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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7화 (7/141)

#07화

슬쩍 발을 들어서 바닥으로 옮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을 하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꽃다발이 눈에 밟혔다.

나 정말 되게 큰 실수를 한 것 같아서 그런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변명을 하려고 해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차마 고개를 올려서 그를 볼 수가 없었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으니까.

눈을 내리깔고 바닥만을 보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다음에는 밟히지 않도록 마음에 들 꽃다발을 가지고 오도록 하죠.”

흑막은 짓밟힌 꽃다발을 줍고는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저지른 죄를 스스로 잘 알아서 그런 걸까.

“편지를 받아서 왔습니다.”

“……화났어요?”

“제가 화나 보이십니까?”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화 안 났어요. 그러니 겁먹지 마세요.”

“정말 화 안 났어요?”

“네. 전혀 화 안 났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의 손이 내 뺨을 매만졌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로 화나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타고 아래로 내려와서 목을 쓸어서 깜짝 놀라 흠칫했다.

“율리아. 이렇게 목까지 가리는 드레스를 입은 이유는…… 저 때문인가요.”

“……그럼 누구 때문이겠어요.”

“저 때문이라니 좋네요.”

제정신인가? 진짜 이거 또라이 아니야?

그건 그렇고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았다.

“앉아서 얘기해요.”

“그러죠.”

내 바로 앞에 그가 앉았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오로지 나만을 보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웠다.

“……왜 온 거예요? 편지 했잖아요.”

“제대로 된 날짜가 없어서요. 황녀님께서는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서요.”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요. 체스터는 저를 사랑하나요?”

“무슨 뜻으로 묻는 겁니까.”

무슨 뜻으로 묻는 거냐니? 당연히 너랑 결혼을 안 할 의도로 말하는 거지.

“공작님은 저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렇게 느껴집니까?”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제 몸을 원하는 거 아니세요?”

내 말을 듣는 순간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그런 쓰레기로 보이십니까?”

아니었어? 원작 속에 나오는 너는 완전 쓰레기가 따로 없던데.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는 여자가 귀찮다고 그 일가족을 죽여 버린 너를 보고 쓰레기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할까.

물론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저를 사랑한다는 말은 결코 안 하시네요.”

이걸 핑계로 삼으면 될 것 같았다.

어차피 내가 흑막을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아빠와 오빠가 살해당할 위험은 없어질 테니까.

그걸 위해서라도 이제는 흑막과 얽히면 안 됐다.

“저도 공작님을 사랑하지 않지만 저를 사랑하지도 않는 공작님과는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사랑이 꼭 정신적인 거여야만 합니까?”

그러면?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면?

“황녀님께서는 육체적인 사랑은 사랑이라고 취급도 안 해주나 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는 정신적인 사랑을 하고 싶어서요.”

“해드리겠습니다.”

“……뭐를요?”

“연애부터 시작하면 되는 건가요?”

“…….”

정말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가 싫다는 걸 열심히 돌려 말한 건데.

내가 누구랑 연애를 한다고? 결코 흑막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런 내가 흑막인 너와 연애부터 시작하라고?

“아뇨. 공작님은…….”

“체스터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공작님도 저를 황녀님이라고 부르잖아요.”

“그럼 이제부터는 율리아라고 부르겠습니다.”

아니,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러니 이제 공작님이라는 그런 딱딱한 호칭 말고 체스터라고 불러요.”

“아무튼 저는 공…… 체스터와 연애할 생각 없어요. 물론 결혼도 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율리아.”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서 긴장이 되었다.

상대는 상냥함을 가장한 서브 남주가 아니라 흑막이었으니까.

“알고 계실 테지만 피임을 하긴 했지만 애초부터 피임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피가 역류한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갑자기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혹시 모르죠. 당신의 배 속에 제 아이가 있을지도.”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열심히 가임기 기간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하필 되게 애매한 날이었다. 머릿속이 착잡해졌다.

“율리아. 다시 말하지만 저는 책임감이 넘치는 사람이라서요.”

“……아닐 거예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요? 제가 보기에는 그저 진실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찾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어요!”

내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흑막에게는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그건 아마도 원작 여주와 관련되어 있을 테니 세실을 찾는 게 분명했다.

