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막이 내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
#프롤로그
머리가 지끈거리는 통증과 동시에 단단한 무언가가 내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떠지지 않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려서 눈을 뜨니, 내 허리를 단단히 붙잡고 있는 건 어떤 남자의 팔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기억이 제대로 나질 않았다.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허리가 욱신거리는 것과 내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라는 점.
무엇보다도 바로 옆에 있는 남자 역시 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두근거림은 설렘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 내가 외박했다는 사실을 아빠가 알았을 거라는 공포감에서 비롯되었다.
뭐…… 근데 이제 다 큰 성인이니까. 내 나이 스물, 한 번의 실수 정도는 있을 수 있는 법.
이 남자가 깨기 전에 몰래 나가면 기억도 나지 않는 어제 일을 없던 일로 취급할 수 있을 게 분명했…….
“분명 움직이는 게 힘들 텐데…… 멀쩡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어제 더는 못 하겠단 말은 거짓이었나 봅니다.”
“…….”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카락. 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진 무섭도록 잘생긴 남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두 눈을 깜빡였다.
“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 겁니까? 설마……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전부 저를 유린한 겁니까.”
“……아니요. 그건 아닐 거예요…… 아마도.”
아무런 기억도 없을 뿐이었다. 다만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서 최대한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그게 이 남자한테 거슬리는 행동이었을까.
“아마도?”
“……네. 아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기억나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는 내 위로 올라타고는 이글거리면서 아주 음험하게 번뜩이는 핏빛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한입에 잡아먹을 것처럼 굶주린 맹수 같은 눈동자에는 잔뜩 겁을 먹고 있는 내 모습이 담겨 있었다.
부담스러워서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쪽…….”
“체스터. 뭐, 어젯밤엔 체스타라며 매달리고 울어댔지만……. 편할 대로 불러도 됩니다.”
“……체스터?”
불안하지만 아니어야만 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핏빛 눈동자? 지크베르트 공작가의 상징적인 색이지만 아주 희귀한 색은 아니었다.
“네. 체스터.”
“……혹시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님?”
에이, 아니잖아. 거짓말 치지 마. 뭐, 그래 이름 정도는 같을 수 있지.
체스터라는 이름이 지크베르트 공작만의 이름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만큼은 아니어야만 했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늘 빗나간 적이 없었다.
“네.”
뭐?
“꺄아아아아아악!”
아니 미친! 왜 흑막인 네가 여기 있는 거야! 그것도 왜 나랑 어젯밤 침대에서 뒹군 사이로 있는 건데!
모든 게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절망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후…… 괴롭히려는 건 전혀 아니니, 겁먹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나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뜨거운 열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무릎에 몸이 흠칫 떨렸다.
마치 맹수를 앞에 둔 초식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고, 신경이 잔뜩 곤두서는 지금의 느낌이.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힘 풀어요, 율리아.”
무척이나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감미롭게 파고들었다.
시선이 얽히기 무섭게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벌어진 입술 틈새를 비집으며, 안을 파고드는 혀의 감각이 낯설었다.
입 안 곳곳을 탐색하듯 이곳저곳을 헤집는 움직임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걸 느꼈는지 그는 나를 안심시키는 듯 내 뺨을 손으로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하아…….”
머릿속이 어지럽게 녹아내릴 때가 되었을 때, 입술이 떨어졌다.
그제야 상쾌한 공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엉겨 붙은 흐트러진 숨결을 토해내며 원래의 호흡으로 돌이키려고 할 때,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낯선 감각에 옅은 신음과 함께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윽!”
커다란 손이 내 손을 덮었다.
정말 옴짝달싹하지 못하겠다는 게 무엇인지 온몸으로 느껴졌다.
머릿속을 감싸는 아찔한 전율에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는 가녀린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최대한 신음을 삼키기 위해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입술 다칩니다. 깨물지 마세요.”
귓가에 뜨겁게 울려 퍼지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숨이 턱 막혀오며 낯선 자극에 잠식되어갔다.
몸을 옥죄는 압박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01화
거울 속에 비친 여자의 얼굴은 무척 예뻤다.
윤기가 흐르는 화사한 은빛 머리카락. 자수정을 녹여 박아 넣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몽환적인 보랏빛 눈동자.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얼굴은 생기를 빼앗긴 사람처럼 퀭했다.
