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빌어먹은 붉은 흔적들 덕분에 아빠를 만나러 갈 때도 살을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손과 얼굴뿐이었다.
목까지 오는 드레스는 답답하다고 잘 입지도 않았었는데 어쩔 수 없이 꺼내 입게 되었다.
“아빠!”
혼날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발랄하게 들어가야 했다.
집무실 안을 확인하자 아빠만 있는 게 아니라 오빠도 함께 있었다.
“오빠?”
“율리아.”
나도 그렇고 오빠도 그렇고 이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과 예쁜 보라색 눈동자는 온전히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거였다.
세 명 모두 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동자 색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집무실에 자주 드나들기 때문에 집무실 안에는 아주 푹신한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아팠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으냐?”
“그래서 가지 말라고 했었는데……. 다음부터는 술을 자제하는 게 좋겠어.”
아빠와 오빠의 걱정을 한몸에 받는 게 무척이나 기뻤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진상을 밝힐 수가 없었다.
흑막과 잤다는 사실은 평생을 묻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율리아. 마침 와서 물어보는 거니 부담은 갖지 말고 듣거라.”
놓여 있는 차를 마시며 아빠의 말을 들으려고 했다. 차를 마신 순간이었다.
“지크베르트 공작이 네게 구혼장을 보냈더구나.”
주르륵- 챙그랑!
입 안에 머금었던 찻물이 입 밖으로 흘렀고 손에 있던 찻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는 건 금방이었다.
그리고 그건 마지 내 심경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흑막은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저런 짓을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동안 비밀로 묻혀준다고 했으면서!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땔감으로 쓸 생각이란다.”
“아빠. 제가 누누이 말했잖아요! 저는 평생 아빠랑 오빠랑 함께 살 거라고요!”
“그렇지? 다른 귀족 영애들과는 다르지?”
“당연하죠! 저는 아빠랑 오빠랑 평생 함께 살 거라니까요!”
“다른 귀족 딸들은 평생 아빠랑 같이 살 거라고 했는데, 결국엔 약혼자를 데려왔다고 하더구나.”
“괜한 걱정이에요. 그 불길한 구혼장은 어서 태워버리세요!”
어여 태워서 없애주면 좋겠다. 저게 있으면 심리적으로 불안해지는 것 같았으니까.
앞으로는 흑막과 얽히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쎄하고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걸까?
“율리아. 그런데 지크베르트 공작이라면 널 믿고 맡겨도 될…….”
“아뇨. 싫어요. 절대로 안 돼요.”
“……그래. 네가 그리 완강하게 말한다면야 땔감으로 쓰마.”
어디서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려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어떻게 그 사람이랑 날 엮으려고 하는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가! 나를!
“율리아. 지크베르트 공작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 아니란다.”
“아빠도 알고 있잖아요. 제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거. 그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평생 아빠랑 오빠랑 살 거라고 말했었잖아요.”
정말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존재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주니까.
아마도 아빠는 내 동심을 지켜주면서 나를 황성 밖으로 내보내기 싫어서 맞장구를 쳐주는 거겠지만.
“그 사람이 나타나도 평생 같이 살 거라고 해주면 안 되겠니?”
“그럴게요. 아빠나 오빠가 허락하지 않는 결혼은 절대 안 할 거니까 걱정 마세요!”
내 말에 아빠와 오빠는 내가 무척 귀엽다는 듯 웃었다. 이제는 성인인데도 저렇게 날 바라보는 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앞으로도 이런 애 취급을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버지.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율리아는 제가 잘 챙길 테니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무슨 그런 소릴. 난 아직 살날이 많다.”
“걱정하지 않게 열심히 인수인계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아빠랑 오빠랑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저녁 식사를 끝낸 후에,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오빠. 혹시 어제 내 방에 들어왔었어?”
“아니? 왜? 누가 침입이라도 했어? 경비를 더 삼엄하게 할까?”
“아니야. 그렇게까지 과민반응할 건 없지만……. 경비를 좀 더 늘리는 건 좋은 방법인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오빠가 아니라면 도대체 누가 왔다 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대충 아무 일도 아니라고 둘러대고 내가 착각했던 것 같다고 말을 하고서 방으로 들어왔다.
답답한 마음에 시원한 바람이라도 만끽하면 나을까 싶어서 테라스로 가는데, 누군가 테라스로 침입을 한 느낌이 들어 멈칫했다.
저 손의 주인이 누구인지 보는 순간.
“괜한 걱정이었나 보군요.”
흑막께서는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넘어왔다.
어쩌면 어젯밤 내 방에 침입한 괴한은 흑막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보였으니까. 마치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처럼.
아니, 그리고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단번에 찾아서 들어온 거지?
세실마저도 내 침실에는 들어온 적 없는데……. 갑자기 아까보다 더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프다면서 절대 못 만날 것 같다고 편지에 구구절절하게 써놓더니, 안색이 아주 좋네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혼란스러워서 그런지 말이 횡설수설하게 나왔다.
“……다행이네요. 다 나아서. 계속 아픈 걸까 봐 많이 걱정했습니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무척이나 소중한 공예품을 쓰다듬듯 손길이 다소 조심스러웠다.
전에도 느꼈지만 아니, 전에는 직접 봤지만 검으로 다져진 몸이라 그런지 옷 위로도 그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이런 불순한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맨눈으로도 봤었지만 흑막은 생각 이상으로 몸이 좋은 편이었다.
