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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4화 (4/141)

#04화

마차가 멈춘 걸 보니 도착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얼굴이 그리 뜨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일단 내려야 하니, 다급하게 목 부근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팔목은 드러나지 않게 드레스 소매를 끌어당겼다.

에스코트도 받지 않고, 바로 달려갔다. 체통이고 뭐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들어오자마자 유모가 눈에 들어왔다.

“황녀님. 왜 이제야 오셨…….”

“……흐어어엉! 유모오!”

“황녀님? 갑자기 왜 우세요…… 아니! 이게 뭐예요?”

이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흑막에게서 일단 물리적으로는 벗어났다는 점에서 유모의 품에 안겨 펑펑 울 수 있었다.

참아왔던 감정들이 거대한 파도처럼 터져 나왔다.

“누가 감히 황녀님 몸에 이렇게…….”

“끄윽, 끅…… 유모, 나 일단 좀 씻고 싶어…….”

“네…… 알겠어요. 저는 약을 가지고 올게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아빠와 오빠 다음으로 많이 의지한 사람이 유모였다.

아무리 엄마가 나를 무척 사랑해줬다지만 엄마는 오빠가 태어나기 전부터 지병이 있어서 내 육아는 전적으로 유모가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유모가 내 정신적인 지주였다.

“……황녀님. 목욕물 받아 놨어요.”

“응…….”

욕조에 몸을 담그니까 그나마 나았다.

거기서도 씻었지만, 낯선 곳이었기 때문에 불편하고 꺼려졌던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황녀님.”

“…….”

“누가 우리 귀한 황녀님 몸을 이렇게 만든 건지 말해보세요.”

말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이건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아빠랑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줘. 분명 걱정할 테니까.”

“그걸 아시는 분이! 이렇게 돌아와요? 늦게 와서 얼마나 걱정 많이 했는지 아세요?”

“……미안해.”

“그래도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사고 한 번 안 치던 황녀님께서 외박으로도 모자라 늦으셔서 걱정 많이 했어요.”

“혹시 나 없던 사이에 아빠나 오빠가 다녀갔어?”

그러면 나는 뭐라고 변명해야 하지? 술에 너무 취해서 여주네 집에서 자고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지크베르트 공작이랑 잤어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충격을 받고 쓰러질 아빠와 오빠의 모습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것 같으니까. 절대로 안 됐다.

“걱정 마세요. 제가 황녀님이 과음해 가지고 들어와 잠들어서 깨우면 안 된다고 했으니까요.”

오. 역시 유모의 임기응변! 가끔 보면 저런 걸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다행이다. 진짜로 다행이다.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 아빠와 오빠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데!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며 나를 키웠는데 그런 청천벽력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지.

“어떤 자식이 우리 황녀님을…….”

“…….”

“잘생겼어요?”

“잘생기긴 잘생겼지.”

솔직히 잘생긴 건 맞았으니까.

내 취향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오빠라서 그렇지, 흑막 역시 독자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얼굴이었으니까.

남주가 햇살처럼 따뜻한 천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잘생긴 얼굴이라면 흑막은 냉혹한 악마를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무섭도록 잘생긴 얼굴이라고 묘사되어 있었으니까.

“잘생긴 녀석들은 얼굴값을 한다니까요!”

못생기면 꼴값이고.

“으휴…….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알면 황녀님은 이제 외출 금지당할 텐데…….”

“……안 들키게 도와줄 거지?”

“누구예요. 누군지 알려주면 도와줄게요.”

“……앞으로는 엮일 일 없을 거야, 유모.”

그래야만 했다. 흑막과 어울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아직도 온몸이 쑤셨다. 온몸에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왜 아침에는 거부할 수 있었음에도 거부하지 못했었던 건지.

아마 그 얼굴과 원작 속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절륜함 때문이었던 것 같지만.

“괜찮은 사람이면…….”

“유모도 알잖아. 나 결혼 생각 없는 거.”

“……황녀님이 결혼하지 않는 걸 반기는 사람은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뿐일 거예요.”

“아빠랑 오빠랑 그리고 유모랑 함께 살고 싶으니까……. 유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유모는 내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내가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이유는 딱히 이 이상으로 원작을 파괴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아빠와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삶의 목표였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 보았던 그 강아지가 다시 찾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작 속에 등장하지 않았던, 내가 아주 어릴 때 보아서 얼굴조차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은 내 또래로 보이던 그 남자아이.

“황녀님…… 아니면 그때 봤었던 그 이름도 모르는 애를 기다리는 건 아니죠?”

