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2화 (2/141)

#02화

“……정말 그거면 돼요?”

“흠…… 글쎄요? 하는 거 봐서 결정하죠.”

두 눈 딱 감고 키스 한 번 하면 이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다.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렇게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고민도 잠시였다. 어떻게 보면 내가 더 이득이었다. 그거 하나로 비밀로 할 수 있다면 충분했으니까.

까치발로 서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 휘청이는 몸을 지탱한 채로 두 눈을 질끈 감고서 그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됐어요?”

“이 정도로는 전혀 비밀로 해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비밀로 해줄 건데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더니 내 뺨을 손으로 감싸서는 허리를 숙여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다른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더니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이어서 내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겹쳐졌다. 입술 사이를 파고드는 그의 혀에 저절로 몸이 흠칫했다.

밀착된 몸으로는 아침에 느꼈던 뜨거운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머릿속이 새까만 먹으로 잠식되는 착각이 일렁였다.

숨이 멎을 것 같을 때에야 입술이 떨어졌다.

입술이 떨어지고서도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숨이 차서 헐떡거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뜨거움이 느껴졌다.

그의 새빨간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웃음을 지은 채로 상냥하게 속삭였다.

“한동안은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한동안이요?”

겨우?

“네. 그럼 겨우 이 정도로 평생을 비밀로 해줄 것 같았나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거 완전 사기꾼 아니야? 아니, 이렇게 사람이 치사하게 굴어?

사실 흑막 아니지? 흑막 도플갱어인 거 아니야?

흑막이 이렇게 쪼잔하게 나올 리가 없었다.

“얌전하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하루 종일 같이 있어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 있어서요.”

“……아니…… 잠깐만요.”

이대로 물러서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상대가 흑막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해야 할 말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 말을 한다고 내가 죽임을 당할 것 같지는 않으니까.

“할 말이 더 있나요?”

“……아까 그렇게 말했죠? 제가 이 저택에서 나가는 걸 막지 않겠다고.”

내 기억력은 정확했다. 술만 안 마신 맨정신이라면 믿어도 될 테니까.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빛을 보자 불안함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꼭 대답은 들어야만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네.”

단숨에 긍정의 대답이 나와 한순간 미래가 밝아졌다. 그래, 내 앞날이 가시밭길일 리가 없지.

그렇게 행복 회로를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손이 내 뺨을 타고 내 머리카락을 한 줌 집어가더니 그 위에 입을 맞추면서, 낮게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하지만 그만한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저는 결코 당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거든요.”

“…….”

“저는 한 번 손에 들어온 건 꼭 쥐고 있자는 주의라서요.”

그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면서, 상냥하고 다정한 웃음을 지어주었지만 그런 표정과는 정반대의 살벌한 말을 내뱉었다.

아…… 나 잘못 걸려도 정말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그래, 무의미하게 희망을 기대한 내가 바보지. 정말 나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왜 이렇게 울고 싶지?

내가 주인공도 아니고……. 딱히 여주에게 있어서 해를 끼치는 역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악역이라고 하기도 애매한 흑막에게 반해서 졸졸 쫓아다니던 소설 속 희생양이었다.

조연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엑스트라라고 하기에는 비중이 있는 뭐라 정의하기가 애매한…….

아니, 이런 나를 엑스트라라고 하는 건가?

“아! 그리고 저 이외의 딴 놈들 앞에서는 술 먹지 마세요.”

“……제가 왜요?”

누구 좋으라고?

나를 빤히 응시하는 눈이 부담스러웠다. 어디 가야 한다면서 왜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가는 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율리아.”

이 와중에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왜 이토록 감미로워서 흠칫거리며 몸이 반응하는지.

저렇게 달콤한 목소리로 오늘 아침에 내 이름을 속삭여주었던 것 같았는데.

아니, 이런 쓸데없는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저는 분명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나직하게 위협적으로 경고했다.

“제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얌전히 남아 있어 준다면 상을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는 회유였다.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다정한 척하며 말을 하면 내가 도망 못 칠 줄 알고? 아니, 천만의 말씀!

나는 당장 이 흑막의 거주지에서 벗어나서 내가 사는 안전지대로 돌아가야 했다.

