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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6화 (6/141)

#06화

전부 지크베르트 공작가로 돌려보내 놓고서야 방으로 돌아와 쉴 수 있었다.

몸살 때문에 원래도 지끈거렸던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남들이 다 보게끔 선물을 보낸 건지.

설마 이거 내게 하는 경고인 걸까?

“유모. 나 편지지랑 펜 좀 가져다줘.”

아마도 목적은 어서 빨리 날짜를 정해서 보내라는 의미겠지.

“네. 그리고 폐하께서 점심을 함께하자고 했어요.”

“아빠가? 그러면 옷 갈아입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좀 편한 드레스를 입고 있지만, 아빠나 오빠를 본다면 지금 이 드레스는 입을 수가 없었다.

아직도 흑막이 만든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내 목부터 발목까지 철통 보호를 해줄 아주 답답해 보이는 드레스를 입어야 했다.

“그럼 오빠는? 아빠만 있어?”

“황태자 전하도 오실 거예요.”

“일단 편지 먼저 쓰고.”

어떻게 해야 최대한 미룰 수 있을까. 편지 한 장 쓰는데 그럴싸한 변명 하나 생각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걸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만나자는 의미를 담으면서도 그 기간을 최대한 미루되 전적인 책임은 흑막에게 있다고 써야 했다.

그래서 완벽한 한 줄을 만들어냈다.

“유모. 이거 지크베르트 공작가로 보내줘.”

“네.”

일단 큰 거 하나는 해치웠다.

이제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차나 마시면서 노는 게 오늘의 할 일이었다.

역시 황녀로 태어나서 그런지 이렇게 한량처럼 사는 삶이 좋았다.

가족들에게 사랑도 듬뿍 받으면서 하는 일 없이 돈 많은 백수처럼 사는 이런 삶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전생에 꿈꿨던 돈 많은 백수의 꿈을 이번 생에서 이룬 거였으니까.

“아빠!”

이제는 엄마가 없다는 점이 슬프지만 그래도 엄마의 빈자리가 최대한 느껴지지 않도록 노력해주는 유모와 나를 무척이나 사랑해주는 아빠와 오빠가 있었으니까 되었다.

그런데 아빠의 표정이 많이 심각해 보였다.

“아빠? 오늘 무슨 일 있어요?”

하지만 그렇게 큰일은 없을 것 같아서, 바로 늘 앉던 자리에 앉았다.

“율리아. 오늘 지크베르트 공작가에서 네게 선물을 보내왔다고 들었단다.”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을 할 수가 없었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전부 돌려보냈어요!”

“율리아. 근데 참 이상하구나. 지크베르트 공작이 너를 본 적이 없었을 텐데…….”

동공이 흔들릴 뻔했다. 공식적으로 내가 흑막을 만난 적은 없었으니까.

아니지. 공식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면, 만났다는 사실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닌가.

“……저번에 세실 생일이라서, 생일 파티에 참석했었잖아요. 그때 잠깐 봤나 봐요.”

“흐음…….”

“아빠도 알다시피…… 제가 많이 예쁘잖아요!”

솔직히 이런 미인은 흔치 않았다. 정말 거울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원작 속 흑막은 이런 미인한테 어떻게 그렇게 매몰찼었던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미인이 그것도 제국의 유일한 황녀가 좋아한다고 쫓아다니면 눈길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하긴. 네가 네 엄마를 많이 닮았지.”

당장의 위기는 모면한 것 같았다.

그래도 이제는 아빠가 엄마를 언급할 때 웃음을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나아진 것 같았다.

예전에는 아주 많이 괴로워하던 모습을 보였었는데.

“율리아. 네게는 선물이 간 것 같지만 이 아비한테는 구혼장이 왔단다.”

“……네?”

“지크베트르 공작은 죽어도 너와 결혼하려는 사람처럼 보이던데…….”

“안 돼요!”

그런 흑막이랑 엮여서 좋은 건 없으니까.

지금도 어쩌다 보니 약점을 잡혀서 거절도 못 하고 있는데 결혼이 무슨 소리인가.

어차피 여주랑 마주치면 여주한테 집착할 거면서!

원작에서 흑막이 여주를 보는 그 순간 내뱉은 말이 있었다.

-영애. 아주 예전에 만난 적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어렸을 때라던가.

처음에는 흑막이라는 사실을 몰랐고 여주에 이입해서 읽어온 거라 사실 남주보다는 섭남인 흑막을 응원했었다.

나는 서브 남주를 좋아하는 병이 있었기 때문에 흑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응원했다.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이유는 예쁜 황녀님께서 좋아한다며 따라다님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주만을 바라보았다는 점 때문에 여주와 흑막의 사랑을 응원했었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도 저도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고통을 아니까.

그 말이 얼마나 애틋하던지 흑막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응원했었는데.

율리아 황녀의 앞에서 그 가족들을 전부 죽이고 황좌를 차지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조차도 와 흑막이었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그 행동의 심각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었다.

내가 그 율리아 황녀로 환생하기 전까지는.

“……아빠. 혹시…… 저를 조금이라도 빨리 시집보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죠……?”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지크베르트 공작보다 더 나은 사윗감은…….”

“블레어 소공작.”

“음…… 블레어 소공작도 나쁘지 않은 사윗감이긴 하지.”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도 오빠가 온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이 오빠가 가장 잘생겼다고 하지 않았었나?”