원래는 백옥처럼 새하얗던 피부는 붉은 자국들로 얼룩덜룩하게 온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 어젯밤부터 시작해서 오늘 아침까지 시달리며 괴롭힘을 당한 흔적이었다.
이 꼴로 어떻게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그것도 20년을 얌전하게 살아왔던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어떻게 아빠와 오빠를 볼 면목이 생기겠냐고!
“하아…….”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책 속에서 환생한 지 어언 20년인데. 19년 만에 이런 거대한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물론 내가 환생한 ‘율리아 베아트리스’라는 인물은 소설 속 엑스트라였다.
보통 책 속에서 환생하는 경우를 보면 남주나 여주에 의해 목숨이 위험해서 살아남기 위해 전전긍긍하지만 나는 아니었다.
내가 아주 화목한 황실 가정 속에서 태어나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막내 황녀라는 설정까지는 좋았다.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막무가내에 유아독존적인 성격을 가졌다지만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원작 속 율리아의 성격이지 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단 하나만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율리아라는 인물은 초반부 설정과는 달리 아주 비극적인 끝을 맺는 캐릭터였다.
그것도 흑막에게 반해서 귀찮아할 정도로 졸졸 쫓아다니고.
흑막이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율리아는 눈앞에서 자신을 사랑해준 황가 사람들이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도륙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충격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인물이었다.
“흐윽…….”
다리에 힘이 풀려서 풀썩 주저앉았다.
나를 사랑해준 아빠와 오빠를 나로 인해 죽게 둘 수 없어서 흑막과 절대 엮이지 않게 20년을 황성에서만 살았다.
그런데 20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실수로 원나잇을 해버렸으니 이거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아니, 그래도 내가 조연이나 엑스트라나 아니면 아예 원작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과 원나잇을 한 거면 모르겠지만…….
아니, 차라리 남주나 무해한 서브남주와 원나잇을 한 거라면 모르겠지만…….
하필! 그것도 하아피일!
나와 내 일가족의 목을 뎅강 해버리는 흑막과 자 버렸다.
술이 웬수지, 웬수야! 어제 술만 마시지 않았더라도 이런 인생의 역대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분명 전생부터 술이랑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전생에도 술을 퍼먹다가 죽었던 건데!
나랑 뭐가 엮여 있든 전생이나 이번 생이나 역시 어른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술을 적당히 먹으라고 아빠가 보내기 전에 내게 그렇게 일러뒀건만.
“율리아.”
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저 목소리에 감정이 울컥거리며 튀어 올랐다.
어쩜 저렇게 목소리마저도 흑막 같을까!
짜증 나서 화병으로 돌연사하거나, 허리가 박살 나서 죽든가, 아니면 목이 뎅강 해서 죽든가.
이유를 불문하고 내가 죽으면 저 흑막 때문이다.
나는 분명 자만추다.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는 그런 평범한 사랑을 꿈꾸던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보고 만남을 추구하는 욕망에 눈이 먼 사람이 되어버렸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나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져서 절망스러웠다.
“아아아아아악!”
원작 속에서 율리아란 캐릭터는 흑막한테 이성적인 관심을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집착하면서 스토커처럼 쫓아다닐 정도였다.
그걸 흑막이 귀찮게 여겨서는 율리아의 가족을 싹 다 죽여 버리고 자기가 황좌를 떡하니 차지하는 스토리였다.
차마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일부러 19년 동안 흑막을 피해 칩거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제 일로 그 모든 노력들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율리아?”
“들어오지 마!”
물론 내가 황녀여도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저 흑막보다는 아주 조금 위치가 낮지만.
어젯밤은 기억이 없으니 그렇다 치고, 오늘 아침에 내게 저지른 파렴치한 짓을 생각한다면 이렇게 막 대하는 걸로 화를 내기엔 본인 스스로도 양심이 없을 터였다.
아…… 왜 이렇게 서럽지?
아빠랑 오빠 말 잘 들을걸…… 아니, 그냥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때 못 이기는 척 그냥 황성에 짱 박혀서 있을걸.
“흐어어어엉-”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아주 땅을 치고 후회해야지!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뭐 하냐! 이미 끝났는데!
뭐가 끝났냐구? 내 인생이 끝났다.