“그건 그냥 핑계지. 나는 아빠랑 오빠랑 오래오래 함께 살고 싶거든.”

이것도 진심이었다. 가족이 주는 이 애정이 너무 좋았으니까.

전생에도 가족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왔기 때문일까.

그 그리움이 이번 생에서도 여운을 남기는 건지 가족과의 관계가 중요하게 느껴졌다.

마지막 인사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왔던 게 한이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는 거 알잖아, 유모.”

“그렇죠……. 보통은 황녀님이라면 데뷔탕트도 아주 화려하게 치렀을 텐데…….”

“응. 그랬을 것 같긴 해.”

아빠는 가장 성대하게 내 데뷔탕트를 치를 수 있게 전폭적인 지원을 해줬겠지.

하지만 나는 조용히 살고 싶었다.

괜히 남들 눈에 띄어서 복잡하게 머리싸움이나 하며 사는 것보다는 한량처럼 사는 게 더 좋았다.

그리고 종종 친구도 만나고…….

“하지만 나는 이런 삶에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걸 유모가 가장 잘 알고 있잖아!”

“……아쉬워서 그렇죠.”

약간 죄책감이 느껴지긴 했다.

몸이 노곤노곤해지자 졸음이 쏠렸다. 잠을 자긴 했어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서 몸만 혹사당했으니 충분히 이럴 만했다.

목욕이 끝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목부터 손목과 발목까지 꽁꽁 가리는 잠옷이라는 점.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온몸에 낙인처럼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으니까.

“황녀님…….”

“피곤해서…… 좀 잘게, 유모. 아빠랑 오빠 오면 깨워줘…….”

“……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유모가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밖에 없었다.

정말 나를 위해서든 가족을 위해서든 흑막과 더는 얽히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온몸이 뻐근했다.

근육들 중 성한 곳은 안면 근육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몸의 근육들은 통증으로 아우성을 쳤다.

어휴, 내 팔자가 뭐 그럼 그렇지.

유모가 나가는 소리가 들려서야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런데 방의 온도가 왜 이렇게 춥게 느껴지는 건지. 이불을 더 끌어당겨 덮었다.

얼마나 잠들었을까.

“윽……!”

몸이 너무 더웠다. 아니, 덥다는 것보다는 뜨겁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너무 뜨거워서 답답했다.

그 순간 누군가의 손이 내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무척이나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 손을 덥석 잡아서 뺨을 부비적거렸다.

이제야 살 것 같았다.

손에 박인 굳은살의 감촉은 오빠인 걸까. 아니면 아빠가 날 걱정해서 찾아온 걸까. 최소한 검을 잡는 사람의 손처럼 느껴졌다.

시야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에는 내 눈에는 눈꺼풀을 들어 올릴 만한 힘이 남아 있지를 않았다.

“……아빠야?”

“…….”

아빠냐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러면 오빠가 온 걸까. 어지간히도 내가 걱정을 끼친 모양이었다.

그나마 내가 오후에 돌아온 사실을 몰라서 다행인 것 같았다.

“오빠구나…… 나 괜찮아…….”

“…….”

“아빠 말 잘 들었어야 했는데……. 콜록콜록!”

기침이 터져 나왔다.

혹시 감기라도 걸린 걸까. 내가 뭘 했다고 감기까지 걸린 건지.

아, 대충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가긴 했다.

몸이 약해지니까 아빠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파티였다면 나도 가지 않았겠지만, 클로이 후작가에서 주최한 파티였다.

아무리 데뷔탕트를 치르지 않았어도 사랑받는 황녀라는 타이틀 덕분에 교류를 하는 친구가 있었으니까.

물론 그 친구는 원작 속 여주였다.

흑막과 남주가 대립하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주였으니까. 물론 흑막은 남주에게 패배하고 남주와 여주의 사랑으로 흘러가지만.

세실 클로이. 원작 속 여주이자, 내 유일한 친구였다.

그 친구가 성인이 되고 열게 된 생일 파티였는데 절친인 내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실을 아빠와 오빠가 알고 있었기에 차마 강경하게 막을 수는 없었던 거였다.

“……때로는 말을 듣지 않는 것도 좋겠지.”

분명 오빠처럼 다정한 음성이었지만 오빠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뺨 위로 느껴지는 이 시원한 감촉은 좋았다.

내 뺨에 닿아 있던 손이 내 눈을 덮었다.

“자.”

오빠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순간 뜨겁던 얼굴이 시원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장 이상한 점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거였다.

이미 들어온 지 꽤 되었던 거라서 들리지 않았던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의문을 품기도 전에 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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