그는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 말을 하지 않았다.

“……저를 사랑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과는 결코 결혼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면 제가 율리아, 당신만을 바라보겠다고 한다면 저와 결혼할 건가요?”

“……저는 당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어요.”

처음으로 놀랐다는 그의 눈을 보았다.

늘 여유롭고 나른한 맹수 같았던 모습이 아니라 지금은 초조해 보이는 사람 같았다.

그래, 결국 흑막 역시 여주를 만난다면 돌아설 사람이었다. 그러니 끊어내는 게 옳았다.

“그 사람을 찾으시면 저와 결혼하지 않을 거잖아요.”

“제가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그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결혼하더라도 애타게 찾던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이혼하실 분으로 보이죠.”

“……저를 그런 쓰레기로 보셨군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주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결국 필요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말 그는 원작 속 미친놈이었으니까.

겉으로는 선량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지만 그 내면은 아주 잔혹하고 냉정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사람은 사랑이라는 감정은커녕 다정함이 무엇인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율리아.”

“네?”

“왜 당신의 머릿속에서는 제가 그런 인식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인식을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책을 읽었으니까. 그리고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침대에서도 다정하다기보다는 난폭하다에 가까웠으니까.

“5번만 만나요. 5번 만나고도 저와 결혼할 생각이 없다면, 앞으로도 보낼 구혼장들을 전부 철회해드리죠.”

“……정말요?”

솔깃해지는 제안이었다.

“네. 저와 5번 만나고 조금이라도 결혼할 마음이 생긴다면…….”

“좋아요. 그러면 그때는 결혼할게요.”

절대로 그럴 일 없었으니까.

원작 속의 흑막이 서브 남주처럼 등장했을 때는 무척이나 자상하고 다정했지만 여주와의 데이트는 늘 엉망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그의 탓이 아닌 상황 탓이 컸지만.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서 세실과 마주치면 그도 더는 내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흑막인 그가 애타게 찾던 사람은 세실이니까.

“그래요, 율리아. 한 입으로 두말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가까이 오지 마세요.”

“네. 지금은 이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죠.”

“그러면 내일 만나요. 제가 공작저로 가면 되나요?”

이 흑막이 황성에 오면 혹시나 가족들과 마주칠까 봐 불안했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았다.

“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그럼 내일 봐요, 율리아.”

그는 이제 응접실에서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손잡이를 잡은 순간 그는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율리아, 오늘도 무척 예쁩니다.”

그게 할 말이었는지 더는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나갔다.

방에 혼자 남자 긴장이 탁 풀렸다.

정말 흑막이랑 한 공간에 있으면 좀처럼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편한 장소가 있다면 그건 침대 위…… 아니, 이게 아니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내 성으로 돌아갔다.

“그…… 황녀님……. 지크베르트 공작가에서 선물을 다시 보냈습니다.”

“……뭐?”

“아침에 보낸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이에요.”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저기 또 편지가 있었다.

{아침의 것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여서, 전부 새로 사 왔습니다. 이번 선물은 마음에 들면 좋겠군요.}

그리고 그 아래에는 무엇인가 더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이번에도 선물을 돌려보내신다면, 돌려보내신 선물을 고른 사용인들은 전부 처분하도록 하죠. 예비 공작가 안주인의 안목에 맞지 않는 것들로만 구한 걸 테니까요.}

협박이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그래서 꽃다발을 밟았을 때도 덤덤할 수 있었던 걸까.

아니, 그리고 왜 자기네 사용인들의 목숨을 내게 전가하는 건데!

“황녀님…… 어찌할까요?”

“……유모가 알아서 잘 보관해줘.”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내일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만나기로 했으니까 알고 있어, 유모.”

“그럼요!”

유모의 눈이 반짝여서 그런지 엄청 부담스러웠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황녀님. 그 사람이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가 맞는 거죠?”

“딸꾹!”

갑작스러운 기습 질문에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저는 지크베르트 공작 각하라면 황녀님의 부군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해요. 무려 전쟁 영웅이 아니신가요.”

“……음.”

글쎄……. 그 사람이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서. 오히려 황실을 무너뜨릴 사람이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데.

그냥 유모가 착각하게 둬야겠다. 그게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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