아무리 흑막이어도, 당장은 황실의 일가를 죽여 버릴 수는 없겠지. 아직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아마 원작 속에서 황가의 일원이 몰살당하는 때가 지금 내 나이를 기준으로 해서 성년이 된 후 이 년 뒤니까.

아직은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제가 돌아왔을 때, 이곳에 없을 때는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협박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분명 웃고 있는데 섬뜩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는 제 것을 되찾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

“아…… 너무 겁먹지 마세요. 누가 보면 제가 당신을 해치는 줄 알겠습니다.”

아니야? 나 해치는 거 맞지 않나.

무엇보다 지금 말하는 것도 좀 무서웠다.

오늘 아침에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상냥하게 속삭여주어서 그게 진짜라고 착각할 뻔했지만 이제는 절대 속지 않는다.

“율리아. 제가 당신을 해칠 사람으로 보입니까?”

응. 그렇게 보여.

원작 속에서 너는 너를 짝사랑하던 율리아 앞에서 황실 일가를 도륙했잖아.

그걸로 모자라서 더는 귀찮게 굴지 말라고 싸늘하게 말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부분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솔직히 내가 봐도 율리아는 무척이나 예뻤다.

어떻게 자기가 좋다고 쫓아다니는 이런 미인을 보고서 반하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귀찮다고 그 일가를 몰살해버릴 생각을 했을까.

독자 입장으로 말한다면 흑막에게서 가족을 지키는 일은 귀찮게 굴지 않는다는 것과 졸졸 쫓아다니지 않는 거다.

그래, 애초부터 엮이지 않는 계획은 실패했으니 절대 하면 안 되는 행동들을 머릿속에 잘 생겨둬야겠지.

“제가 당신을 해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너는 나를 해치진 않겠지.

원작 속에서도 나를 죽인 건 네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무력감이었으니까.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까.

나는 그런 비참한 엔딩을 맞는 엑스트라였다.

“그러니 저를 보면서 그렇게 무섭다는 눈은 하지 마세요.”

그가 날 끌어안으면서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절대 느껴질 리가 없는 죄책감이 느껴지는 걸까.

나도 참 나를 모르겠다. 여기서 왜 거짓말을 내뱉는 건지.

“제가 무서운 건 당신이 아니라 이 사실을 알게 될 아빠와 오빠를 마주치게 될 상황이에요.”

“……율리아.”

“네?”

“결혼식은 언제가 좋을까요?”

뜬금없는 소리에 두 눈을 깜빡거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걸까. 되게 비현실적인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당황스러웠지만, 그 심정을 최대한 숨기고 물었다.

“누구의 결혼식이요?”

“당연히 저와 율리아의 결혼이죠.”

그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이 대답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아…… 진짜 울고 싶다. 어쩌다가 내 인생이 이렇게 꼬여버렸을까.

“먼저 유혹한 사람은 율리아니까 절 책임져 주셔야죠.”

“기억이 전혀 없는데…….”

“아침으로 부족했나요?”

그가 내 귓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입술이 내 목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와 쇄골 위에 닿았다.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포개어졌다.

머리에서는 안 된다며 멈추라고 했지만 멈추기에는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달콤했다.

몇 번을 밀어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새까만 물감으로 머릿속이 잠식되어가면서 그에게 취해갔다.

그 순간 허리를 감싸는 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더는 그렇고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신이 확 들면서 나를 옭아매고 있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싫습니까? 당신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았었는데. 제 착각이었나요?”

“체스터. 어떻게 하면 제가 책임을 지는 거죠?”

“당연히 저와 결혼하는 거죠.”

“……결혼은 안 돼요. 차라리 다른 방법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엄청 단호했다. 딱 잘라서 말하는 걸 보면, 완강해 보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말을 이어서 덧붙였다.

“……결혼으로 책임지지 못하는 이유가 있어요.”

“…….”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무서웠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할 말은 하고 싶었다.

결혼은 평생인데, 사랑이 없는 결혼은 싫었으니까.

그리고 그는 결국 여주를 만나게 되고 여주한테 집착하는 사랑을 집착과 소유로 아는 흑막이었다.

무엇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이유는 들어나 보자는 것 같아서 떨리는 심장을 뒤로하고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마음에 둔 사람이 따로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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