내 순결도 빼앗기고, 거기다가 내 일가족의 목숨까지 흑막한테 뺏기게 생겼는데!
겉으로는 멀쩡한 척, 정상인인 척 구는데, 흑막이라는 그 역할에 충실한 아주 미친놈이라는 걸 내가 잘 알았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흑막이 들어왔다.
“율리아! 왜 울어요.”
“……내가 지금 안 울게 생겼어?”
지금 내가 우는 걸로 그치는 건 내가 여기서 자살이라도 하면 내 시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것 같아서야.
내가 죽을 땐 죽더라도 내 시체는 가족이 보고 죽어야 내 시신을 땅에 고이 묻어둘 거 아니야. 장례식도 성대하게 치러주고.
하지만 여기서 자살하면 네가 증거 인멸한답시고 내 시체를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해버릴 수도 있으니까.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저…… 저! 본인은 전혀 못 알아듣겠다는 표정이 가증스러웠다.
정말 어젯밤 일과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은 성인남녀가 아무것도 안 입고서 침대에 누워 있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한다면 그냥 실수라는 걸 인정하고 각자 갈 길을 가면 됐다.
하지만 이건 엄연히 그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이걸 아빠랑 오빠한테 어떻게 둘러댈 수 있을까.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제가 책임을 안 지겠다고 한 적 있었나요?”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더 기가 막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당신한테 단 한 번이라도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말을 했습니까?”
“아니요…….”
분했다. 책임을 안 지겠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그냥 한밤의 실수에 불과할 뿐이었다.
일탈! 그래, 일탈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서 그냥 없던 일로 치고 싶었는데.
“그냥…… 없던 일로 치면…….”
“없던 일로?”
“아까 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이건 성인남녀 사이에서 흔하고 자연스럽게 있을 수 있는…….”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변명이었다. 모든 성인남녀가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차마 눈을 마주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할지라도, 일단 그는 원작 속의 흑막이었으니까. 가능하다면 이 이상 얽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
깜짝 놀랐다. 목소리 때문만이 아니었다. 목소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저 눈빛에 두려움을 느꼈다.
원작 속 흑막, 체스터 지크베르트 공작.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어린 후계자가 가문을 물려받았으니 가주인 그를 밀어내기 위해 그의 친인척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난리를 쳤었다.
그 어린 가주는 제국이 펼친 정복 전쟁에 참전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선봉에 서며 어린 나이에 전쟁 영웅이 되어 제국으로 귀환했다.
제국으로 귀환하기가 무섭게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던 모든 친인척들을 전장에서 사용했던 검으로 친히 참수시켰다고 했다.
그것도 아무런 감흥조차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싸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죽였다고 했다.
아마도 그때의 눈빛이 지금의 저 눈빛과 같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서늘하고 무서웠다.
“당신은 제가 책임지지 않기를 바라는 겁니까.”
“…….”
너무 무서워서 입술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저 말에 대답은 해야 할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의사를 표했다.
그런데 뭔가 느껴지는 이 불길함은 도대체 뭘까. 그는 무척이나 위협적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 당신이 절 책임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내가 잘못 듣기라도 한 걸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흑막이 현실이라는 것을 쓸데없이 친절하게도 직시하게 해주었다.
“저를 책임지셔야죠. 율리아.”
“공작님. 저는…….”
“체스터.”
“공작님.”
“체스터라고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잘 불러줬는데 이제 와서 내외할 건가요?”
“내외하는 게 아니죠! 저는…… 공작님과 아무런 사이도 아닌 걸요!”
“황녀님께서는 하룻밤 잔 사이로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치부하나 보군요.”
그는 한 손으로 내 턱을 꽉 붙잡고서는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런 것치고는 처음이던데.”
“…….”
심장이 떨려왔다. 쿵쿵거리며 뛰는 이 심장은 필히 공포에서 비롯된 게 분명했다. 정말 어젯밤의 나는 무엇에 홀린 걸까.
기억이 없으니까 초조하기만 했다.
“율리아. 당신이 저를 책임져 주셔야 합니다.”
그는 내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에 입을 맞췄다.
그것도 아주 진득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내 손가락에 입을 다 맞추고는 손목에도 이어서 입을 맞췄다.
사람 한 명을 잡아먹을 것처럼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설마…… 저같이 순진한 사람을 유혹해서는 순결만 빼앗고 도망칠 생각은 아니겠죠?”