“율리아. 저는 조금 당신과 떨어져 있었다고 미칠 것 같았는데 당신은 아니었나 보군요.”
“……음.”
“밤바람은 차요.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아니, 지금은 저녁…….”
……인데.
흑막은 나를 억지로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 좀 시원한 바람을 맞고 싶어서 테라스로 나왔는데 강제로 테라스에서 퇴출당했다.
그에게 할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쪽, 무슨 생각으로…….”
“체스터라고 불러주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체스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한테 구혼장을 보낸 거죠?”
“저의 황녀님께서. 저를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아 약간 경고한 거예요.”
내 뺨 위로 그의 손이 닿았다.
어제의 그 손의 감촉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손을 덥석 잡아서 어제 비볐던 대로 얼굴을 움직였다.
“……율리아?”
“어제 그 사람 맞죠?”
내 물음에 그는 재미있다는 듯 나른한 웃음을 짓더니 이내 내 얼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흐음……. 글쎄요?”
맞네. 어제 온 그 침입자가 이 흑막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빠인 줄 알았다. 나는 오빠랑 흑막도 구분 못 하는 멍청이가 따로 없었다.
“원래 아픈 사람을 건드리는 취미는 없었는데…….”
그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동시에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어제는 숨이 턱 막혀서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까지 숨을 쉴 틈을 주지 않는 거칠고 소유욕의 결정체 같던 입맞춤이었다면, 지금은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었다.
꼭 사람이 바뀐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다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싫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예쁜 행동을 하면 건드리고 싶잖아요.”
그는 나른한 늑대처럼 고혹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홀려 버릴 것만 같을 정도였다.
이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자각을 했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와 가까이 있으면 내가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경계할 수밖에 없어서 밀착되어 있는 그를 밀어서 거리를 두었다.
“감기는 옮기면 낫는다는 말이 있죠.”
“……이상한 수작 부릴 생각이라면 하지 마요.”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저는 아픈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는 없거든요. 그렇게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절대 못 믿었다. 아니, 믿을 수 있어야지.
“당장 잡아먹지는 않을 거니까요.”
“그럼……?”
“오늘은 정말 걱정되어서 찾아온 겁니다. 내일 선물을 이쪽으로 보내드리죠.”
그는 내 머리카락을 매만지더니 내 머리카락 위에 입을 맞췄다. 나를 빤히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내 취향의 얼굴은 아니었지만, 취향을 무시하는 잘생긴 얼굴이라는 게 야속하기만 했다.
저 얼굴만 아니었어도 내가 대형 사고를 칠 일도, 이렇게 밀어내지 못할 일도 없었을 텐데.
“편지 다시 보내요, 율리아.”
내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여기로 들어왔던 테라스 쪽으로 가더니 그대로 뛰어내렸다.
여긴 2층인데. 저렇게 망설임 없이 뛰어내리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보였다.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믿기가 힘든 모습이었다.
물론 원작에서 흑막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도 말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실 어느 정도 확신은 있었다. 어린 나이부터 전쟁터에서 살아왔다면 몸 어딘가에 상흔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의 맨몸에는 칼에 베였던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으니까.
몸이 깨끗할수록 그 실력은 엄청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했다. 검술 실력이 뛰어난 우리 오빠만 해도 약간의 상흔이 있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믿기지 않아서 그가 뛰어내린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지만 뛰어내릴 생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공포감이 느껴졌다.
이 높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내렸다니.
“…….”
어안이 벙벙했다.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건 이마에 닿았던 촉감이었다.
내려가는 건 둘째 치고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1층에서 여기로 단번에 올라올 정도면 경비를 강화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저런 괴물 같은 사람인데 남주한테 패배할 수 있는 게 맞아?”
여러 가지 의미로 괴물 같은 사람인데…… 아니, 보통 이럴 때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게 맞겠지?
그러면 남주는 얼마나 더 괴물이라는 거야?
저런 괴물 같은 흑막을 이기고 여주를 차지할 만큼이면…… 세실도 많이 힘들겠네.
* * *
“황녀님! 어서 일어나 밖을 확인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으응?”
유모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걱정이 되어서 잠옷 위에 숄을 걸친 채로 나갔다.
그 순간 유모가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떨었는지 깨달았다.
아니, 이걸 본 모든 궁인들은 저런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나도 들 정도였으니까.
밖에 나가자 꽃들이 한가득했고 마감처리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들이 모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누가 보낸 건지 잘 알게끔 이름이 떡하니 박혀있었다.
“……체스터 지크베르트?”
아니 이 미친놈이! 어제 말한 선물이 이런 걸 말했던 거였을까.
아니 선물을 보내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이렇게 남들도 다 볼 정도로 이런 보여주기 식의 선물은 필요 없었다.
상자를 열어보자 기절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렁였다.
물론 내가 황녀는 맞지만!
이런 선물들은 아빠나 오빠가 해주는 거면 몰라도 흑막에게는 무척 부담스러움이 느껴지는 것들이었으니까.
“어머! 황녀님!”
“…….”
“예쁜 보석들이네요!”
그래. 무척 예뻤다.
근데 이걸 보낸 사람이 아빠나 오빠가 아니라 흑막이라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휘황찬란한 것들을 발신인한테 되돌려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머리까지 차오를 것만 같은 분노를 억제하기 위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했다.
“유모. 이거 전부 지크베르트 공작가로 돌려보내.”
지금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