“오빠!”

사실, 소설 속 내 최애는 율리아의 오빠였다.

여동생이 흑막을 좋아한다고 쫓아다닐 때 말리지 않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고, 동생을 무척 예뻐하는 현실에는 없는 전형적인 소설 속 오빠였다.

그래서 흑막만큼이나 많은 인기를 끌었지만 결국 흑막에 의해 목이 뎅강 하고 잘리는 엔딩을 맞이하는 비운의 엑스트라였다.

“언제 취향이 바뀌었니?”

“물론 오빠가 가장 잘생겼지!”

“그래. 너 결혼 절대 하지 마라. 내가 평생 끼고 살 테니까.”

이렇게 화목한 가정은 율리아가 흑막을 만나면서 파탄이 난다.

물론 율리아가 흑막을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런 딸의 행동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서 흑막과 결혼으로 맺어주려고 했으니까.

하지만 그 행동이 비극을 부른 거였다.

그러니 내가 흑막을 좋아하지만 않으면 될 뿐이었다. 흑막이 좋다고 따라다니지만 않으면 가족들을 지킬 수 있었다.

이런 버거울 만큼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 원작 속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거나.

아니면 그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으면 됐다.

흑막과 원나잇을 한 게 조금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아마 세실을 보는 순간 내게서 관심을 끊어낼 테니까.

“근데 오빠는 언제 결혼해?”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리 오빠는 약혼녀가 없었다. 명색이 황태자인데.

그리고 어른이 된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약혼녀가 없었다. 이상했다.

“황태자비라도 맞아야 하는 거 아니야? 아빠! 오빠 언제 결혼시킬 거예요?”

“율리아가 저리 말하는데, 너도 이제 결혼해야 하지 않겠니.”

황태자인데 이제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러다가 저 얼굴로 결혼도 못 하고 죽으면 어떻게 해.

“오빠. 오빠가 결혼 안 하면 우리 대에서 황가가 끊길 것 같은데.”

“율리아.”

“나는 결혼할 생각 없으니까 오빠라도 결혼해야지. 그리고 황태자이니까 그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어?”

“……율리아, 너는 내가 결혼하면 좋겠니?”

아니. 영원히 내 오빠로 남아줘!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 저 완벽한 외모! 다정한 성격! 그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완벽한 오빠니까.

쳇. 하필 환생해도 최애의 여동생으로 환생하다니 이게 되게 기쁘면서도 서글픈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오빠도 결혼 안 하면 좋겠어.”

“아버지. 저 결혼 안 합니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잖아!”

“하하, 알아들었어, 율리아. 조만간 황태자비로 적합한 후작가 이상의 귀족 영애가 있는지 찾아볼게.”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오빠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결혼할 때가 되긴 했으니까.

“아빠, 저 외출해도 돼요?”

“안 된다고 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안 된다고 한 적은 없지만 저번에 세실의 생일 파티에 간다고 했을 때는 은근히 말렸으면서. 아닌 척하긴!

“……그럼 외출해도 돼요?”

“혼자서?”

“호위 데리고 갈게요. 어차피 몰래 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나갈 때는 꼭 호위를 데리고 가거라. 그거면 됐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건 한 번으로 충분하니.”

원작 속에서 율리아가 사랑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어떤 짓을 하든 제지받지 않고 오히려 우쭈쭈 해주던 이유와 성격이 제멋대로였던 이유를 율리아로 살아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아빠와 오빠가 나를 사랑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내게서 온전한 나를 보는 게 아닌 엄마를 보는 거였다.

우리 셋은 똑같은 은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만 아빠와 오빠는 복붙을 한 것처럼 닮았다면 내 이목구비는 엄마와 판박이였다.

어쩌면 그걸 알게 된 원작 속의 율리아는 조금씩 성격이 엇나가기 시작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지금 삶에 충분히 만족하니까.

내게서 죽은 엄마를 투영한다 해도 나를 사랑해준다는 건 변함이 없으니까 딱히 싫지 않았다.

“오늘 말고 조만간 나가려고요!”

“그래.”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시종장이 오더니 아빠한테 무슨 말을 하자 아빠는 무척이나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나를 봐?

“율리아. 지크베르트 공작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다는구나.”

“……네?”

내가 제발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지금 당장 응접실로 가보는 게 좋겠구나.”

“……아빠!”

“이 아비가 황제라도…… 전쟁에서 워낙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다 보니……. 그냥 돌려보내는 게 쉽지가 않구나.”

“…….”

“네가 직접 거절하고 오는 게 가장 잘 먹힐 것 같구나. 아니면 지크베르트 공작과 비슷한 이와 약혼을 하던지.”

“……제가 가볼게요.”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잠시 잊고 있었는데 흑막이기 이전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시종장을 따라서 그가 있다는 응접실의 문이 열리는 순간 꽃다발이 보였다.

“……이게 무슨.”

“결혼할 사람에게 찾아올 때 이 정도는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꽃다발을 넘겨받는 순간 미끄러지면서 꽃다발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래,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실수로 밟아버렸다.

내 인생 최대 실수는 흑막과 원나잇한 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인 게 분명했다.

와…… 나 이렇게 죽는 건가? 그래, 짧지만 좋은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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