제일 순진하지 않은 사람이 저렇게 말을 하니까 어이가 없었다. 오늘 아침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군 게 누군데.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아니요.”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는 없었지만, 저 말에는 나름 할 말이 있긴 했다.
애초에 나는 누군가와 원나잇을 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나는 이 흑막이랑 무슨 생각으로 뒹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얼빠인 내 취향을 원망해야 될지도 몰랐다. 그는 흑막이지만 얼굴 하나는 잘생겼으니까.
어제의 나를 본다면 머리채를 잡아서 황성으로 던져 놓고 싶을 만큼, 어제의 내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공작님…….”
“체스터라고 불러요, 율리아.”
이번에는 무척이나 감미롭고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빛은 당장이라도 나를 한입에 삼켜버릴 것만 같은 더운 열기로 가득한데.
“……체스터.”
마지못해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만약 고집을 부린다면, 시간만 지체될 것 같아서 당장 원하는 바를 이루어주고 나는 여기서 나갈 생각이었다.
이미 외박을 한 것도 큰데, 거기다가 대형 사고를 친 것까지 알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율리아. 여기서 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요.”
목소리는 무척 다정한데, 말은 너무 섬뜩했다.
내가 이곳에서 나가면 꼭 죽여 버릴 것처럼 말을 하는데, 그 목소리만큼은 위협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정했다.
“나가면 어떻게 되는데요……?”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은 됐지만, 굳이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생각보다 원작 속 흑막이 윤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 헛된 희망을 품고서 물었다.
“굳이 확인하고 싶다면, 한 번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도망가다 잡히면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게 할 거거든요.”
상냥한 목소리만큼이나 섬뜩함이 뚝뚝 묻어났다. 저 말이 결코 과언이 아니라는 걸 몸소 체험했으니까.
지금 내가 허리만 욱신거리는 상태라도, 두 다리로 멀쩡하게 걸어 다닐 수 있는 이유는 체스터가 조절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나는 힘들어서 흐물흐물한 녹초가 되어버렸는데, 전혀 힘든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아니, 사람의 한계를 넘어섰으니 그러는 걸까. 등골이 서늘해졌다.
“저를 가두는 건 황족 납치인 거…….”
“제가 가둔다고 했나요? 움직이지 말라는 거죠. 저택에서 나가는 순간 침대 신세로 만들어달라는 걸로 이해하죠.”
“……오빠한테 이를 거예요.”
“네. 그럴 수 있다면 그러세요. 저는 말리지 않아요.”
전혀 먹히질 않았다. 협박을 해보려고 했지만, 스토리가 바뀌었어도 원작 흑막이라는 역할이 아주 잘 어울렸다.
내가 협박하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니까.
“우리 아빠랑 오빠가 알면…… 안 된단 말이에요…….”
“…….”
“그냥 혼나는 정도가 아닐 거란 말이에요……. 이런 건 둘째 치고 지금껏 사고 한 번 쳐본 적 없는데…….”
“그건 다행이네요.”
뭐라고?
“제가 당신의 첫 번째라서요. 첫 번째이자 마지막일 자신도 있거든요.”
“……제가 누군지 몰라요?”
“아주 잘 알고 있죠. 율리아 베아트리스 황녀님.”
다 알면서 이러는 게 맞았다. 혹시라도 내가 황녀인 걸 잠시라도 몰랐기를 바랐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어버릴 거였으면, 19년을 조용하게 살지 않았지!
“비밀로 해줄까요?”
“……정말요?”
“당신이 원한다면 이번 일은 입 다물어 줄 수 있어요.”
처음으로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다.
없던 일로 취급해주지는 않을 모양이라 많이 걱정했는데, 비밀로 해준다는 말에 희망을 보았다.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는데, 그의 웃는 얼굴이 범상치 않았다.
“제가 맨입으로 비밀로 해주길 바랍니까?”
“……그럼 어떻게 하면 비밀로 해줄 건데요?”
웬만한 요구사항은 들어줄 수 있었다. 이렇게 보여도 난 되게 황실에서 사랑받고 자라온 막내딸이었다.
황가의 보물을 달라고 하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교차하는 그 순간, 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가리키며 고혹적으로 웃었다.
“입을 막으려면, 입으로 막아줘야죠.”
그는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