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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3화 (3/141)

#03화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라…….”

처음으로 그가 정말 흑막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는 나사가 빠진 사람처럼 들렸다.

무엇보다도 서늘하다고 느꼈던 그의 붉은 눈동자가 지금은 더 차갑게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다.

원작 속에서 말하는 그와 비슷한 모습 같았다.

글자로 읽었을 때에도 느껴졌던 섬뜩함을 현실에서 마주하니 더 무서웠다.

내가 한 말을 후회했다. 그냥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밀려왔으니까.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그와의 거리를 벌리고 있던 찰나, 그는 나직하게 웃음을 지었다.

순화시켜서 말하자면 아주 기분이 나빠 보이는 표정이었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분이 아주 더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율리아. 정말 질 나쁜 거짓말이네요.”

“거짓말 아닌데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당신한테 약혼자가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조금씩 벌어졌던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그의 한걸음에 단숨에 좁혀졌다.

내 노력이 무색해질 정도로 아까보다도 더 가까워졌다.

“그러니 약혼이니 뭐니, 마음에 따로 둔 사람이 있다는 그런 핑계로 빠져나갈 생각은 마세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또 쳤더니 이번에는 등이 벽에 닿았다. 이제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천천히 타고 내려왔다.

화가 난 것처럼 기분이 나빠 보였던 건 기우였던 걸까.

“맞아요. 그 사람이랑 약혼한 건 아니에요.”

“…….”

내 뺨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이 멈추면서 굳은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사랑이 없는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내가 말하는 사랑은 육체적으로의 사랑이 아닌 정신적으로의 사랑을 말하는 거였다.

“……오래전부터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담담하게 내뱉었다.

말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무섭고 떨리더니 막상 이 말을 내뱉고 나니까 속은 후련했다.

하지만 그가 내 말을 듣고 내뱉은 말은 내 말에 대한 강력한 부정이었다.

“거짓말이죠?”

“……제가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보이나요?”

“거짓말이라고 해요!”

처음으로 그가 내게 윽박질렀다.

본인도 소리를 친 것에 놀랐는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조금은 진정한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요.”

“…….”

“율리아. 그럼 잠은 저랑 자고…… 마음에 둔 사람은 사실 따로 있었다는 건가요?”

왜 그는 상처를 받았다는 눈빛을 하고 있는 걸까. 그 눈빛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다.

흑막답지 않은 눈빛이라서, 차라리 아까 전처럼 분노를 삼키는 눈빛이 그와 더 어울렸다.

이런 상처를 받았다는 눈빛은 무척 낯설게만 느껴졌다.

“대답해요. 율리아.”

“……네.”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리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정말 단 한 사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내가 아주 어렸을 때였고 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어떤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름조차 모르지만 얼굴도 지금은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지만 우는 게 무척 예뻤던 소년이라는 것은 똑똑히 기억하니까.

그 소년을 만난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으니까.

꼭 강아지 같던…….

“그럼 그 마음 접으세요.”

“네?”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 괜한 말을 더한 게 아닐까라는 후회가 머릿속을 스칠 때였다.

그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아! 그럴 필요도 없겠네요. 그냥 죽여 버리면 될 테니까요.”

그의 눈빛이 섬뜩했다.

무엇보다도 저 말을 허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으니까.

괜히 말을 꺼낸 것 같다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무서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율리아, 눈 피하지 마요.”

“……네.”

그의 말 한마디에 바로 눈동자를 굴려서 그의 붉은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 목숨은 소중하니까.

이 사람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 사람인지 독자로서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율리아. 그 사람을 머릿속에서 지워내 줄게요.”

무슨 말이 이어져서 나올지 긴장했다.

내 머리를 어떻게 쪼개버리겠다는 의미인 걸까. 아니면 그 사람을 세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걸까.

그래도 날 죽일 정도로까지 그에게 잘못한 건 없으니까.

굳이 죄가 있다면 흑막과 원나잇을 해버리고 도주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아침에 2차전을 한 것 정도?

