는 충족이 된 게 맞지만 나머진 전혀 아니지 않나.
“제가 생각보다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서요.”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저는 침대 위만 아니라면 충분히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데.”
“아니,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요!”
“원하신다면 침대에서도 최대한 상냥하고 다정하게 대해드리겠습니다.”
저 입을 막아버리고 싶었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날을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다. 내 인생의 최대 실수는 바로 흑막과 원나잇한 거였으니까.
“그럼 언제 어디서 할지…….”
“다시는 그 얘기 꺼내지 마요.”
“……그러죠.”
때마침 마차가 멈췄다. 도대체 어디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렸다.
“율리아, 제가 다시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네?”
“당신한테 어울릴 것들로 제작하라고 한 보람이 있었군요.”
잠시만 설마……? 유모! 이 귀걸이랑 목걸이 전부 이 흑막이 준 선물들이었단 말이야?
아니, 아마도 유모가 고르라고 놓은 장신구들 전부 흑막이 보낸 선물들이 틀림없었다.
“……원래 주인한테 돌려주고 싶은데요.”
“어차피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면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
“아니! 저는 그쪽이랑 결혼 안 한다니까요!”
“네. 원하는 대로 생각하세요, 율리아.”
진짜 짜증 났다. 답답한 건 나 혼자인 것 같아서 싫었다.
아니, 흑막은 왜 갑자기 나한테 이렇게 행동하고 난리야.
정말 흑막이라는 것만 몰랐다면, 아니, 흑막만 아니었더라면 혹했을 텐데.
“어디 가요?”
“율리아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가죠.”
아주 조금 걸어가니 아기자기한 카페가 보였다.
내가 바깥으로는 거의 잘 나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곳은 알았다.
밖에 나오면 내가 주로 가던 곳이었으니까. 그리고 많은 영애들의 인기를 끌고 있는 카페인데 언제 내 뒷조사를 한 거지?
무서운 사람.
카페 안으로 들어가자 세실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도 있었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이 흑막을 어찌해야 할까 아주 많이 고민이 되었다.
아니지, 오히려 지금이 더 좋은 기회인 게 아닌가?
세실에게는 미안하지만 흑막이 집착할 대상인 원작 여주를 직접 보면 이제 나에 대한 이상한 관심을 더는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일부러 세실에게 달려갔다.
“세실!”
“어머! 율리아!”
“생일날 잠깐 보고 못 봤는데 너무 반갑다!”
엉엉, 내 구세주! 흑막아, 이제 봤지?
네가 집착할 대상은 바로 여기 있는 세실이라고! 내가 아니라!
드디어 흑막에게서 탈출할 수 있는 걸까?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안정을 찾는 것 같았다.
“율리아, 옆에 있는 분은……?”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님이야.”
내가 소개하자 그는 마지못해 말하는 사람처럼 무척이나 귀찮다는 티가 나게 대답했다.
“네.”
“아…… 안녕하세요, 세실 클로이라고 합니다.”
“네.”
정말 짤막한 전형적인 단답형의 대답이었다. 원작에서 보았던 것과는 무척이나 달라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척 당황스러워서 그와 눈을 마주쳤다.
“율리아, 더는 볼 일 없으면 올라가죠.”
아니, 왜 흑막인 네가 시큰둥한 표정인 거야? 네가 찾던 사람이 세실 아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