“이제 당신의 머릿속을 저로 가득히 채울 생각이니까요.”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날 죽이려는 건 아닌 것 같았지만, 왜 저 웃음은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 때는 그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았다.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포개졌다. 맞닿아 있는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뒤로 내뺄 수도 없게 내 허리를 팔로 단단히 고정하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때면 입술을 떼어서 숨을 몰아쉴 틈을 주었다가 숨을 내쉬려는 순간 혀를 옭아매 왔다.

진득한 열기에 다리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았다. 그는 오로지 입맞춤만으로 내 정신을 쏙 빼놓았다.

“율리아.”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바쁘다던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바쁜 사람이 아닌 모양인 것 같다.

계속 여기서 미적거리기만 하는 걸 보니 바쁘다는 건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도망치고 싶었지만, 등 뒤는 벽이었고 앞엔 체스터가 있었다. 더는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는 내 귀 바로 옆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으르렁거리며 경고하듯 속삭였다.

“당장이라도 당신을 잡아먹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고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

“오늘은 이 정도로 놓아주겠지만, 다음번에는 이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등골이 서늘했다.

“배웅해줄 테니, 딴 놈 만나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그건 제 마음 아닌가요.”

“제가 미쳐 날뛰는 꼴을 보고 싶다면 기꺼이 제가 아닌 딴 놈을 만나보세요.”

저렇게 악랄해 보이는 웃음을 짓는 걸 보니 내게 경고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이거 내가 사람 한 명 잘못 만났다가는 그 상대가 황천길을 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아닌 다른 놈이 당신의 옆에 있는 건 두 눈을 뜨고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체스터…….”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사람을 베어 본 적이 없는데 곧 그런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군요.”

“…….”

저절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더 말을 했다가는 정말 집에 못 갈지도 모를 것 같아서.

아니, 집에 가더라도 살아서는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이번 주에 다시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되는 시간에 맞춰주겠습니다.”

“……싫다면요?”

“한번 버텨보세요. 어떻게 될지는 저도 장담하지 못하니까요.”

웃으며 저렇게 말하니까 그냥 말을 잘 들어야 할 것 같았다.

“황성에 돌아가서 편지할게요. 그거면 되죠?”

“네.”

내 말이 그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는지 그는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주저앉은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다정한 행동은 맞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고맙지는 않았다.

“율리아, 계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려갈 수 있어요.”

어디서 수작을 부리려고.

몸은 휘청거렸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전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그의 부축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걸을 수 있었다.

“이제 갈 거예요.”

“네. 조만간 데이트 한번 해요.”

“……고민은 해볼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는 친히 나를 마차까지 에스코트 해줬다.

아주 불필요한 친절이었다.

그는 갑자기 마차 안쪽으로 들어왔다. 무척이나 가까웠다.

“율리아.”

그의 손이 내 턱을 부드럽게 감쌌다. 다음에는 무엇이 이어질지 대충 짐작이 되기는 했다.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예상과 다를 바 없이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닿았다.

“이제 됐…….”

그냥 작별 인사처럼 짧게 끝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혀가 파고들었다.

코로 숨을 쉬는 법을 잊어버렸다. 숨결 한 조각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의 혀가 나를 옭아매 왔다.

그의 입술과는 다르게 손은 다정하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마치 살짝만 건드려도 깨질 것 같은 도자기를 다루는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입 안이 얼얼해진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때에야 그의 입술이 내 입술 위에서 떨어졌다.

내 손등 위에 입을 맞추고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나른하게 웃으면서 마차에서 내렸다.

“또 만나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차가 출발할 때까지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하고, 마차에 나 혼자 타고 있으니까 갑자기 심란해지면서 머릿속도 복잡해졌다.

“나 진짜 어떡해…….”

이제 집에 가는 길이라 변명을 생각해야만 했다.

드레스 소매 사이로 보이는 붉은 멍 자국들과 드레스로 차마 가리지 못한 목 부근의 붉은 흔적들이 어떤 일이 일어났었던 건지를 설명해주는 것만 같아서 그럴싸한 변명이 필요했다.

아니면 아빠나 오빠 몰래 들어가는 방법도 있기는 했다.

“……어떡하지?”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이 착잡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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